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는 여자는 위험하다 - 13세기에서 21세기까지 그림을 통해 읽는 독서의 역사
슈테판 볼만 지음, 조이한.김정근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6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독서와 그림과의 조합이다. 특별한 것이라면 독서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 다 여자라는 것이다. 여자가 독서를 하는 것이 특이한 일일때도 있었다. 글을 읽을 줄 아는 능력이 일부의 사람들에게만 있었던 시대를 지나 그것이 남성 뿐만 아니라 여성에게까지 확산되었을 때 이를 곱게 보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지나친 독서행위는 현실감각을 잃게 하고 특히 순수문학에 빠지는 것은 현실적 의무를 상실하고, 경제적 능력을 소홀하게 하게 한다는 것이 계몽주의적 도덕주의자들의 비난이었다고 한다. 시민계급이 등장하고 개인의 사적 공간이나 자아가 발달되었던 시기에 어떤 재미,쾌락을 개인적으로 소유한다는 의미에서 독서가 가지는 의의는 점점 커졌을 것이다.  

책을 읽고 있는 여자들.. 곁으로 누군가 다가가도 알아채지 못할 정도의 집중.. 무방비상태. 화가들이 책읽고 있는 여자들을 그린 것은 그런 매력에 빠졌기때문일 것 같다.  

책을 읽는 사람이 원하는 것은 어쩌면 세상과 소통하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오히려 책을 읽음으로써 자신의 주변에 보이지 않는 벽을 쌓고 세상의 번잡함에서 벗어난 자신만의 공간을 만들려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책을 통해 얻게 된 고독의 순간은 오래 지속될 수 없다. 고독하게 책을 읽는 사람을 빨아들일 정도로 강한 궤적을 남기면서 삶은 독자의 주위를 지나가고, 책으로 이루어진 보이지 않는 성벽은 삶의 흡인력을 막아낼 정도로 견고하지 못하기 대문이다. (p.188) 

 플로베르의 <마담 보바리>에서는 소설을 읽음으로써 생겨난 행운에 대한 강렬한 요구와 그것으로 생겨나기 시작한 사람들의 거부감 사이의 괴리를 극복하지 못하는 것이 본보기 처럼 묘사되어있다. (p.3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문학사상 세계문학 14
나쓰메 소세키 지음, 유유정 옮김 / 문학사상사 / 1997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쩐 일인지 몇번쯤 읽으려다가 포기했던 소설이었는데 이번에야 다 읽었다. 아, 그런데 이렇게 재밌는 소설이었다니..  요즘은 좀 뻔뻔하고 허무맹랑하고 어딘가 모자른것 같은 캐릭터들에 끌린다. 공공장소에서 읽었다가는 큭큭 거리는 웃음소리를 참지 못할지도 모르겠다. 다 아시다피시 이 소설은 고양이의 관점에서 인간의 모습을 풍자했다는 거창한 문구로 독자들의 접근을 조금 주저하게 만든다. 풍자,라고 하면 어딘가 좀 그렇지 않은가? ㅋㅋ 하지만 이런 문구는 저기 멀리 던져두고 그저 가볍게만 읽어도 충분히 재밌는 소설이다.  

소설에 나오는 인물들은 다 한량같다. 주인공 구샤미도 선생이긴 하지만 학교는 언제 가는지 집에서 데굴데굴하고만 있는 것 같다. 게다가 불쑥 불쑥 방문하는 간게쓰와 메이테이는 어떻고. 만나서는 쓰잘데기 없는 이야기만 늘어놓다가 헤어지곤 한다. 그런데 이런 장광설을 읽는 맛이 쏠쏠하다. 또 뒷쪽으로 갈수록 고양이의 독백이 줄어들어 아쉽지만 초반에 고양이의 행동을 묘사하는 에피소드들이 재밌다. 떡맛이 궁금해서 떡을 먹다가 춤을 추게 되는 사연 ㅠㅠ  

토란을 좀도둑에게 밤에 도난당하지를 않나, 간게쓰는 박사학위때문에 유리알을 계속 가는가 하면(학위는 결국 포기..), 구샤미가 안주인과 티격태격하는 장면도 재밌고, 간게쓰의 혼인과정도 터무니없지만 재밌다. 터무니없는 이들의 일상이 사실은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우리 인간의 일상이 아닐런지.. 그런데 고양이는 겨우 2년살았는데 물에 빠져 죽고 만다. 아, 결말은 너무 허무하구나. 나는 해피엔딩(?)이길 바랐는데 말이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토리얼리스트
스콧 슈만 지음, 박상미 옮김 / 윌북 / 2010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패션이란 자고로 무표정한 얼굴에 깡마른 몸을 가진 사람들만의 소유물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큰 오산이다! 이 책은 사진집이라고 하는 편이 더 맞을 것 같다. 한 페이지에 한사람씩 계속되는 사람들을 보고 있노라면 역자의 말처럼 컴퓨터화면에서 스크롤로 내릴 때 와는 달리 사진을 진지하게 보게 된다. 중간중간에 나오는 따뜻한 시선의 글 또한 좋다. 사람들이 무엇을 입고 있는가의 관점으로 사진을 찍기 시작했지만 나중엔 내가 왜 저 사람이 멋지다고 생각했을까,가 중요해졌다고 한다. 그건 이 사진들을 보는 독자들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또 공감가는 말중에 하나, 패션은 옷과 가방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표정, 동작, 자세 등 모든 것을 포함한다는 말.. 단순한 손짓이나 매력적인 고갯짓, 몸의 자세 등 (파리의 여자들을 본 적이 없어서... 안타깝.. ) 또 하나 발견한 중년남자의 매력. 노화가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하는 것이라면 젊게 보이려고 발악을 하는 것보단 그것을 어떤 식으로 소화해내고 받아들일줄 아느냐,가 중요한 것 같다. 한 장 한 장 넘기면서 즐거웠던 책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거꾸로 사는 재미
이오덕 지음 / 산처럼 / 2005년 2월
장바구니담기


진달래꽃은 그것을 보러 일부러 산에 올라가게 되는 일이 내게는 거의 없는 세월이지만, 그러나 찾아가지 않더라도 산길을 걷거나 버스를 타고 골짜기를 지나는 일이 없을 수 없어 올해에도 벌써 몇 번이나 그 찬탄하지 않고는 바라볼 수 없는 꽃구경을 한 셈이다. 건너편 언덕이나 산등을 온통 벌겋게 꽃이라기보다 온 산이 불로 타오른다고 해야 할 광경을 바라보고 있으면 가슴이 꽉 메어 눈물까지 나오는 수가 있다. -43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3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지음, 이영의 옮김 / 민음사 / 1998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지금 당신의 현실이 고통스러운가? 그렇다면 이 책을 읽어라. 수용소라는 추위,배고픔,노동으로만 이어지는 현실 속에서도 이반 데니소비치는 자신의 규칙으로 하루하루를 만들어간다.  

 이 책을 읽으면서 생각했다. 살아가는데 어쩌면 '희망'따위는 필요치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하루 세끼 밥을 먹고 몸을 뉘울 지붕이 있는 집이 있고, 할 일이 있다면 그 어떤 곳에서도 인간은 살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단순히 목숨을 연명하는 것뿐 아니라 그것도 아주 품위있게 살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는 오늘 어떤 작업환경에서 얼마만큼의 일을 하고, 얼마만큼의 음식을 먹을 수 있는가,를 생각하는 것 뿐이다. 또 수용소에서 말도 안되는 꼼수를 부려서 빵 한덩이를 더 얻거나 담배한가치를 얻을 수도 있다. 여분으로 생긴 빵은 침대 구석에 숨겨놓으면 된다. 자기만 아는 곳에 그만 쓸 수 있는 연장도 숨겨 놓았다. 소포가 많이 오는 사람이 부럽기도 하지만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따로 있으므로 개의치 않는다.  

 가장 눈물나는 장면은 여분으로 얻은 빵들을 언제 먹을까 고심하는 부분이었다. 빵 껍데기로 바닥에 남은 국의 찌꺼기까지 박박 핥아 먹는 장면은 어떻고. 모든 것은 그만이 세운 수용소에서의 규칙에 의해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런 면에 있어서 자유를 박탈당한 수용소라는 제한된 공간은 그의 의지에 비하면 별로 큰 제약은 아닌 듯 하다.  

   
  지금 슈호프는 사백 그램의 빵과 이백 그램의 빵을 차지한 것이다. 게다가 침대 시트에 이백 그램짜리 빵이 하나 더 있다. 더 이상, 뭘 더 바랄 것인가? 이백 그램은 지금 처치하기로 하자! 그리고 내일 아침에 배급받을 식사와 이백 그램짜리 빵을 더 먹기로 하자! 그리고 내일 작업하러 나갈 때, 사백 그램을 더 가지고 가기로 하자. 그야말로 풍성하다!(p. 184)    
   

 매순간에 집중하는 이반 데니소비치는 열악한 환경에서 작업을 하면서도 '집중'이 주는 희열을 느낄 줄 안다. 이것이야 말로 몰입의 순간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반은 벽돌을 쌓는 기술에 있어서는 다른 어떤 사람보다 노련하다. 반장도 그런 그의 실력을 인정해준다. 그렇다고 이반이 수용소에 들어오기 전에 벽돌쌓는 기술에 대해 배웠던 것도 아니다. 그냥 그런 기술이 필요했고 그런 필요에 의해서 기술을 익힌 것이다.   

   
  두 가지 일을 손으로 익힌 사람이라면 열 가지도 할 수 있는 법이다.(p.121)   
   

 일에의 몰입은 추위도 잊게 한다. 빨리 일을 하려고 서두르면 추위에도 불구하고 몸에서는 땀이 흐른다. 발가락이 시린것도 잊어버릴 정도다. 심지어 작업시간을 넘겨서 까지 하다가 된통 혼나기도 한다. 이것이 과연 수용소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란 말인가. 무엇엔가 집중하는 것만큼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것도 없다는 것을 새삼깨닫게 한다.  

 이반 데니소비치에게는 다른 사람의 특성을 잘 알고 배려하거나 적당히 무시하는 등 처세의 능력도 볼 수 있다. 가끔은 인간적이기까지 하다. 이 소설에는 다양한 특징을 가지는 사람들이 나오는데 수용소라는 제한된 공간이 아니더라도 만날 수 있을 법한 사람들이다. 알료쉬카에게 체자리에게서 얻은 비스킷을 나눠주는 장면은 코 끝이 찡하다. 비스킷 하나도 각박한 수용소에서는 사람사이의 온기를 확인하는 매개가 된다.  

   
 

-알료쉬카! 이거 받아!  비스킷을 그에게 한 개 내민다.
알료쉬카가 빙긋 웃는다.
-고마워요, 당신이 먹을 것도 부족할 텐데.........
-어서 들어!
 나 같은 놈이야 없으면, 또 뭘 해서든 벌이를 할 수 있으니까 상관없는 일이다. 그런 다음 슈호프는 소시지를 깨문다. 지근지근 씹어 먹는다. 향긋한 고기 냄새가 난다. 고깃물! 진짜 고깃물이 입안에 녹아든다. 아, 그리고 그것이 목구멍을 지나 뱃속으로 들어간다. (p.207)

 
   

  행복은 별다른 방법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옆 사람에게 나누어줄 비스킷이 있고, 나에게는 여분으로 먹을 소시지 하나가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행복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면에 있어서 우리는 이반 데니소비치의 사는 법을 배워야 하는 것은 아닐지 생각해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