윗집이 리모델링을 위해서 짐을 빼기 시작했다. 남의 일이 아니다. 윗집과 우리 집은 이사업체가 가장 싫어하는 책을 무지막지하게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대략 1천 권의 책을 들어냈지만, 여전히 좌불안석이다


부지런히 윗집을 오가며 정보를 수집하던 아내가 비보를 전했다. 책이 하도 많아서 이사업체 사장님이 극대노 했다는 것과 윗집 아저씨가 소처럼 일하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불안한 마음에 나가보았다. 과연 평생 대학에서 역사를 가르쳐온 고매한 교수님께서 이사 트럭에서 메뚜기처럼 이리저리 다니면서 짐을 옮기고 있었다.


 <모비 딕>에서 글로만 읽었던 포경선에서 일하는 말단 선원의 모습을 현장에서 보는 듯했다. 나와 눈이 마주친 윗집 아저씨는 나를 향해서 v 자를 만들어 보였다. 그러나 그의 미소는 나에게 다음 차례는 너야. 각오해라는 경고로 다가왔다.

 

사시나무처럼 덜덜 떨면서 다시 서재로 복귀한 나는 버릴 책을 또 물색하기 시작했다. 이사업체 사장님의 성난 표정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마치 페북 친구를 정리할 때 발견한 아랍인처럼 내 눈에 들어온 것은 몇 년 동안 구독했던 내셔널 지오그래픽이었다. 얇지만 돌덩이처럼 무거운 잡지다. 하도 무거워서 택배를 보내려고 해도 쉽지 않다. 새삼 한숨이 나왔다


이 잡지야말로 미국인들이 이사를 갈 때도 꼭 챙긴다고 소문난 귀중본 아닌가. 이미륵 선생의 소설<압록강은 흐른다>의 마지막 장면이 떠오른다. 자식을 머나먼 외국으로 떠나보내는 어머니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알 것 같다. 잘 가라. ‘내셔널 지오그래픽

 

서재를 정리하다 보니 끝까지 살아남는 목록이 추려진다.

우선 추억이 담긴 책이다. ex) 대학 시절 메모가 담긴 교재, 누나를 사모하는 총각 선생이 누나에게 선물한 책(이게 왜 내 서재에 있는지는 모르겠다)

둘째 사진집. 사진집은 절대로 버릴 수 없다.

셋째, 사전처럼 필요한 정보가 있을 때마다 들춰봐야 하는 참고용 도서

넷째, 최신 번역의 고전 소설

다섯째, 지금은 구할 수 없는 절판 본이나 희귀본. 또는 재출간되었지만, 무척 힘들게 구했던 절판 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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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2-07-30 1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왜 한 권도 못 버리실것 같은 느낌이 들지요 ㅎㅎ 윗집교수님 손 한 번 꼭 잡아드리시지 ㅠㅠ ㅎㅎ

박균호 2022-07-30 11:38   좋아요 1 | URL
버렸씁니다. ㅠㅠ 시원한 미숫가루 한 잔 타드렸어요 ㅎ

잉크냄새 2022-07-30 13:5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내셔널 지오그래픽 결국은 버렸습니다. 책꽂이에 있으면 뽀대나는데...

박균호 2022-07-30 13:58   좋아요 1 | URL
네...저도 ㅠㅠㅠ 저 영롱한 노란 빛 ㅠㅠㅠ

2022-07-30 15: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7-30 16: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거리의화가 2022-07-30 16: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이고ㅠㅠ 서재 정리 참 생각만 해도 난감하고 마음이 쓰리기도 하고 그렇습니다ㅜㅜ 저도 절판본이나 구할 수 없는 책들은 결코 버릴 수 없을 것 같아요.

박균호 2022-07-30 16:55   좋아요 1 | URL
네 오래된 <병사 슈베이크>를 버리기 전에 혹시나 검색해봤더니 10만원이 넘는 걸 보고 다시 집어 넣었죠 ^^

살리에르 2022-07-30 16: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독서가가 아닌 ‘책수집가‘들은 다들 고민하는 내용이지요..^^ 그래서 얼만큼 덜어내셨나요?^^

2022-07-30 18: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yamoo 2022-07-30 17:2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남일 같디가 않습니다. 이사올 때 700권 정리했는데...다시 책을 버려야할 상화이 와서 우울합니다..^^;; 5년 전레 이사 올 때도 책 때문에 견덕이 150정도 나왔거든요~ 어떻게든 저렴하게 쇼부처봤지만 챡정리하는데 몇달을 소비했습니다...정말 이사..끔찍합니다;;

2022-07-30 18: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파이버 2022-07-30 19:0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한쪽 벽면에 꼭 맞는 책장이 멋있는데 비워내야한다니 슬프네요ㅜㅜ 책장에 빈공간이 많이 보이는걸 보니 정말 많이 정리하셨네요...

박균호 2022-07-30 20:42   좋아요 2 | URL
모든 장서가의 운명인가 봅니다. ㅠㅠ

stella.K 2022-07-30 19: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이 내용 얼마 전에 책에서 읽었어요.
남의 일 같지가 않아요.ㅠ
이사하면 당장 정리해야할 게 책이구나 싶더군요.
물론 아쉽긴 하지만 사람의 마음이 간사하여 비운만큼
어떤 책으로 채울까 행복한 상상을 하게되지 않나요?ㅋㅋ

박균호 2022-07-30 20:42   좋아요 2 | URL
아...그러셨군요 ㅎㅎㅎ 비움은 새로운 채움을 의미하니까요 ㅎ

서니데이 2022-07-30 21: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희집도 내부 수리 할 때 책이 많아서 힘들었어요.
책장에 있을 때는 잘 몰랐는데, 내려놓으면 정말 많아요.
저희는 이사를 가지 않고서 방을 옮겨가면서 했었는데, 그것도 일이 정말 많습니다.
리모델링 잘 끝내시고 서재도 좋은 공간으로 돌아오면 좋겠어요.
더운 주말입니다. 시원하고 좋은 밤 되세요.^^


박균호 2022-07-30 22:34   좋아요 2 | URL
방을 옮겨가면서라..ㅠㅠ 생각만 해도 힘드셨겠네요..ㅠㅠ
서니님도 건강하고 시원한 여름 되길 바래요.

서니데이 2022-07-31 16: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박균호님, 주말 잘 보내고 계신가요.
오늘까지 7월이고, 내일부터 8월입니다.
좋은 일들 가득한 시간 되세요.
좋은 주말 보내세요.^^

2022-08-01 16: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그레이스 2022-08-02 1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셔널 지오그래픽 제게는 처분 1호 대상인데... ^^ 남편은 펄쩍 뜁니다.ㅋ

박균호 2022-08-02 11:45   좋아요 1 | URL
저에게 1950년 ~1953년의 네셔널 지오그래픽이 있는데요. 아직도 윤이 나고 반짝입니다. 사진은 말할 것도 없고요.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