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동북공정, 일본의 교과서 역사왜곡의 상황을 보자...한국사람이라면 누가 보더라도 이들이 옳지않다는 걸 안다.  

그럼 이런 역사내용을 배우는 중국사람들, 일본사람들은 이 것이 혹 잘못된 내용이 아닐까하고 한번이라도 생각할까? 


자 그럼, 이제 우리가 써온 우리역사서에 기록된 내용은 왜곡된 내용 하나 없이 모두 다 진실인가? 

멀리 갈것도 없이 가장 가까운 , 현재 우리가 쓰고 있고 있는 근대사, 현대사는 모두 옳게 쓰이고, 옳게 알고 있을까? 

아마도 진실도있고, 아예 거짓도 있을수있고, 왜곡도 되고 ...그러므로 수정해야할것들이 많을 수도 있을 것이다.   

흔하게 쓰여지고, 흔하게 읽혀지는   근현대사에 대한 기록물을 우리들은 과연 어떤 생각을 하며 읽고 있을까? 

치우치다 못해 편협하고 꽉 막힌...민족주의만을 강조한 책을 보며 내 생각도 편협하고, 꽉 막히게 되어버리는 건 아닐까? 

열린 민족주의, 품위있는 민족주의를 바라는 나는............  

좀더 정체성을 회복한, 우리사회와 민족을 바라보는 바깥의 시선을 의식하는 시민적 민족주의를 원하고 있는데...   

내가 대중을 위해 쓰인  역사서적들을 읽을때 가장 중요시 생각하는 건 ...  

치우치지 않고, 잘 균형이 잡혀있는가...?  

객관적 사실과 주관적기술의 두측면을 어떻게 서술했는가?

과연 작가가 무학자(無學者)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도록 글을 썼는가?  이다... 

사람들이 거쳐온 시간들의 이야기를  알고자하고 ,이해하고자 하는 건 꼭 어떤 선택된 부류에게만 주어진것이 아닐꺼라
생각하니까.....  나같은 사람, 너같은 사람이  모두 함께 읽고, 이해할수 있게 쓰여졌다면,,,,,, 

과거 사실을 보는 역사가의 관점에 따라 내 시선이 달라질수 있기때문에  편협한 시선말고,,
열린 시선으로 내용을  서술해주었다면................더 바랄게 없을듯........................       

김기협의 <해방일기> 제1권, 해방은 도둑처럼 왔던 것인가(1945. 8.1 ~ 10.29) 가 출간되었다. 

저자의 어마어마한 집필 계획에 눈이 가요 눈이 가~ 해방일기에 눈이가요.. 너머북스의 해방일기 1권. 

1945년 8월1일 해방전야부터 1948년 8월 31일(3년)까지 10권을 집필 목표로 한다고 한다.    

 ‘해방공간’이라고 불리는 3년 동안 이 땅에서는 과연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해방을 맞이하긴 했지만......좌우익 대립이 극심했던 시기...해방된 대한민국엔 좌익,우익만 존재했을까? 

해방이 되고 이젠 자주적으로  민족독립국가가 수립될 것이라고 믿고 기대하던 일은 그러지 못하게 된 일로 되버렸다.  
민족 반민족,,좌익 우익의 구도로 이념논쟁이 불이 붙었다,,,일제강점기때 나라를 위해 어떻게 했는데...그 이념때문에.......... 

이념이 다르면 싸워서 어느 이념이 꼭 옳다고 못을 박아야 되는게 인간사인가? 그게 옳은일인가? 옳지않은일인가?  

해방공간기 3년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머리가 아프다... 

이럴땐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읽어보자..그리고나서 묻고, 따지고 생각해도 된다..


 

『해방일기』 제1권 해방은 도둑처럼 왔던 것인가 를 한번 보자.

8월 15일 일본 천황의 항복 선언 후 소련군과 미군의 점령까지는 몇 주일의 간격이 있었고, 전국이 실효적 점령 상태에 들어가는 데는 더 긴 시간이 걸렸다. 이 ‘권력의 공백’ 기간에 해방 조선의 정치적 요소들이 모습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민의가 집중된 두 개의 초점이 민족혁명과 사회혁명이었다. 민족혁명을 앞세운 쪽이 우익이고 사회혁명을 중시한 쪽이 좌익이었다. 두 진영이 혁명의 속도와 범위를 타협할 수 있다고 보는 중도파가 민의를 폭넓게 대표하면서 건국준비위원회로 나타났다.

9월로 접어들며 극좌와 극우가 나타났다. 일체의 사회혁명을 거부하는 극우파가 한민당을 거점으로 만들었고, 급속하고 철저한 사회혁명을 주장하는 극좌파가 건국준비위원회를 장악하고 인민공화국을 출범시켰다. 극좌와 극우는 서로 상대방의 배제를 주장하는 대립관계로 나타났지만, 실제로는 상대방의 존재를 내 주장의 근거로 삼는 ‘적대적 공생관계’를 맺고 중도파의 입지를 함께 공략했다.

10월까지 미-소 군대의 실효적 점령이 완성됨에 따라 점령군의 존재가 정치 상황에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다. 국제관계에서 방어적 입장에 처해 있던 소련 쪽보다 국제정책의 급격한 변화를 앞두고 있던 미국 쪽 입장이 더 큰 작용을 일으켰다. 이북의 소련군이 조선인의 자치활동 성장을 도와주며 소극적 입장을 지킨 반면 이남의 미군은 일본인의 지배자 위치를 물려받아 자치활동을 적극 억압했다. 극우파가 미군의 옹호 아래 세력을 키우고 그 반동으로 극좌파가 좌익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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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에게는 아직도 열두 척의 배가 남아있습니다. 신이 살아있는 한 왜적이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 죽고자 하면 반드시 살고, 살고자하면 죽을 것이다" 

 " 가벼이 움직이지 말라, 침착하게 태산같이 무거이 행동하라" 

" 석자되는 칼로 하늘에 맹세하니 산과 물이 떨고, 한번 휘둘러 쓸어 버리니 피가 강산에 물들인다"   

 

2004년 9월 4일~2005년 8월 28일까지 104부작으로 방송된 "불멸의 이순신"    

2005년 역사교과서 왜곡과 독도 문제 등으로 반일감정에 머리가 지끈거릴때 정말 화끈하게 스트레스 풀어주셨던 드라마!! 

이 드라마 이후로 속시원한 드라마를 본적이 없으니 난 감히 최고의 드라마라 이야기 할란다.. 

김명민이라는 배우의 진가를 알게된 드라마라 더 귀한듯.... 김명민 짱~

사실 이 드라마에서 영웅 이순신의 휘하의 수많은 인재들의 모습을 보여줘서 너무 만족스러웠다. 
책사 권준, 과학자 나대용과 그를 보좌했던 거북선과 무기를 주조한 이름모를 민초들.. 임전시 목숨을 아끼지 않고 싸웠던 정운을 포함한 많은 부하장수들.....그들이 존재했기에 진정한 지도자로서 이순신이 더 빛나는것 아니겠는가.....

정말 울면서 열심히 봤었다. 방송될때마다 가슴을 울리는 장군의 말씀에 전율했다. 
  
" 이들을 모두..내가 죽였다.....그러나 나는 구차한 목숨을 당분간은 더 이으려 한다. 부하들의 목숨을 헛되이 하지 않기위해서다.

" 우리에게 아무도 목숨을 바치라 강요하지 않았다. 이곳을 지킬것을 결의 한 것은 바로 우리들 자신이다. 지금도 늦지 않았다. 두려움을 느끼는자, 싸울의지가 없는자, 이곳 녹둔도를 떠나라.  

" 전쟁은 병장기만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병력만으로 하는 것은 더욱 아니다. 승리의 가장 큰 관건은 이길수 있다는 확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굳은 결기에 있으니...오직 마음으로 싸우는자, 그 자만이 최후의 승자가 될것이다"

" 명심하라, 살고자 두려움에 곁을 주는자, 죽을 것이요, 승리를 위해 기꺼이 죽고자 하는 자, 살것이다."  

" 전쟁에 임하는 자의 마음이 승리의 시작이요 끝이니 군사들의 사기 진작을 위해 최선을 다하라." 

" 나는 부하들을 믿는다. 조선수군은 그게 누구든 더럽게 목숨을 구걸하지 않는다" 

야비한 침략자의 의지를 끊어버리고, 조선을 지킨 임진왜란...그 전쟁을 패배한 전쟁이라고 누가 감히 말할것인가? 

세 번의 파직과 두번의 백의종군에도 불구하고 불굴의 의지로 나라를 지킨 충무공 이순신... 
나라가 그를 위해 무엇을 주었다고..임금과 그의 정적들의 견제를 항상 받으면서도 .. 임금부터가 중심을 잃고 우왕좌왕하고 있을때 애국심과 신념으로 나라를 구한 이순신... 
학연,지연,혈연등의 잇속관계가 아닌 원리원칙에 따른 일처리, 뛰어난 전략전술, 구습을 버리고 철저한 준비와 의지로 부하들에게 흔들림 없는 절대적 신뢰를 주며,  엄한 원칙으로 부하를 이끌었던 진정한 지도자 이순신... 
위기속에서 희망을 찾고, 그것을 기회로 삼아 7년 전쟁을 승리로 이끈 이순신....  

이번주 역사스페셜은 충무공 탄신 기념일 기획 <철저분석 한산대첩>이었다.   

1592년 7월 8일 거제와 통영사이의 좁고,암초가 많은 부적합한 장소 견내량(일본수군이 정박해있었다)에서 이순신 장군은 <넓은 바다로 적을 이끌어낸후 왜적을 모두 잡아버린다, 인출전포지계·引出全捕之計>는 목표와 계획을 세우고 판옥선 6척의 유인함선을 출동시켜 적의 선봉을 쫓아가서 급습하고 이에 왜군이 일시에 쫓아나오자 거짓후퇴하며 적을 유인하였다. 
 

조선수군은 예정대로 한산도 앞바다까지 유인 후 신호에 따라 모든 배가 북을 울리며 뱃길을 돌리고, 호각을 불면서  학의 날개처럼 포위하는 학익진(鶴翼陣) 전법을 펼치며 진군하였다.
지자총통, 현자총통,승자총통을 한꺼번에 쏘아 적선을 격파 .. 왜군은 조선수군의 포격에 순식간에 격파되어 무너졌다. 왜선 59척을 침몰시키고, 이로인해 왜군 9천여명이 전사했으며 한산도로 도망친 400여 명은 군량이 없이 13일간을 굶주리다가 겨우 탈출하였다. 거의 전멸이었다. 


한산대첩은 한산도 앞바다에서 1592년(선조25) 7월 8일 임진왜란 초기 수세에 몰렸던 전세를 조선수군이 확~ 뒤집어 버린 전투로 진주대첩, 행주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대 대첩으로 불린다. 

ㅎㅎ 임진왜란 발발 후 , 불과 20일 만에 한성이 함락되면서 역사상 최대의 위기를 맞았던 조선에게 한산대첩은
대륙침략을 향한 일본의 망할 야욕과 오만을 꺽어버린 화끈한 일대 반격이었다.

역사스페셜에서는 이순신의 승리보고서인 <견내량파왜병장>을 중심으로 한산대첩의 전투과정과 승리요인을 분석하고,추적한다.     

도대체 학익진은 어떤 전술인가?    

또 우리 수군의 화포는 재장전하는데 시간이 적지않게 걸렸다. 그런데 어떻게 재빠르게 포를 쏟아 부을수 있었을까?

학이 날개를 펼친 듯한 진형을 확인할 수 있는 ‘우수영 전진도첩(右水營戰陳圖帖·)’. 학익진은 U자형의 진법으로 적보다 우세한 전력으로 적을 포위해 싸우기에 적합했다. 그런데 해상에서 배가 적선을 향해 이동할 때 측면의 포를 활용할 수 없기 때문에 화력 집중에 어려움이 있다. 조선 함포의 단점을 극복할 수 있었던 비결은 판옥선(板屋船·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전투선. 1층에 노꾼을, 2층에 전투원을 배치했다)이었다.

제작진은 "바닥이 평평했던 우리 수군의 '판옥선'이 한산대첩 승리의 비결이었다"고 말한다. 우리의 전선은 왜군의 병선과 달리 바닥이 평평한 평저선으로 탁월한 선회 능력을 가진 판옥선이었다.  조선 수군은 판옥선의 탁월한 선회 능력으로 화력 공백기인 재장전 시간 동안 공격력을 잃지 않았다는 말이다.판옥선의 선회를 통해 연속적인 포격을 했던 조선 수군의 공격에 조총이 주무기였던 왜군의 반격이란 쉽지 않았다.   

  
  

 

 

 

 

 

 

  

  

진형을 확인할수 있는 우수영전진도첩

 

 

 

 

 

 

 

 

 

 

 

 

 

  

 

 

  

조선 수군의 승전비결은 ' 연속 포사격'

 

 

 

 

  

판옥선의 탁월한 선회능력으로 화력 공백기인 재장전 시간동안 공격력을 잃지 않았다.

 

 

 

  

동아시아 해군의 저력을 보여준 이순신 ' 한국의 살라미스 해전'이라는 평가를 받는 한산대첩.

 

   

이순신을 ‘동방의 넬슨’이라 평다람  영국 해군 제독 발라드의 책

 

  

  

  

 
충무공 이순신(1545∼1598) , 충무공은 무과에 급제하여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를 지내던 때 왜적의 침입이 있을 것에 대비하여, 여수를 중심으로 배를 만들고 군비를 늘리는 등 일본의 침략에 대처하였다. 선조 25년(1592)에 임진왜란이 터지자 옥포대첩, 거북선이 최초로 모습을 드러낸 노량해전, 당항포해전, 한산대첩 등 곳곳에서 전승을 거두었고, 정유재란 때에는 명량대첩 등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그가 죽은 후 1604년 선무공신 1등에 올랐고,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충무(忠武)’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선조 25년(1592) 이곳에 제승당을 짓고, 26년(1593)부터 30년(1597)까지, 해군의 중심 진영으로 삼아 해상세력을 장악하고 나라의 어려움을 이겨나갔다. 그러나 선조 30년(1597)에 제승당을 포함한 이곳 군영이 모두 불에 타서 폐허가 되었다.
그 후 영조 15년(1739)에 제승당과 함께 ‘제승당유허비’를 세운 후 여러 차례 공사가 이루어졌고, 일제시대 때 지방 유지들에 의해 다시 세워지게 되었다.
원래 제승당은 임진왜란 중 충무공이 부하들과 함께 작전계획을 세우고 일을 보던 ‘운주당’이란 건물 자리에 영조 때 집을 짓고 ‘제승당’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다.
경내에는 제승당을 비롯하여 충무공의 영정을 모신 ‘충무사’와 ‘한산정’, ‘수루’ 등이 있으며, 산봉우리에는 한산대첩비와 함께 거북등대가 있다.

 

한산도 이충무공 유적(제승당) 

 

좌수영대첩비 

 

명랑대첩비 

 

** 함께 보면 좋을 책 

 

 

 

  

 

 

 

  

 

 

 

 

 

 

 

  

 

 

 

충무공 이순신의 현충사, 충무공이순신 기념관을 보자..



충무공탄신일인 2011년 4월28일 오늘 현충사 경역밖에 충무공이순신기념관이 문을 열었다. 기념관은 충무공 관련유물과 임진왜란 당시 해전사료를 수집,전시,교육을 위한 역사테마관이다.  전시동 3개실에서는 난중일기 와 충무공의 칼 등 유물 40여점, 교지등 고문서 13점을 전시한다. 문화재청이 기념관에서 충무공을 주제로 특별전을 정기적으로 개최한다니 기대해 보자.   

충무공 이순신 장군은 1545년 , 서울 건천동에서 아버지 이정과 어머니 변씨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충무공은 어린시절 가족과 함께 외가가 있는 충남 아산 백암리로 이주하여 성장하고 혼인하고 무과에 급제할때 까지 살았다..  

충남 아산은 내 고향에서 가까운 곳으로 중,고등학교때 현충사로 소풍을 참으로 많이도 갔다.   

잠시 현충사를 소개하면.................

아산 이충무공 유허(현충사)는  충무공 이순신의 영정을 모신 사당으로 1598년 노량해전에서 순국한지 108년이 지난1706년(슥종32년) 아산지방유생들의 사당건립건의로 세워졌으며, 그 이듬해인 1707년 숙종에게 '顯忠祠'라 사액받았다. 그 뒤 이곳은 200년간 향불이 끊기지 않게 추모하였으나 그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사당철폐되고, 국권피탈이후엔 일제탄압을 받았다. 1932년 동아일보사의 주최로 전국민의 성금을 모아 현충사를 중건하고 영정을 봉안했으며, 광복후에  매년 4월28일(양력)에는 충무공 탄신제전을 올렸다.  1966년부터 1974년까지 본전(충무공의 영정을 모신곳) , 유물전시관(거북선모형, 난중일기,서간첩,교지,각종무기보존), 고택,활터,정문등을 중건하며 현충사 경내확장및 종합적 조경공사를 하며 성역화되었고. 1968년에 현충사관리사무소를 설치하고 관리와 제전에 관련된 사항을 관장시켰다.    
    

현충사와 현충사 유물전시관의 유물

 현충사

 

 난중일기,서간첩

무과홍패 

선무공신교서 

 

 장검  

충무공 묘역 

 

광화문네거리의 동상과 현충사에 모셔신 그냥 이순신 말고 , 온몸으로 난세를 극복해간 인간 이순신을 보자. 

충무공의 국난극복의 정신을 충무공의 후예로서 가슴깊이 되새기며 , 불굴의 의지, 사명감의 표상인 충무공의 삶을 기억하며  더이상 북의 도발에 억울한 희생이 없기를 ..  


나라를 위해 희생한 고인들을 영원히 잊지 않고 기억하겠습니다. 
미안합니다. 반성합니다. 오늘도 순국장병들을 애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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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김진명'하면 제일 먼저 생각나는 소설은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그때 기억으로 정말 이 소설의 인기는 대단했다. 이 소설을 안 읽고는 이야기가 잘 안될정도로 인기가 많아었던걸로 기억한다.

극단적인 민족주의, 과도하고 거친 상상력의 작가라는 꼬리표가 붙어있다는 작가..  김진명

난 흥미롭다. 그의 소설들이 기존 통념을 뒤집는 역사해석과 인물에 대한 평가가 과감하고 밀어부치는 내용의 박진감있는 속도감에 난 만족한다. 대한민국의 역사소설계에 큰인물임은 확실한듯하다.

사실 <천년의 금서>를 읽고 약간은 아주 약간은 혼란스러워서 한동안 잊고 살았었는데 이번에 역사상 가장 강력했던 고구려의 이야기를 현실과 픽션을 넘다들며 풀어냈다는 <고구려1,2,3권>이 출간되었다.  

그 의 글 답게 고구려를 읽어본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내용이 속도감있고 ,긴장감넘치며, 치밀하고, 장면들이 역동적이며 주인공이 한 개성한다는 이야기를 한다. 

이번 그의 역사해석은 어떠할지 궁금하다. 현재의 정세에 맞추어 '고구려 역사 바로알기'에 제대로 공헌을 하는지 한번 읽어보자.   

고구려는 우리의 역사로 우리 것이지만 그 역사의 흔적이 남아있는 곳은 지금의 중국영토이기 때문에 중국의 시건방진 동북공정의 황당한 주장을 웃기지도 않게 바라보고 있는 상황이 아닌가....나중에 영토문제로 충돌할수있는 중요한 문제이다. 

 
무려 17년부터 기획했으며 데뷔부터 숙원해오던 필생의 역작이기도 하다는 <고구려>  

그가 이토록 치열하도록 역사에 대한 이야기를 소설로 풀어내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번 소설은 고구려 700년 역사에서 가장 극적인 순간 즉 고구려의 최대위기와 최고의 영광이 함께하던 시대로 알려진 미천왕때부터 고국원왕,소수림왕,고국양왕,광개토대왕,장수왕 등 여섯 왕의 이야기를 말한다. 

2~3년 걸쳐 전체 13권 분량을 완간할 예정이라고 하니 기대해보자.. 개천절을 택해 '고구려'를 쓰기 시작했다는 작가는 "호흡이 굉장히 짧은 글만 써오다 처음으로 이런 대작을 쓰게 돼 생소하기도 하지만 끝까지 초심을 잃지 않고 진지하게 임해 세상에 대한 약속을 지키겠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삼국시대 고대국가 중의 하나인 고구려.. 고구려라는 나라 이름은 城을 뜻하는 고구려어의 '구려' 에 高라는 한자어의 미칭을 덧붙인것이라고 책에서 읽었던것같다.  시조는 동명왕(주몽)이고 그후 27대의 왕위를 이었다.

700년 고구려 역사는 크게 고구려성립에서부터 3세기말 미천왕의 큰아버지 봉상왕까지를 첫 시기로, 4세기초 미천왕때부터 6세기초 문자왕대까지를 두번째시기로, 6세기 중엽 안장왕이후 보장왕 27년 멸망때까지를 세번째시기로 본다.. 

첫시기를 국가성립및발전기,  두번째 시기를 고구려발전의 전성기로, 세번째시기를 쇠퇴기로 본다. 

 

이 번 출간된 고구려 1,2,3권은 고구려의 전성기의 기틀을 마련한 4세기 고구려 15대 왕 미천왕(美川王,재위300~331)의 일대기를 담았다.

왕이 되기 전 소금장수였다는 미천왕 을불...어쩌다 서천왕의 손자가  소금장수가 되었는지..소금장수가 어떻게 왕이 될수있었을까?  고구려 초기는 5부족의 힘에 의해 나라가 움직였다. 그 힘겨루기속에서 살아남기위해서 궁궐을 도망쳤던 을불.... 

큰아버지 봉상왕이 아버지를 죽일당시 다행히 화를 면했지만 궁을 나와 처음 의탁했던 곳에서 하는 노예생활이 괴로워 그 집을 나와 한 일이 소금장수였다. 그마저도 도둑으로 몰려 못하게 되자 거지처럼 살았다는 을불....그후 큰아버지 봉상왕의 폭정에 지친 대신(국상 창조리)들이 왕을 몰아내고 왕의 조카인 을불을 왕위에 올림으로 을불은 고구려 15대 미천왕이 되었다.  

미천왕은 왕위에 오른 후 가장 열심히 한일이 진나라를 상대로 영토를 넓히는 일이었다고 한다. 진나라의 낙랑군을 멸망시키고,대방군을 정벌하여 영토로 삼는다. 그덕분에 새로운 농경지를 차지하므로써 경제적으로도 큰 발전을 이루었다. 고구려 더 넗은 영토확장의 계획과정에서 요서지역에서 성장한 모용선비(북아시아의 유목민족인 선비의 일파, 모용부)의 방해로 요하를 건너 서방으로 나아갈수 있는 기회를 놓쳤다. 그 후 여러차례 요동지역을 차지한 모용부를 공격했으나 실패했다. 그렇지만 그는 강한 고구려를 만든 사람이며, 농업,상업을 발전시키고, 영토를 넓혀 고구려의 성장기틀을 마련한 고구려의 왕임에는 틀림없다.  

 

미천왕 을불이 아마 소금장수로 살아봤기 때문에 백성들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그들의 나은 삶을 위해 노력하지 않았을까?   

** 고구려를 알고싶다면 함께보자 

 

 

 

 

 

 

 

 

 

 

 

 

** 고구려 왕위 계보를 보자. 

1. 동명왕 <B.C.37~B.C. 19>

2. 유리왕 <B.C.19~18>

3. 대무신왕 <18~44>

4. 민중왕 

5. 모본왕 

6. 태조왕 

7. 차대왕 

8. 신대왕 

9. 고국천왕 

10 산상왕 

11. 동천왕 

12. 중천왕 

13. 서천왕 

14. 봉상왕 

15. 미천왕 <300~331>

16. 고국원왕 <331~371>

17. 소수림왕 <371~384>

18. 고국양왕  <384~391>

19. 광개토왕 <391~413>

20. 장수왕 <413~491>

21. 문자왕 

22. 안장왕 

23. 안원왕 

24. 양원왕 

25. 평원왕 

26. 영양왕 

27. 영류왕 

28. 보장왕 <642~668> 

  

** 고구려 석비를 보자.   

충주 고구려비 (국보 제205호) 
국내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고구려 석비로, 장수왕이 남한강 유역의 여러 성을 공략하여 개척한 후 세운 기념비로 추정된다. 1979년 입석마을 입구에서 발견되었는데, 오랜 세월이 흐른 탓에 발경 당시 비면이 심하게 마모되어 있었다. 고구려 영토의 경계를 표지하는 비로, 백제의 수도인 한성을 함락하고 한반도의 중부지역까지 장악하여 그 영토가 충주지역까지 확장되었음을 말해준다. 역사적으로 고구려와 신라,백제 3국의 관계를 밝혀주는 귀중한 자료로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유일한 고구려비로 역사적 가치를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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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옥시리즈가 완결되었나봐~~ 6권세트까지 출간된걸보니... 

그동안 참 감탄 또 감탄을 연발하게 했던 한옥시리즈..... 

혀를 낼름 빼기도 하고, 입을 쩌억 벌리게 하기도 했던  정말 쓸만한 시리즈로..고맙다.또 고맙다.......또또 고맙다!!

표지의 '한옥' 글씨만 봐도 한옥의 담백하고, 단아한 우아함이 잘 느껴지게 만든 책이다. 

 글씨체가 정말 유려하다..정말 미끈하다..ㅋㅋ 스스로에게 묻는다.."그렇게 좋냐?"

한옥을 흔히 가장 친자연적인 건축이라고 말한다. 당당히 말할수 있다..위대한 문화유산이라고..동시에 이시대에도 진화하며 발전하고 있는 한옥이 얼마나 실용적이며 아름다운지를....  전통과 현대건축이 접목된다면 울트라 최강파워의 한옥이 나오지 않겠는가....>>

 그럼 한옥하면 제일 먼저 흔히 떠오르는 걸 이야기해보자.  

단아하고, 공간 비움의 미학이있는 담백한 멋이 있는 곳, 원래 생긴 그대로 자연적인걸 추구하기때문에 고유의 형상을 존중했던 곳, 소박하다 못해 어떤 부분은 투박함도 느껴지는.....넉넉해 보이면서도 오밀조밀도 하고, 넓은마당과 댓돌, 대문을 통해 한번 들어가면 후진없이 계속 둥글둥글 돌아다니며 볼수있는 구조, 기가 통하는 듯한 문과 창문의 조화,등등...

온돌, 마루, 나무, 한지, 기와, 흙, 돌, 황토............. 

이렇듯 한옥을 지을때는 자연물을 많이 이용했다. 구들로 사용된 돌,   바닥, 벽, 지붕 기와밑에 흙(기와밑에 바르는 흙때문에 여름은 시원하게 겨울은 따뜻하게),  벽,문에 바르는 한지(추위도 막고,햇빛도 적절하게 차단해주고,스스로 환기도 하고,습도도 조절한다. 이것만 봐도 정말 쾌적하고, 깨끗해서 환경호르몬 걱정없는 한옥일수밖에 없다..근데 진짜 이렇게 한옥을 지으려면 정말 건축견적이 어마어마 하겠구나...  불편해서 싫다던 한옥을 지금은 살고싶어 안달나도록 세상이 변했으니.. 

 

       

 

 

 

 

 

 

 

  

 

 

 

 

 

 

 

 

 

 

 

 

 

이제까지 3권인 한옥 설계집까지 페이퍼를 썼으니 4,5,6권을 쓰고 넘어가야겠다..  

4,5,6권의 책을 아직 구입하지 못했으니 내 생각은 전혀 없고 오직 출판사 책 소개만 가져다 붙였다.. 

너무 성의없고, 두번은 안볼것 같은 페이퍼 이지만 4,5,6권 구입후 다시 쓸날을 고대하며..... 

 

4번째 인 '우리집이 한옥이면 좋겠다' 이 책은 저자의 한옥생활의 다양한 경험과 지식, 깊은 관심으로 출간되었다.  

한옥의 기초적인 지식부터 집터를 잡고 완성하여 주변을 가꾸기까지, 전 과정을 단계별로 구성하여 글을 읽어가는 동안 자연스럽게 한옥을 이해하도록 하였다. 저자가 직접 그려 넣은 200여 개의 캐릭터와, 1,000여 컷의 사진으로 한옥에 더욱 가깝고 친숙하게 다가가도록 하였다

서양문물이나 현대문물의 홍수 속에 자칫 우리의 소중한 문화를 잊고 소홀히 하기 쉬운 현실이다. 미래의 꿈나무, 자라나는 우리 아이들과 청소년들에게 우리 전통문화에 대한 소중함을 알려주고 흥미를 돋우어 줌으로써, 자연스럽게 우리문화를 받아들이고 익히도록 하였다.
저자와 두 아이를 캐릭터화해 등장시켜 자칫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한옥에 대한 설명을 정겨우면서도 흥미로운 대화로 전개시켜 한옥에 더욱 가깝고 친숙하게 다가가도록 하였다. 한옥의 기초적인 지식부터 집터를 잡고 완성하여 주변을 가꾸기까지, 전 과정을 단계별로 구성하여 글을 읽어가는 동안 자연스럽게 한옥을 이해하도록 하였다. 저자가 직접 그려 넣은 200여 개의 캐릭터와, 1,000여 컷의 사진을 살펴보는 것 또한 한옥이야기에 더해 그 흥미를 배가시켜 줄 것이다.
우리의 아름다운 문화를 되살리자는 현재의 움직임에 동참하고, 한옥에 관심을 갖고 있는 독자라면 누구나 쉽게 접근하여 읽어볼만한 책이다. 아이들뿐만 아니라 어른들까지도 한옥에 대한 전반적인 지식을 두루두루 습득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5번재 인 '신한옥'은 현대생활에 맞게 진화하는 한옥의 모습을 소개한 책이다. 

한옥이 진화하고 있다. 시대적인 다양함과 역동성을 가지고 빠르게 적응하고 있다. 자연의 섭리에 순응하면서 재생 가능한 친환경적인 이로운 한옥이 이제는 목수들만의 기술전수로 이루어지던 수공업 형태로부터 벗어나고 있다. 한옥을 현대생활과 접목시키고, 표준화, 기계화를 통해 산업화 시키고, 대중화 시키는 것은 의미있는 일이다. 다른 공법과 비교하여 비싸다고만 여기는 건축비의 경쟁력 확보를 위한 노력도 함께 뒤따라야 한다.

이 책은 현대적인 설계기법으로 건축주, 설계자, 시공자간 명확한 의사전달의 토대가 필요하다고 보고, 지금 진화의 바람 한 가운데로 들어선 한옥은 새로운 지평을 열어 가고 있는 신한옥의 모습을 소개한 책이다. 먼저 그 중심과제로 한옥을 설계하고, 짓고, 현대적인 건축요소로 재구성하는데 있어 의사전달의 중심에 설 수 있는 내용으로 책을 구성했다. 가장 한국적이면서도 세계적이며 보편성을 가미한 새로운 한옥의 모습을 소개한다.  

 

6번째 인 ' 한옥의 열린공간'은 상업공간, 식당공간, 주거공간, 문화공간 등 다양한 공간에서 한옥이나 한옥의 천연재료를 이용한 실내장식을 접목하기 위한 변화의 움직임이 발 빠르게 진행되고 있어 많은 곳에서 창조적인 새로운 모습의 개량한옥과 실내장식을 엿볼 수 있다. 수백 년 된 전통한옥의 내부를 현대식으로 개량하여 숙박시설로 활용하는가 하면 전통한옥의 한식기와에 기둥과 보 방식은 유지하되, 현대의 기능성과 편리성을 살린 개량한옥도 지어지고 있다.

이렇게 전통적인 모습은 유지하면서도 건축주의 목적과 용도에 맞춰 획기적인 새로운 감각의 실용성 있는 한옥을 짓는 곳을 소개한 책이다. 주거공간이나 상업공간과 식당공간 또는 문화공간을 나름의 목적에 맞게 설계하여 실내를 한옥 풍으로 꾸민 사례도 접할 수 있다. 특성에 맞춰 지은 한옥이 가진 한 부분이 극대화된 아름다움을 보여주기도 하고, 한옥의 변화가 현대적인 건축기법과 만나 새로운 날개를 달게 되는 성공적인 사례가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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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잘라 2011-04-28 14: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흣.. 한옥 좋아요. 한옥은 한 채만 있으면 맛이 덜하고 마을 단위 전체가 한옥이어야 담과 담, 길과 길, 마당과 마당이 어울려야 제대로 한옥이 의미가 있다고 하니 '독불장군 없는 한옥'이 더 좋아지구요. ^ ^

한옥시리즈, 보관함으로 담아갑니다.

블루데이지 2011-04-28 20:00   좋아요 0 | URL
ㅎㅎ 더불어 사는 삶을 가르쳐 주는 한옥이라는 말을 페이퍼에 추가해야겠네요...'독불장군 없는 한옥이라는 말씀 너무 맘에 들어요.. 정말 멋진 한옥시리즈예요.보기만 해도 흐믓합니다.
 

모처럼 신랑, 아이들 다 떼버리고 혼자 서점에 갔다... 비 오는 이른 오전이라서 그런지 사람도 별로 없다. 

여기저기 탐나던 책들을 요리조리 살펴보고, 요모조모 내용도 뜯어보며 맘껏 만져(?)주고 왔다..   

오프라인 서점  월 5회 방문으로 평균 2~3권 구입해서 안고 오는 나인데  이번달은 처음 방문이다.  

유난히 반짝반짝 빛을 내며 나 좀 데려가 주세요~~주인님!! 하는 책들을 2권들고  서점카운터로 가서는

" 내가 정말 싫어하는 날짜 스탬프 절대 찍어주지마세요"라는 말과 함께..계산을 마친 후 집에 오면서 난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보고싶은 책을 한아름 안고, 서점 counter로 가서 예쁜 직원언니의 "어머 책 많이 읽으시나봐요? 존경스러워요!!"라는 말을 들으며  책계산하는 그 맛을 난 죽도록 즐기지만.......하아~~휴!! 사는게 뭔지......  

얼마전까지만 해도 제법 유명한 이 지역의 오프라인 서점중 하나가   도산해서 픽픽 쓰러져 버린 일이 있었다. 
오랜 친구같은 그 서점이 갑자기 사라져 버렸을때의 그 허무함이란.... 그러나 내색하기는 민망한..그런... 오래된 친구같은 그 서점이 없어지도록 한몫한 인간이 나라는 생각을 한동안 떨치기 힘들었다.......

사실 할말은 결코 아니지만 오프라인 서점에서 책을 구입해도 적립은  해주지만   ................
당장 눈에 보이는 할인율이나  또는 집까지 들고 올 무게를 걱정하며 한달에 2~3번에 걸쳐 한꺼번에 책을  구입하는 습관을 지닌 탓으로  주로 난 인터넷 서점 ~~ 을 이용한다.
가끔 배송되어 오는 책들이 박스안에서  이리저리 굴러 책모서리가 눌리고, 예쁜 책띠가 맞추어 붙일수도 없게 다 찢어지고, 새까맣게 때가 묻은 책이 가끔 올때는...이런 된장! 쌈장 ,고추장 찾으며 정말 실망스러워하면서도...적립금+마일리지+이벤트등의 온라인 서점의 정책에는 감사하는 이중적 마음을 지니고 있으니까....할말없다@@    

동네서점에서 책을 사면 알라딘한테 미안하고, 알라딘에서 책사면 동네서점한테 미안하고,,,이런생각을 하는
난 역시 제정신이 아니거나, 아님 오지랖이 넓은 거거나, 아니면 착한아이콤플렉스가 있는 인간이거나 한거다...  
하다하다 이제 별~~걸 다....다 접고...어제 산 책    

 

  

 

 

 

 

 

이옥의 글에서 따온 '멋지기 때문에 놀러왔지' 의 제목이 정말 멋지기 때문에 책을읽어야지라는 말을 하게끔한다.   

"멋지기 때문에 놀러 왔지. 멋지지 않았다면 와 보지도 않았을게야."

청소년용으로 분류된 책이지만 어른들이 읽기에도 충분히 손색이 없다. 아이들은 문고본, 어른들은 양장본으로 선택하면 

딱 일듯싶다..서점에 깔아놓은 걸 보니 문고본은 청소년문학으로, 양장본은 문학분야의 매대에서 볼수있었다..  

아래의 이옥전집 3권을 읽으면 이옥이라는 사람이 왜 정조의 문체반정의 주 타켓이 되었는지를 알게된다.   

18세기 소품문학이 이런 맛이구나..왜 정조가 유독 이옥에게만 그렇게 가혹했는지를....느낄수 있다.  

18세기는 조선의 르네상스시대로 개성이 풍부한 작가들이 정말 많았다. 그중 이옥과 김려는 유난히 독특하고 파격적이다. 

 

이옥(1760~1815)은 개인 문집도 없는 데다 묘지나 행장을 발견할 수 없어 그 생애는 매우 불분명하다 
이  전집은 성균관 시절부터 절친했던 벗 김려가 나중에 그의 글을 수습해 ‘담정총서’로 한데 모은 것이 주요한 근거가 됐다.이밖에도 여러 문집에 분산되어 있던 그의 글을 모아 한글로 옮긴 '완역 이옥 전집'(전 5권·휴머니스트)은 실로 이옥 사후 200년 만의 일이다. 
오랫동안 한문 고전을 정독해온 실시학사 고전문학연구회에서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이옥의 글들을 전부 모아 장르별, 작품별로 새롭게 배열하고 교감,교열을 거친후, 세 권의 번역문으로 엮었으며 자료편으로는 원문과 영인본 각각 1권씩으로엮었다

  

 

 

   

 

김려 (1766~1821)는 이옥과 함께 소품문학을 쓴 문학가로 역시  정조의 문체반정의 시범케이스다. 
열다섯에 성균관에 들어가 이옥,강이천,김조순들과 어울려 지냈다. 이때부터 이들과 함께 소품문학의 문체를 익히지 않았나싶다.
김려는 1797년 강이천의 유언비어사건에 연루되어 함경도 부령에 유배된 후 그곳에서 농어민들과 친분을 쌓으며 고통받는 그들의 대한 애정을 글로 써 이후 그의 문학에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1801년 강이천 유언비어사건의 재조사에서 천주교도와 교분을 맺은 혐의로 다시 진해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우해이어보를 지었다. <우해이어보>는 물고기들의 생태를 기록한 소중한 자료이면서 어촌의 삶을 담은 문학이다.

 김려의 책~ 

 

 

 

 

 

우리 역사속의 천재들.. 아홉천재들 중....

이규보| 한국적 한문학을 창조한 고려 최고의 명문장가
김시습| 어긋난 세상일에 번민한 비운의 천재 문사를 유독 관심이 있어서 먼저 읽어보려한다. 

먼저 이규보(1168~1241)는 13세기 한국문학사의 큰인물이다.  <동명왕편>을 쓴 고려시대의 문인으로 스스로 백운거사를 자처하고 시를 지으며 문란하고 어지럽고 혼란한 사회를 보며 얼마나 많은 생각을 했을까? 그 덕분에 오늘날 극진한 평가를 받는 동명왕편을 쓰지 않았나 한다..사실 이규보에 대한 평가는 흔히 권력에 아부한 지조없는 문인이라는 평가도 있다.. 그러나 <동명왕편>을 보면 지극한 애민사상, 민족주의가 바탕에 깔려있고, 가장 절망적인 시대에서 고구려의 이상적 통치자인 동명왕을 떠올린 자체가 민족의 운명을 가장 예리하게 직시하고 인식한 사람이 아니었을까 한다...  

 그 다음 김시습(1435~1493)은 당대의 권력자의 글에 사정없이 비판과 조롱을 서슴지 않았던사람이다. 조선 최고의 지식인, 문학가, 사상가였으면서도 평생을  떠돌아다녔던 매월당. 당대의 천재였지만 그는 추악한 세태를 증오하며 스스로 아웃사이더가 되었다. 그리고 그 누구보다도 도발적이고 파격적인 소설들을 썼다. 그가 남긴 글들은 시대를 초월하는 걸작으로 남았고, 그의 독특한 이미지는 전설이 됐다.

   

 

이규보의 작품집...
 

 

 

 

김시습 ... 평전과 작품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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