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의 통치기는 조선의 르네상스 라고 일컬어 진다. 실학사상을 바탕으로 문예부흥의 시대가 열렸고 이로서 다양한 문화가 등장했기 때문이다. 

조선의 르네상스의 꽃을 피운 18세기는 빛나는 별들의 시대였다. 조선의 르네상스를 선도한 정조의 시대이자 연암의 시대 또한 다산의 시대, 단원의 시대였다.  

정조는 세자시절부터 끊임없이 수련했고 많은 시(時), 서(書), 화(畵) 작품을 남겼다.
정조는 당대 가장 뛰어난 학자였고 누구보다 예술을 사랑한 왕이었다. 여러 권의 책을 썼고 수많은 글씨와 그림을 남겼다. 또 김홍도와 신윤복 같은 화가들의 후원자이기도 했다.그에게 시와 글, 그림은 신하들과 백성들을 다스리는 또 하나의 방법이었다. 신하들과 함께 시를 지으며 서로의 생각을 이해했고 자신의 뜻을 편지에 담아 전하며 마음을 나눴다.

18세기 지성사의 빛나는 두별 중 한별~ 

조선후기 대문호 , 이용후생(利用厚生)을 주장한 중상주의 실학파의 거두  연암 박지원 ( 1737 영조 13년. ~1805 순조5년)  

연암에게는 항상 조선 최고의 문장가. 시대를 뛰어넘는 통찰력, 진보사상가, 파격적인 문체가라는 수식어 따라다닌다.  

그러나 뛰어난 문장가이기전에 연암은 만년우울증환자,서른이 되기도 전에 머리카락과수염이 하얗게 세어버린 청년이고,가난때문에 스스로 농사를 지었다고 전해온다.1777년 사도세자 폐위 문제를 두고 당파싸움에 휘말려 신변의 위협을 느끼자 황해도 연암골로 들어가 살았다. 연암이라는 호가 이 지역의 지명을 딴것.. 

홍대용과 깊이 사귀었고 이덕무()·박제가·유득공()·이서구() 에게는 스승이면서 또 벗이었다. 

연암은 특히 산문을 잘 썼다.시는 즐기지 않았지만  그는 산문의 달인(?)였다. 조선후기 실학자 겸 소설가인 연암 박지원은 자유롭고 기발한 문체를 구사한 것으로 정평이 나 있으며 ‘열하일기’, ‘연암집’, ‘허생전’ 등의 다양한 한문소설을 발표했다.  

박지원은 《연암집》에서 이른바 연암체라 불리는 고유한 문체를 사용하여, 기존의 판에 박힌 글투를 과감하게 탈피했다. 전통적으로 지켜야 했던 바르고 고운 문체 대신 비속어를 적극적으로 끌어 쓰는 등 그만의 독특한 문체를 썼으며, 해학과 풍자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당시에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또한 그는 보다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것들을 그의 글에서 제안하고 있다. 그가 당시 문인들과 비슷한 생각을 했다면 그의 글은 새로울 수 없었을 것이다. 작은 것에서 의미를 발견하고 소박한 것에서 정신을 엿보는 그의 통찰이 《연암집》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연암이 안의현감재직시절 정조로부터 '문체가 바르지 못하니 이를 반성하라'는 편지를 받았다. 연암이 문체반정의 대상이 된것이다. 당시는 중앙의 조정에서 국왕 정조에 의해 문체반정(文體反正)이 추진되던 시기였다.문체반정이란 당대 과거시험지를 비롯해 지식인들의 일부 저술에 보이는 문체가 잘못되었다고 하여 그 문체를 단속해 기강을 바로잡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박지원의 [열하일기]가 바로 문체반정의 주 표적이 되었다.그 후 반항도 해보지만 결국은 정조에게 박지원은 자신의 문체가 잘못되었다는 속죄의 편지를 보냈으며, 이를 받아 본 정조는 그의 문재(文才)를 칭찬하며 더 이상은 문제 삼지 않겠다고 하였다. 

 박지원은 그가 평소 저술에서 강조하였던 북학의 정신을 직접 현장에서 구현하는데 주력하였다. 박지원은 백성들의 삶 전체에 관심이 많았다. 안의현감으로 재직하던 당시 고을 내 노인들을 초청해 잔치를 베풀어 효의식을 고양시키고, 옥사를 관대하게 처리하였으며, 백성들의 구휼에도 주력하였다. 그는 뿐만 아니라 각종의 수차나 베틀, 물레방아 등을 제작하여 사용하게 하였고, 하풍죽로당이나 연상각, 공작관 등의 중국식 건물을 지었다. 중국 사행길에서 보고 들었으며, 자신이 [열하일기]에 기록한 중국의 실용적인 문명을 실천하는 과정이었다.연암의 실용적·과학적인 의식은 ‘과정록’에 잘 드러나 있다. 곧 연암은 평생 도박을 하지 않았고 미신이나 풍수 같은 걸 믿지 않았다는 그 아들의 회고담을 통해서다.

 글을 보면 연암은  훤칠한 풍채와 우렁찬 목소리, 다혈질이면서 온순한 성격, 걸출한 유머러스한 면모, 꼼꼼하고 주도면밀한 그리고 강직한 성격인것 같다. 


 무엇보다 연암의 인간적인 품을 엿볼 수 있는 것은 교우의 폭이다. 신분제도가 엄연한 조선조임에도 그 는 서얼 출신을 마다하지 않았고 손아래 문사들과도 흉금을 털어놓았다. 박지원은 주변 사람들과 함께 토의, 토론을 즐기며. 그는 당대에 함께 활동한 홍대용, 박제가 등과 친밀히 교제하고 다양한 의견을 나누며 독서의 범위를 넓혔다. 또 책을 읽으면서 주체적 사고와 세계를 탐구하는 개방적인 자세를 가졌다는 것도 특징이다.
 

 연암은 그가 가장 애중했던 처남 이재성(李在誠)의 집에 갔을 때, 처남이 그 어린 자식과 겸상한 것을 보곤 “군자는 손자를 안아주지만 자식은 안아주지 않는 법”이라고 호통칠 만큼 유가의 계율에 고집불통이었지만 부모형제에겐 끔찍했다. 아버지가 위중하자 중지를 베어 그 선혈을 약에 타서 시탕하거나 아버지의 변을 맛본 일, 그리고 먼저 간 형과 형수의 초상을 극진하게 치러준 일들이 그렇다.
그의 사랑은 집안의 노복들은 물론 가축에게도 절절했다. 노복이 잘못을 저질렀을 때 노복에게 곤장을 치되 행벌한 뒤 노복을 주물러 멍을 풀어준 일이나, 안의 (安義) 현감을 그만둘 때 자신이 짓던 농토를 노복에게 증여한 것 등이 그렇다. 오죽해야 연암의 어떤 청지기는 연암이 죽은 이튿날 따라 죽기까지 했으랴!
그는 개를 기르지 않았다. 기르면 잡아먹지 아니할 수 없어서였다. 어느 날 애마가 죽자 연암은 죽은 말을 묻어주라 지시했고, 하인들이 말고기를 먹자 그 뼈라도 묻어주라고 유시하기도 했다.  


 

 《 연암집(燕巖集)》은 연암 박지원의 산문을 묶은 문집이다. 창강 김택영은 박지원 글에 대해 ‘천 년의 역사 가운데 일찍이 존재한 적이 없던 바’라고 극찬하였다.  연암의 뛰어난 문장력과 개성, 그리고 인간미가 숨김없이 드러나는 글이다.  

돌베개에 출간된 이 책은 조선 시대 최고의 문장가인 연암 박지원의 문집인 『연암집』을 완역한 것이다.

 3권으로 정리된 이 책에는 연암의 한시, 서간문, 비문, 서문, 발문, 소품문, 한문소설 등이 빠짐없이 수록돼 있다. 특히 198행에 이르는 장편 한시 ‘해인사’를 비롯,40여편의 한시는 처음 소개되는 것이다.

 

  

                                                                    

 

 ** 함께 읽은 연암 박지원... 

 

 연암 박지원의 작품 세계를 다채롭고 균형 있게 조감할 수 있도록 구성한 문학 선집. 김명호 교수가 우전 신호열 선생과 함께 번역한 <연암집>을 저본으로 하여 대표작 100편을 가려 뽑았다. 앞선 <연암집>이 학술적인 전문 번역을 추구했다면, <지금 조선의 시를 쓰라>는 보다 문학적이고 대중적인 번역으로, 일반 독자를 대상으로 펴낸 책이다.
사상성보다는 문예성, 역사성보다는 현대성에 치중하여 수록작을 선정했다. 따라서 작가의 개성과 인간미가 진솔하게 드러나고, 인생의 보편적 주제를 다루며, 기발한 사유나 참신한 발상을 보여주는 작품들이 주를 이룬다. 

연암을 알고싶고, 연암의 글을 읽고 싶다면 이책을 제일 먼저 읽어봐라~~ 가독성 좋다!! 

 

 

조선 후기의 뛰어난 실학자이자 문장가로 손꼽히는 연암 박지원의 산문 스무 편을 모아 자세히 해설한 책이다. 5년여 간 '연암강회(燕巖講會)'를 통해 대학원생들과 박지원의 글을 강독해온 지은이가 풍자문학과 파격적이고 탁월한 언어 감각으로만 알려진 연암의 정신세계와 작가적 역량을 총체적으로 보여준다.

각 장은 연암의 글을 한글로 옮긴 전문을 먼저 보여준 다음, 차례대로 각 단락을 떼어 다시 읽고, 그에 관한 고유명사와 용어 등을 풀이하는 '주해', 연암이 그 글을 쓴 배경과 그의 당시 생각 등을 살펴보며 단락을 본격적으로 분석하는 '평설'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장의 말미마다 작품 전체에 대한 지은이와 당대 타 지식인들의 평가를 담은 '총평'을 덧붙였다 

 

 

 연암 박지원의 아들인 박종채가 쓴 박지원의 전기. 박종채는 4년여 동안 심혈을 기울여 초고를 집필했으며, 그후 몇 년에 걸쳐 수정에 수정을 거듭하여 이 책을 완성하였다.

아버지 박지원을 후세에 제대로 전하기 위해 고심했던 박종채는, 이 책에서 아버지의 위대한 문학가로서의 면모만이 아니라 그 인간적 면모와 함께 목민관 시절의 흥미로운 일화들도 자세히 들려주고 있다.

또한 이 책은 박지원이 활동했던 18세기 영·정조 시대의 지성사와 사회사에 대한 풍부하고 생동감 넘치는 보고서로서의 성격도 갖고 있다. 

 

 

대문호 연암 박지원이 그의 가족과 벗들에게 보낸 편지글을 모은 책이다. 연암이 60세 되던 1796년(정조 20) 정월에 시작되어 이듬해 8월에 끝나는 이 편지들은, 서울대 박물관 소장 자료인 <연암선생 서간첩>에 실려있는 것으로 처음 번역되어 빛을 보는 글들이다.

이 책의 편지들은 박지원의 문집인 <연암집>에 실려 있는 편지들과는 그 성격이 판이하게 다르다. 책 제목으로 쓰인 "고추장 작은 단지 하나를 보내니 사랑방에 두고 밥 먹을 때마다 먹으면 좋을 게다. 내가 손수 담근 건데 아직 완전히 익지는 않았다."라는 그의 편지 구절에서 보여지듯 진솔하고 사적인, 그의 가족애가 묻어나는 글들인 것이다. 박지원의 인간적인 면모를 엿볼수 있는, 따뜻한 글들이다. 

  

   

 

 

 열하일기..조선 후기 실학자 박지원(1737~1805)의 열하견문기.  열하일기는 《연암집(燕巖集)》에 수록되어 있다.

연암 박지원은 1780년 청나라 건륭 황제의 70회 생일을 축하하는 사절단에 끼어 팔촌 형님이던 정사(正使) 박명원(1725~1790)을 수행하는 자격으로 청으로 갔다. 공적인 소임이 없어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었던 연암은 북경 여행과 함께 전인미답의 열하 지방을 체험한 후 돌아온 즉시 열하일기 집필에 전념하여 이 작품을 완성한다. 이 책에는 시대착오적인 반청(反淸) 사상을 풍자하고 조선을 낙후시킨 양반 사대부의 책임을 추궁하는 등 현실 비판적인 내용과 신랄한 표현이 담겨 있다.1780년 6월, 압록강 국경을 건너 열하에 도착한 뒤 그 해 8월, 다시 연경에 돌아오기까지, 여행 기록은 물론 청조 문인 명사들과의 친교나 청나라의 문물 제도 등에 대한 느낌을 날짜 순으로 기록했다.

이 책에는 중국의 역사·지리·풍속·습상(習尙)·고거(攷據)·토목·건축·선박·의학·인물·정치·경제·사회·문화·종교·문학·예술·고동(古董) 지리·천문·병사 등에 걸쳐 수록되지 않은 분야가 없을 만큼 광범위하고 상세히 기술되어있다.

수레나 선박의 활용과 벽돌의 사용, 지동설에 대한 중국 학자들과의 토론 등 청조의 번창한 문화와 문물을 본받을 것(북학·北學)을 주장, 조선 후기 실학사상의 기념비적 저작중 하나로 꼽히며 파격적 문장으로 국문학적으로는 영-정조(英-正祖) 연간 문체반정(文體反正)의 중요 저술로도 평가된다.

이 열하일기는 26권 10책으로 되어 있으며, 그 속에는 허생전, 호질 등도 실려 있다.

   

보리출판사의 열하일기. 번역자 리상호는 1911년 조선광문회에서 <연암전집> 가운데 <열하일기>만 단행본으로 출판한 것과, 한학자 김택영이 1900년과 1916년에 출판한 연암집을 묶어 후손들이 출판한 〈연암전집〉, 이 두 가지를 바탕으로 <열하일기>를 국역했다.  

돌베개의 열하일기. 5 년간의 공들인 번역과 현지답사, 500여 컷의 생생한 도판으로 되살린 열하일기의 진면목. 이 책의 역자 김혈조 선생은 연암 산문문학 연구에 일생을 매진한 전문 학자이다. 자신의 연구과제가 늘 연암 박지원의 산문문학이었기에, 책을 내는 것을 전제로 하지 않더라도 늘 열하일기는 그에게 있어 연구의 대상이었고, 고심처이기도 했다.

2007년 이전에 이미 열하일기는 대략 번역해 두었으나, 완역을 위해 옛 원고를 다듬고 번역하지 못한 부분을 번역하는 등 2007년 8월부터 2008년 7월까지 약 1년간 본격적으로 이 작업에 매진했다. 이 기간 동안 역자는 연구년 교수로서 중국 산동대학에 체류했는데, 꼬박 1년을 열하일기 번역에만 매달렸다.

  

그린비의 열하일기.조선 후기 실학자 연암 박지원의 '지식저장소'로 꼽히는 중국 기행집 <열하일기 熱河日記>를 새롭게 재구성했다. 씌어진 지 200년을 훌쩍 넘긴, 읽기에 수월할 리만은 없는 텍스트에 보다 쉽게 접근할 수 있는 판본을 만들고자 한 것.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의 저자 고미숙 외 두 사람이 함께 옮겼다.<열하일기>는 여정을 따라 가는 편년체 방식으로 쓰인 7편의 글들과, 여정과는 별도로 쓰인 기사체 글들이 공존하는 책이다. 이 때문에 연암의 여정과 의식의 흐름을 밀도 있게 따라가는 것이 쉽지 않다. 이 책은 기존의 배치를 따르지 않고, 새로운 편집으로 <열하일기>의 이해와 감정의 효율을 최대치로 올리려는 시도를 한다.
연암과 이국 친구들과의 길고 긴 밤샘 필담 부분은 희곡 형식으로 처리한 점도 눈에 띈다. 연암의 발자취가 한눈에 쏙 들어오는 안내도, 그리고 시각적 요소에 비중을 크게 둔 편집은 고전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들이 <열하일기>라는 '뜨겁고 생명력 넘치는' 텍스트에 진입하기 위한 문턱을 낮춰준다.

    

 

 

^^ 연암산문정독은  연암의 산문 작품을 번역한 책 중에서 가장 정밀하고 전문적인 책이다. 이 책은 정밀하고 깊이 있는 내용을 다루고 있지만, 독자층은 좀더 광범위하게 볼 수 있다. 연암 전문가를 넘어서서, 연암의 산문을 보다 깊이 있게 읽고자 하는 일반 독자에게 이 책은 좋은 지침서가 될 것이다.
이 책은 총 다섯 권을 계획하고 있다. 현재 2권까지 출간...

  

이 책은 연암 박지원의 산문 작품 22편을 뽑아, 원문을 교감(校勘)하고 번역·주석한 것이다. 연암 산문의 애호가(愛好家), 전문 연구자들이 좀더 정세하게 연암의 글을 감상할 수 있도록 역주(譯注)·고이(考異)·집평(輯評)이라는 세 가지 요소를 갖추었다.

이해하기 힘든 구절에 대한 상세하고도 정밀한 학술적 주석을 가하여 원문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전고(典故)의 원출처를 일일이 찾아 상세한 내용을 밝히는 방식을 취하였다. 매 작품마다 소단락을 나누어 분석하였는데, 번역문과 원문 모두에 주석을 달았다.

번역문의 경우 ‘역문풀이’라는 형식으로 단어나 문장의 뜻을 해석, 전고(典故) 등을 조사하여 밝혔고, 원문의 경우 ‘원문풀이’라는 형식으로 주석을 달아 인용된 원전의 문장을 찾아 일일이 적어 주었다. 또한 김택영, 박영철, 이재성 등 여러 사람의 평점 비평에 대해서도 번역문과 원문을 함께 제시하고, 주석을 달았다.

연암 박지원은 자신의 작품을 몇 번이고 퇴고하면서 글의 완성도를 높여 간 작가였다. 이 책에서 수행한 면밀한 이본 교감은 연암의 이런 퇴고 과정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본들의 차이를 살피다 보면 연암이 글의 어떤 대목에서 이리저리 주저하며 생각에 골똘히 잠겨 글을 다듬고 표현을 고쳤는지, 어떤 대목에서 특히 마음이 흔들리고 고심을 했는지 알 수 있다. 연암의 글을 좀 더 상세하게 알 수 있게 해주는 유용한 자료이다.

   

연암 박지원의 산문 작품 33편을 뽑아, 원문을 교감(校勘)하고 번역·주석한 것이다. 『연암집』(燕巖集)의 알려진 모든 이본을 수합·대조하여 원문을 교감하였으며, 번역이 난해한 부분에 대한 기존 번역서의 번역문을 나란히 제시하여 한눈에 해당 구절의 동이(同異)를 파악할 수 있게 하였다.

산문의 원문에 표점을 붙여 번역문과 나란히 수록함으로써 서로 대조해 가며 읽을 수 있게 했고, 이본들을 자세히 교감하여 그 결과를 각주로 제시했으며, 번역의 동이(同異)를 밝혔고, 고사나 전거(典據)가 있을 경우 학문적인 견지에서 그 내용을 최대한 자세히 밝혀 주었다.

 

 

  

 

 ^^ 아직 이 경지까지 못 왔다.. 못 읽어봄..그러나 꼭 포함시키고 싶다..앞날을 기대하며...

 선귤당 이덕무가 연암 박지원의 기문 10편을 뽑아 비평을 하고 서문을 달아 엮어낸 비평집 <종북소선>에 대한 연구서이다. <종북소선>은 지금껏 박지원의 자찬 산문집으로 잘못 알려져 왔다. 하지만 서울대 박희병 교수는 그와는 다른 주장을 제기한다. 박 교수의 연구 결과, <종북소선>은 이덕무가 직접 박지원의 글 중에서 기문을 가려 뽑고 비평을 붙여 엮어낸 자찬 비평서라는 것이다.

<종북소선>은 학계에 그리 널리 알려져 있는 책이 아니며, 본격적인 연구도 이루어져 있지 않다. 하지만 이 책은 한국 비평사와 정신사에서 대단히 주목해야 할 문제적 저작이다. 또한 문인 이덕무의 조선 시대 최고의 산문비평가로서의 면모를 보여주는 귀중한 저작이다. 

 

선귤당 이덕무가 연암 박지원의 기문 10편을 뽑아 비평을 하고 서문을 달아 엮어낸 비평집 <종북소선>에 대한 연구서이다. 조선 시대 최고의 비평가 이덕무의 면모 그리고 연암 박지원과 선귤당 이덕무의 고도의 지적 대화를 정밀하게 구현해냈다.

<종북소선>은 지금껏 박지원의 자찬 산문집으로 잘못 알려져 왔다. 하지만 서울대 박희병 교수는 그와는 다른 주장을 제기한다. 박 교수의 연구 결과, <종북소선>은 이덕무가 직접 박지원의 글 중에서 기문을 가려 뽑고 비평을 붙여 엮어낸 자찬 비평서라는 것이다. 이 책이 이덕무의 자찬 비평서라는 근거는 이 책에 자세히 밝혀져 있다.

  

 

 ^^

 

조선 최고의 문장가 연암 박지원의 삶을 새롭게 재조명한 책. 기존의 연암의 주요 작품을 중심으로 다룬 책들은 많았다. 그러나 박지원이라는 인물을 중심에 두고 왜 그가 글을 쓸 수 밖에 없었는지에 관한 연암의 내면을 깊이 들여다 본 작품은 드물었다. 이 책은 주변의 인물들이 연암에게 미친 영향과 함께 연암이 아웃사이더의 길을 걷게 된 과정을 세심하게 추적한다.

사실 연암은 십대 시절부터 우울증으로 인한 심각한 불면증에 시달렸고 그것을 이겨내기 위해 생각해낸 방법이 글을 쓰는 것이었다. 연암의 글쓰기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는 잠 못 드는 밤이면, 시장을 오가며 수집한 풍문들을 소재로 이야기를 써내려갔다. 김용관 저자는 연암이 어린 시절부터 우울증을 겪을 수밖에 없었던 개인적인 상황과 18세기 조선의 사회상을 맞물려 살펴보고, 당시 집필했던 글들을 통해 연암의 내밀한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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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의 사람됨은 이러하다. 물소 이마에 칼 같은 눈썹, 초록빛 눈동자에 흰 귀를 지녔다. 고고(孤高)한 사람만을 가려 더욱 가까이 지내고, 권세 있는 자를 보면 일부러 더 멀리하였다. 그런 까닭에 세상과 맞는 경우가 드물어 언제나 가난했다.”  

“고명한 일에만 마음을 두고 세상일에는 무심하였으며, 사물의 명리(名理)를 종합하고 깊고 아득한 세계에 침잠하였다. 백세 이전의 사람들과 흉금을 트고, 그 뜻은 만 리를 넘어 날아다녔다       -박제가가 쓴 소전(小傳에서 자기자신을 소개한글..- 

 “젊은데도 불구하고 어른처럼 점잖습니다. 생각은 건전하고 심지가 굳으며 말은 명료합니다. 질박할 뿐 아니라 슬기가 뛰어나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최고의 수재입니다.  -청장관 이덕무 평 -


 그는 조선에서 문장이 매우 뛰어난 자이다. 그의 키는 작달막한데 굳세고 날카롭다. 그의 문장은 찬란한 별빛과 같고 조개가 뿜어내는 신기루 같으며 용궁의 물과 같다.”  - 중국의 문인 우촌 이조원 평

외모는 털보에다 키가 매우 작았다. 위의 글은 박제가(朴齊家, 1750년~1805년)에 대한 평이다.  

 박제가(朴齊家, 1750년~1805년) 는 박평(朴坪)의 서자 ,서얼이지만 정조의 적자와서자를 구분않는 인재등용관방침으로 규장각 검서관이 되어 많은 저술을 했다.(정조는  재위 1년(1777) 서자들의 벼슬길 진출을 허용하는 『서류소통절목(庶類疏通節目)』을 반포하고 재위 3년(1779) 이덕무·박제가·유득공·서리수 등 4명의 서자를 규장각 검서관(檢書官)에 특채)

조선후기의 정치가 ,실학자로 북학파의 핵심인물로 청나라의 문물수용과  중상주의 경제정책을 주장.

호는 초정, 정유, 위항도인 (중국, 전국시대 초나라의 삼려대부 굴원등이 읊었던 시가집의 '초사'를 아껴 호를 '초정'이라함)

스승 박지원의 문하에서 실학을 연구, 이덕무,유득공,이서구,이희경등 실학자들의 벗. 특히 이덕무와는 절친 

정조2년에 청나라에 사은사 채제공의 수행원으로 따라가 청의 이조원, 반정균등과 교류후 '북학의' 저술 (연암은 박제가의 『북학의』에 대해 자신의 『열하일기』와 더불어 한 치의 어긋남도 없어 마치 한 사람의 손에서 나온 듯하다고 하며 3일 동안 읽어도 싫증이 나지 않았다고 북학의 서문에서 칭찬하기도 했다).

글씨와 그림에도 조예가 깊었다. (그의 글씨는 추사체의 선구적역할-추사는 박제가에게 학문을 배웠다.)

 

 

돌베개에서 출간된 박제가의  <정유각집> 상·중·하 3책은 <북학의>를 제외한 초정 박제가의 시와산문 전체를 완역한 것이다. 

시1721수, 산문123편을 상중하로 나눠 실었다.  시문집명으로 쓰인 '정유각'은 박제가의 당호. '정유'는 소나무의 별칭인데, 정조가 박제가 집 마당의 소나무를 칭찬하고 이를 '어애송(御愛松)'이라 명명한 데서 연유한다.

이 책을 번역하신 분은   

정민 한양대학교 국문학과 교수. 한국한문학 전공
이승수 한양대학교 국문학과 조교수. 한국한문학 전공.
박수밀 한양대학교 동아시아문화연구소 연구교수. 고전문학 전공.
박종훈 전남대학교 호남한문학연구소 연구원. 한국한문학 전공.
이홍식 한양대학교 동아시아문화연구소 연구교수. 고전문학 전공.
황인건 한양대학교 국문학과 강사. 고전문학 전공.
박동주 한양대학교 국문학과 강사. 고전문학 전공 

6년간 정성을 들여 출간된 책이니 번역자들의 노고에 고개숙여 감사드린다..  

그의 생애, 학문, 사상, 문예를 살펴보자.

 

 

 

 

 

 

 

 

 

 

 

 

 

 

<상권>

책머리에
일러두기

『정유각집』 서문 ㅣ 이덕무
『정유각집』 서문 ㅣ 반정균
시집 1
시집 2

『정유각집』 해제
박제가 연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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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권>

일러두기

시집 3
시집 4
시집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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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권 >

일러두기

문집 1
문집 2
문집 3
문집 4
문집 5

文集 1
文集 2
文集 3
文集 4
文集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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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인문학' 캠페인이란? 

인문학 저서와 저자들의 자취가 깃들여 있는 현장을 전문가들의 안내를 받아 독자와 함게 찾아가는 인문학 탐방을 비롯해서 인문학 유명 저자들을 초청해 마련하는 인문학 석학 강연, 각 지역 공공도서관들이 자체적으로 실시하는 인문학 강연, 탐방등이 마련된다.  

길 위의 인문학 캠페인에 참여해보고 싶어 홈페이지를 여러번 들락날락 해봐도  도저히 여건상 갈수없음에 한탄한다. 

탐방 신청자 만여명, 인문학 부흥의 노력에  이렇게 많은 분들이 관심이 있으시다니....존경합니다.~~ 

어렵고 고루한 학문이기때문에 학자들만의 것, 학자들만의 몫이라고생각한 것을 확~ 뒤집는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인문학의 저변을 확대하고 우리네의 삶속에 우리의 역사속에서 파닥파닥 살아서 숨쉬고 있는 인문학을 

대중과 함께 소통하려는 의도가 너무 고맙다.  

인문학이라고 하면 무겁다,어렵다의 생각은 조금 놔두고 인문학은 인간을 탐구하는 것, 우리의 삶과 가장 가까운 학문이라고 

생각하면 인문학 안에 인간의 희로애락과 자존감의 의미 등을 조금은 알수있지 않을까?  

길위의 인문학이 책으로 나왔다.

이 책은 크게 두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먼저 1장 사람의 자취를 따라 떠나는 길 위의 인문학은 우리나라의 지적 거장들의 흔적들을 찾아 떠난다.   

퇴계 이황과 남명조식, 추사 김정희, 다산 정약용과 신사임당, 허균에 이르기까지 문학, 역사, 철학 등 학문의 중심에서 훌륭한 업적을 이룩한 그들의 삶과 기록들을 그대로 따라 가는 일은 시공을 초월해 그들을 만나고, 그들의 정신세계를 이해하는 소중한 시간이 될 것이다.

다음으로 2장은 역사의 흔적을 따라 떠나는 길 위의 인문학이다.  

세월은 흐르고 역사는 바뀌지만, 땅은 그 모든 것을 기억한다. 이제는 그 모습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성곽, 삐라와 평양방송의 추억이 있는 강화, 병자호란의 아픔이 배어 있는 남한산성 등 이제는 아련해진 기억들을 되새기며 우리의 역사를, 지난 시절 우리네 삶을 되돌아본다. 이처럼 역사를 되짚는 일은 단순히 과거를 반추하는 것에서 나아가, 앞으로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해 줄 분명한 나침반이 될 것이다. 
   

목차보기.............

프롤로그 - 길에서 느끼는 인문학의 재미와 감동

1부·사람의 자취를 따라 떠나는 길 위의 인문학

인문학, 퇴계의 길을 따라 걷다
지리산의 종소리, 남명 조식
추사 김정의 선생과의 대담
강진 푸른 물에 다산의 마음이 흐른다
유배지의 삶, 김이재와 정약용
남존여비 시대의 세 여성과 불우한 사람들의 벗, 허균

2부·역사의 흔적을 따라 떠나는 길 위의 인문학

서울성관, 역사를 걷는다
안과 밖에서 보는 강화도
남한산성에서 되돌아보는 병자호란
강릉 가는 먼 길
금강 따라 흐르는 우리의 역사
은유와 상징의 집, 양동마을과 향단

에필로그 길 위의 인문학, 그 융합의 무지개를 위해

작가 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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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에 책 읽는 소리가 끊이지 않게 하라" 이 소리는 우리집에서 나는 소리가 아닙니다.~~ㅋㅋ    

우리는 얘기한다. 평생 잘먹고, 잘살려면 공부해라.  

요즘 잘키운 남의자식 즉, 엄친아에 사람들은 열광한다.  씁쓸하다..사실 나도 바라면서..쯧 호기~

자식 잘 키우는 일,,아니 제대로 잘 키우는 일이 아마 로또 10번 당첨되는 것 보다 어려울것같다. 

그래  너 맘대로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라라고 놔둘수도없고, 그렇다고 내 마음대로 내 입맛대로 자식을 키우려해도 

그게 내맘대로 되냐구?  남들에게 내 아이 칭찬받는 일이 내 자신이 받을수있는 최고찬사가 되어버린지는 이미 오래~~~ 

우리 사회의 유별난 교육열은 옛날 부터 이어져 온것같다. 

그러나 옛글을 읽을수록 예로 부터 내려져오는 교육과, 지금 현재의 교육열은 너무도 틀린듯하다. 

꼭 요즘은 잘먹고 잘살기 위해서의 교육의 비중이 더 큰것같고 , 우리 조상들의 교육은 인성교육, 생활교육의 비중이 더 큰것같다.  

연암 박지원은 연암집에서 "명분과 법률이 아무리 좋아도 오래되면 폐단이 생기고, 쇠고기 돼지고기가 아무리 맛있어도 많이 먹으면 해가 생긴다. 많을수록 유익하고 오래갈수록 폐단이 없는 것은 오직 독서일 것이다.”라는 말씀을 하셨다.

입신양명측면에서 교육방식을 지닌 서애 유성룡은 항상 집에서 책을 읽으며 다섯 아이들에게 모범을 보였다. 

학문을 강조한 교육방식의 퇴계 이황은 훌륭한 친구와 함께 공부하라며 뜻을 같이하는 친구끼리 공부하면 능률이 오른다고 했다.. 퇴계는 공부할수있는 최고의 장소로 절을 추천했다. 본인도 아들과손자들도 주로 절에서 공부했다고 전한다.    

 

독서는 예로부터 사람을 완성하는, 성인에 이르는 길이라고 했다.

영조가 사도세자의 죽음을 통해 깨달은 것은 강한 왕을 만드는 것이라 생각하고 그의 손자 정조에게도 강조한 것은 독서다.
영조는 정조에게 『권학문』에서 “아침저녁으로 책을 읽고 밤낮으로 글을 익혀 마땅히 진실과 거짓을 가릴 수 있어야 한다. 참된 공부는 나를 위하는 것이고, 거짓 공부는 남을 위한 것이다. 참된 공부와 거짓 공부는 나라의 일로나 개인적인 일로나 의리나 이익이나 서로 다르기에 가히 두려워해야 한다.”고 독서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4대가 두차례 사화로 사사되거나 고문을 받다 숨진 문곡 김수항 집안..  사화로 죽음을 앞둔 김수항은 독서하는 아이가 끊이지 않게 하라는 유언을 아들 김창집에게, 다시 김창집이 아들 김제겸과 손자에게 김제겸은 다시 아들 김달행에게 남겼다.이처럼 김수항 3대는 한결같이 '글읽기에 매진할 것'을 유언으로 남겼다.‘ 김수항의 3대의 걸친 독서훈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선조들의 숨겨진 위대한 유산이다.   

영남학파 소요당 박하담은의 문집에는 82세로 운명하기 하루전에 자손들을 위해 지은 가훈십조가 실려있다. 그가 쓴 가훈 10조중의 아홉번째가 독서불가폐(讀書不可廢)다. 즉 글과 시 공부를 꼭 하라.사람이 그만두면 안되는건 시와 서의 공부..  

둔재에서 조선의 시인이자 문장가가 된 김득신이 하루는 말잡이 하인과 함께 어느 집을 지나치다가 책 읽는 소리를 들었다. 가던 길을 멈추고 한참 들은 김득신은 하인에게 “익숙한 글인데 어떤 글인지 생각이 안 나는구나.”라고 말했다. 이에 하인은 “나리가 평생 매일 읽은 것으로 저도 알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김득신은 한참 후에 자신이 1억 1만 3천 번 읽었던 ‘백이전’임을 알았다. 이처럼 김득신은 천재 집안의 둔재였다. 하지만 아버지 김치의 교육은 남달랐다. 명석하지 못한 두뇌를 나무라기보다는 기다리고 독서를 통한 끊임없는 노력을 강조했다. 결국 김득신은 59살에 문과에 급제하고 당대 최고 시인이자 문자가로 등극한다.  

서애 유성룡은 “요즘 서울의 젊은이들은 빠른 성공만을 원한다. 마치 저잣거리에서 물건을 파는 상인처럼 빠르게 성공하는 기술만 찾는다. 옛 성현의 글이 담긴 책들은 다락방에 처박아두고, 말을 도둑질해 시험 감독관의 눈에 띄도록 글을 지어 성공한 사람들이 많다.” 며 독서의 참뜻과 쓰임에 대해서도 가르침을 멈추지 않았다.   


이황의 학문을 계승한 김성일이 공부한 자세는 그의 행장에 기록돼 있다. 김성일만의 이색 교육법이 있다. 김성일이 하루는 아들들에게 붓과 벼루가 아닌 칼을 주고 말했다. “칼을 주는 의미를 곰곰이 생각해라. 이는 의리의 중요성을 말한다. 의리와 개인적인 욕심의 관계를 끊어 의리를 취할 일이다. 공부를 하면서 버릴 것을 분명히 하라.” 암기하고 이해하는 공부를 넘어 인간에게 중요한 의리의 삶을 살 것을 강조한 것이다.

이 책에 나오는 조선의 인재들의 일화를 봐도 알 수 있듯, 예로부터 자신, 가문, 나라를 올바로 세우는 것이 독서다. 그래서 조선 명문가에서는 독서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다 정독과 다독에 대해 많은 사대부가 고민을 했고, 각자의 방법을 찾았다. 공부 환경과 독서 요령, 글쓰기 방법에 대해서도 폭넓고 깊은 생각을 남겼다. 이와 같이 조선명문가 독서교육에는 그들이 직접 몸으로 느끼고 체득해 온 살아있는 지혜와 통찰이 담겨있다.   

조선명문가들은 자녀교육의 수많은 조건 중, 글을 공평하게 판단하는 의미인 문형(대제학)배출을 최고로 꼽았다. 바로 호당(독서당=사가독서) 출신이라는 점이다. 호당은 임금이 문과 출신의 젊은 인재에게 휴가를 줘 특별히 독서를 하게 하는 제도다.
1426년(세종 8)에 집현전 대제학 변계량()이 세종의 명을 받아 재주와 덕행이 뛰어난 문신을 선정하여 장의사()에서 사가독서()를 하게 한 데에서 비롯되었다. 세조 때 일시 폐지되었다가 1491년(성종 22)에 상설기구로 ‘남호() 독서당이라는 현호()를 달고 복구되었다.이때부터 임진왜란이 일어나 소실될 때까지 학문연구와 도서관의 기능을 담당하였는데, 정조 때 규장각이 설치됨에 따라 완전히 소멸되었다. 
자연히 명문가를 이룬 상당수는 호당 출신이다. 조선은 독서를 제1의 덕목으로 본 셈이다. 명문가뿐 아니라 왕궁 안에서도 왕의 자질을 키우기 위해 독서를 권했다.    

목차보기................

1장 삶인가, 죽음인가

전쟁 때도 책을 놓지 마라 _ 유성룡
어린 며느리 귀양지에서 책을 읽다 _ 정부인 김씨 3대에 걸친 독서 유언 _ 김수항
못다 핀 천자문 _ 박팽년
아버지를 살리려면 독서를 해라 _ 정약용
나라를 유지하는 힘은 책에 있노라 _ 영조
나라를 찾는 법은 공부에 있다 _ 전우
죽음을 각오한 결심으로 공부하라 _ 권양
시험 부정은 정승도 용서하지 않는다 _ 이건명
붓과 벼루가 아닌 칼을 물려주는 까닭을 생각하라 _ 김성일

2장 정독인가, 다독인가

서재가 새둥지처럼 작다고 탓하지 말라 _ 이만수
읽고 외우고 생각하고 적는다 _ 기대승
열흘의 노력이 위대한 습관을 만든다 _ 홍대용
책 이불과 책 병풍을 아는가 _ 이덕무
1억 1만 3천 번을 읽어 내려가다 _ 김득신
책이 있는 곳이 지상낙원이다 _ 허균
하루에 책을 30번 읽는 방법 _ 이인상
공부를 하다가 병을 얻다 _ 최충성
나는 책벌레가 되련다 _ 장유

3장 환경인가, 요령인가

왜 어버이부터 책을 읽어야 하는가 _ 이경근
시간은 빨리 가고 청춘은 다시 오지 않는다 _ 이경여
가난하다고 공부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 _ 정홍규
사람이라면 시와 글 공부는 당연하다 _ 박하담
공부 분위기는 스스로 만든다 _ 이덕형
공부 장소로는 어디가 좋은가 _ 이황
공부는 어머니의 영향이 크다 _ 최옥
공부방에서 지켜야 할 22가지 계율 _ 성혼
자녀 교육에 가정교사는 안 된다 _ 성해응
독서는 보수적으로 하라 _ 안정복
과거시험에서는 상세하게 쓰라 _ 윤선도
글을 먼저 쓴 뒤 책을 읽는다 _ 이상수
질문이 모든 공부의 기초다 _ 허목
노력 없는 편안한 삶은 없다 _ 서유구
독서는 다만 책 속에 있지 않다 _ 홍길주

4장 수행인가, 실용인가

독서는 수행이다 _ 송시열
먼저 뜻을 세워라 _ 이이
책을 읽기에 앞서 집안을 정리하라 _ 강덕준
공부는 시간과의 싸움이다 _ 강종열
책 보면서 마음 잡고, 거울 보면서 얼굴 잡는다 _ 이언적
역사책을 왜 읽어야 하는가 _ 임징하
시험 감독관의 판단에 연연하지 말라 _ 상진
공부도 실사구시다 _ 박지원
책을 빨리 쓰려는 마음을 경계하라 _ 홍만종
삶에 도움이 안 되는 책읽기는 필요없다 _ 정제두
공부를 했으면 정치에 적용하라 _ 이수광
철저히 탐구하고 논증하다 _ 이기지

5장 우연인가, 필연인가

300년 전의 편지에서 우정을 보다 _ 김원행
어머니가 쓴 필사본이 가져온 기연 _ 조태억
부채에 새긴 글로 누대의 세교를 알다 _ 김유근
가장 좋은 친구는 공부하면서 사귄 친구다 _ 이형상
3대 연속 장원의 비결은 달리기다 _ 이민적
명문 사립학교를 만들다 _ 윤순거
인간의 완성된 업적은 책 쓰기다 _ 최한기
바른 공부를 하면 출세도 따른다 _ 김안국
행복의 3대 조건을 아는가 _ 이하진

 

**함께 읽으면 도움이 될만한 책 

 

목차보기...... 

제1장 풍산 류씨, 서애 류성룡 종가
책 읽는 아버지가 되라
- 9대째 공직은 이유가 있다
명문가에게 배운다 1 l 평생 책 읽는 아이로 만들어라

제2장 고성 이씨, 석주 이상룡 종가
시아버지가 며느리에게 <논어>를 가르치는 가풍
- 단 한 명의 과거 합격자를 배출하고도 명문가를 이어온 힘
명문가에게 배운다 2 l 자긍심 있는 아이로 키워라

제3장 재령 이씨, 운악 이함 종가
밑지고 살아라, 그러면 세상을 얻는다
-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상생(相生) 의 철학
명문가에게 배운다 3 l 때로는 손해 볼 줄 아는 아이로 키워라

제4장 양천 허씨, 소치 허련 가문
학문이 얕으면 결코 붓을 들지 말라
- 강요하지 않는 재능, 5대째 화가를 길려낸 비결
명문가에게 배운다 4 l 스스로 재능을 발견하도록 기회를 제공하라

제5장 진성 이씨, 퇴계 이황 종가
훌륭한 친구와 함께 공부하라
- 500년을 이어온 '인맥네트워크'의 위력
명문가에게 배운다 5 l '공부에 뜻이 있는 아이끼리' 네트워크를 만들어라

제 6장| 해남 윤씨, 고산 윤선도 종가
자녀를 '문화의 바다'에 빠뜨려라
- 400년을 이어오는 시, 서, 화의 재능
명문가에게 배운다 6 l 세심하게 점검하여 질책하고 조언하라

제7장 나주 정씨, 다산 정약용가
반드시 서울 10리 안에서 살아라
- 유배지에서 전하는 아버지의 마지막 당부
명문가에게 배운다 7 l 아버지가 자녀교육의 '매니저'로 직접 나서라

제8장 한양 조씨, 호은 종가
죽을 먹을지언정 더 넓은 세상으로 유학을 보내라
- 교육은 가장 적게 투자하고 가장 확실하게 남기는 장사
명문가에게 배운다 8 l 최상의 교육 기회를 제공하라

제9장 파평 윤씨, 명재 윤증 종가
'노성 윤씨 주식회사'의 CEO들, 종학당을 만들다
- 조선 최초의 '원스톱' 영재교육 프로그램
명문가에게 배운다 9 l 아이들의 '멘토'가 되라

제10장 경주 최씨, 경주 최부잣집
만석의 재물은 사라졌지만 '육훈'과 '육연'은 살아 있다
- 300년을 이어온 가훈의 승리
명문가에게 배운다 10 l 원칙을 정하고 끝까지 실천하라

- 에필로그 : '지혜의 전령사' 할아버지, 할머니를 이야기꾼으로 모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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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는 고려인종 23년(1145년)경 김부식이 신라고구려백제 3국의 정치적흥망과 변천을 중심으로 편찬한 역사서이다.  삼국사기는 사료가 가장 미약한 부분인 삼국시대를 다루었으며, 현재까지 남아있는 우리나라 최초의 관찬사서이다. 또한 후대에 편찬된 역사서의 모범이 되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수있다. 이책은 통일신라시대를 포함한 한국고대사를 연구함에 있어 일연의 삼국유사와 더불어 최고의 사료적 가치를 지닌다고 평가된다.   

 

 

 

 

 

 고려사는 김종서, 정인지 등이 세종의 교지를 받아 기전체로 만든 고려의 正史, 내용이 전해지는 사료가 부족하여 연구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고려의 역사를 기록한 正史로서 사료적 가치가 높다는 점에서 학술적, 문화재적으로 가치가 높은 자료이다.  

삼국사기,고려사....이렇듯  한 왕조가 끝나면 다음왕조에서 전대사를 총리했다..현재의 우리모습의 위상을 정립하기위해서는 바로 전시대의 역사를 총정리해야 현재의 기준을 세우고 , 미래의 좌표를 가늠할수있다.

그러나 조선왕조는 일제에 의해 멸망했기 때문에 현재의 전대사인 조선왕조사를 총정리해 보지 못했다. 근대사학이 일제에 의해 시작된 까닭에 조선왕조에 대한 정리는 일제의 구미에 맞게 날조되었다.  일제강점기에 지들맘대로 우리를 통치해보겠다고 아주 조직적으로 조작을 했다.

일제의 식민통치를 정당화하는 차원에서 조선왕조사가 해석되었다.  조선왕조사는 지리멸렬하고 고식적이며 자생력이 없고, 농업기술은 미개하며, 주체성이 없어 큰나라에 붙어 살려는 사대주의,당쟁, 독선적인 유교사상등으로 조선왕조는 일본이 구제해줘야한다는 논리를 폈다. 그런 논리로 일본의 한국병합을 아주 정당화 시켰다..이것이 그망할놈의 식민사관이다.  

 정말 조선왕조사는 보잘것 없는 역사인가? 매도되어야하는건가? 유교가 정말 사대주의를 키웟나?

조선왕조는 고려 500년 동안 시련과 진통을 겪으면서 배워 온 주자학을 바탕으로 지식인 관료들의 중앙집권적 문치주의를 우리 실정에 맞게 정착시킨 국가였다고 할 수 있다.  《경국대전》은 중앙집권적 양반 관료 체제의 결정판이었다. 그리하여 세계에서 유례가 드문 문치주의 국가를 이룩했다.  

문치주의가 강화되다 보니 임금은 약하고 신하는 강한 군약신강의 정국이 전개되었다.  인사권과 군사권이 국왕에게 있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신료들에게 있었다. 이렇게 되자 신료들 사이에 붕당이 생기고 당쟁이 공공연하게 자행되었다.  

조선 왕조는 지방의 토성(土姓) 양반들을 지원해 신왕조의 지지 기반으로 삼았다. 이들은 과거제도를 통해 중앙의 사대부층을 구성했다. 이른바 사대부 정치 시대가 열린 것이다. 그러다 보니 신권이 자꾸만 강해졌다. 이에 세조는 왕권을 회복하기 위해 쿠데타(계유정난)를 일으킨 후 공신과 결탁해 강력한 훈신(나라나 군주에게 드러나게 공을세운 신하) 세력을 육성했다.    사림-훈구-다시 사림... 성종대 중앙정계에 등장하기 시작한 사림은 네 차례의 사화를 거치면서 큰 타격을 입었다 사림이 훈신에게 여러 차례 타격을 받았지만 그들의 진출은 역사적인 대세였다. 그리하여 16세기부터는 이른바 사림 정치 시대가 열렸다. 그러나 훈신 세력이 무너지자 사림파는 자체 분열해 붕당이 생기고 당쟁이 격화되었다. 그리하여 붕당 간의 조정이나 균형을 통해 왕권을 강화하고자 하는 탕평 정책이 실시되었다. 영조는 노론과 소론의 탕평을 통해 왕권을 강화하고자 했다. 그 결과 탕평당이 생기고 외척 세력이 강화되었다. 이에 영조와 정조 대는 정국이 안정되고 문운이 일어났다. 이들이 죽고 어린 왕이 자리에 앉자 외척 세력이 극성을 부렸다. 그리하여 19세기는 외척의 세도 정치 시대가 되고 말았다.  


한국의 과거제도』, 『조선 초기 양반연구』, 『조선의 사회와 사상』, 『조선양반사회연구』, 『한국역사의 이해』1~7, 『조선왕조사』, 『조선시대 당쟁사』, 『조선을 만든 사람들』『명장열전』을 쓴 이성무국사학자가 썼다.
국사편찬위원회의 위원장을 역임했던 저자는 그간 조선의 양반사회ㆍ당쟁ㆍ과거제도 등을 소재로 대중서를 출간하며 역사를 연구자의 영역에서 대중의 영역으로 확대시킨 장본인이다. 그런 그가 다시 한 번 1천여 쪽이 넘는 엄청난 양으로 ‘역사 공부의 필요성, 조선왕조사 정리의 필요성’ 등을 근간으로 조선시대를 밀도 있게 정리했다. 조선왕조가 열린 1392년부터 왕조가 멸망한 1910년까지 518년간의 역사를 다루었다

'조선왕조실록'을 의식해서 왕조별로 정리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정치사를 중심으로 서술하게 되었다. 정치사 내용이 대중의 흥미를 끌 만해서이기도 하지만 사회, 경제, 군사, 문화 등 여러 분야사도 정치사를 기둥으로 하여 유기적으로 서술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저자는 조선왕조의 정치사를 사대부 정치시대, 훈신 정치시대, 사림정치시대, 탕평정치시대, 외척세도 정치 시대로 구분하여 독자들의 이해를 도왔다.  

1998년도 2권짜리로 출판된 책을 합한 합본이 아닐까 싶다. 새로구입해서 읽어봐야겠다.

목차를 보면............

개국전야
위화도 회군 / 요동 정벌, 무엇을 얻기 위한 전쟁이었나 / 위화도 회군의 결과 / 4불가론과 붉은 무덤 / 사전 개혁 / 고려의 마지막 충신 정몽주

태조
조선을 창업한 고려의 무장 이성계 / 태조 이성계의 가문 / 조선 건국의 3대 이념 / 국호 ‘조선’의 탄생 / 신생국 조선의 개국공신 / 역성혁명 / 한양 천도 계획 / 태조의 불교 정책 / 태조와 불교계를 이어 주었던 승려, 무학 / 제1차 왕자의 난 / 조선 왕조의 설계자, 정도전

정종
결코 유약하지 않던 왕, 정종 / 제2차 왕자의 난과 사병 혁파

태종
시대의 악역을 떠맡은 태종 / 조사의의 난 / 함흥차사 / 왕조의 주인은 왕이다 / 명나라와의 외교 정상화 / 폐세자가 된 양녕대군 / 태종의 외척 제거 / 태종의 불교 정책 / 선종과 교종으로 통합된 불교 교단 / 유교와 불교가 같음을 주장한 승려 기화

세종
조선 시대 최고의 인물, 세종 / 집현전 설치 / 4군 6진 개척 / 문화 황금기를 이룩한 세종 조 / 세종 대의 과학기술 / 세종 조의 서적 찬술

문종
어린 아들에게 무거운 짐을 남긴 문종 / 군 통수 체계 완성

단종
쿠데타의 어린 희생자, 단종 / 계유정난으로 정권을 장악한 수양대군 / 이징옥의 난

세조
철권 통치자, 세조 / 사육신과 생육신 / 금성대군의 단종 복위 운동 / 영월에유폐된 노산군 / 이시애의 난 / 불교를 보호했던 세조

예종
펼치지 못한 왕도의 꿈 / 민수의 사옥(史獄) / 남이의 옥

성종
조선 왕조의 체제를 완성한 성종 / 조선의 헌법, 《경국대전》 / 양반과 문치주의 / 연산군의 생모, 폐비 윤씨 / 조선 시대 최초의 수렴청정, 정희왕후 / 향촌 자치제의 발달 / 사림의 성장

연산군
절대왕권을 추구한 임금, 연산군 / 무오사화와 갑자사화

중종
중종이 된 진성대군 / 반정 전야 / 반정 3인방 / 폐비 신씨, 폐위에서 복위까지 / 조광조의 개혁 정치 / 도학 정치의 조건들 / 조광조와 동지들의 정치적 실적 / 도학 정치의 좌절, 기묘사화 / 삼포왜란 / 초법적 기구, 비변사

인종
하늘이 낸 효자, 인종 / 효성스런 임금 / 대윤과 소윤의 굴레 / 아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명종
외척 세력의 틈바구니에 낀 명종 / 외척의 주도권 쟁탈전, 을사사화 / 부활되는 불교 그리고 보우 / 민란 시대의 의적, 임꺽정 / 문정왕후의 죽음과 윤원형의 몰락 / 사림의 본거지, 서원의 출현

선조
사림 시대의 군주, 선조 / 사림 정치 시대의 개막 / 이준경의 유언, 붕당의 예고 / 300년 당쟁의 원류, 동서분당 / 정여립과 기축옥사 / 200년 숙원, 종계변무(宗系辨誣) / 16세기 후반 동아시아의 정세 / 임진왜란 / 분열하는 사림들, 남북 분당 / 북인의 분열, 대북과 소북의 각립 / 사림오현의 문묘종사

광해군
왕이 되기까지 고단했던 여정 / 정인홍의 회퇴변척(晦退辨斥) / 영남의 친북인 세력 / 계속되는 옥사 / 광해군의 등거리 외교 / 대동법 시행

인조
능양군과 서인의 무력 정변 / 이괄의 난 / 효심의 발로인가 정통성 확보인가, 원종 추숭(元宗追崇) / 호서 산림 출현 / 병자호란 / 삼전도 비문 / 강빈 옥사

효종
와신상담의 군주, 효종 / 산당(山黨)과 한당(漢黨)의 대립 / 북벌론

현종
허약한 군주, 현종 / 기해예송 / 갑인예송

숙종
숙종, 14세 유주에서 독단의 군주로 / 송시열의 고묘(告廟) 논란 / 이념의 두 기둥, 송시열과 윤휴 / 이단의 올가미 / 삼복(三福)을 제거하다 / 문묘에 종사된 이이(李珥)와 성혼(成渾) / 숙종의 군권 강화 / 서인의 집권, 경신환국 / 노소 분당의 전주곡 / 남인의 집권, 기사환국 / 남인의 몰락, 갑술환국 / 노론 전제정치의 시작, 병신처분 / 군신간의 밀담, 정유독대

경종
장희빈의 아들, 경종 / 소론의 노론 타도, 신임옥사 / 소론의 득의 시대

영조
요순 임금처럼 어진 군주 / 무신란 / 왕권을 위한 탕평 정치 / 거듭되는 충역의 번복, 정미환국 / 절반은 충, 절반은 역, 기유처분 / 신임옥사에 대한 조치, 경신처분 / 정통성을 인정받은 영조, 신유대훈 / 사림 정치의 위기 / 비운의 사도세자 / 조선의 르네상스, 실학 / 성호학파의 실학 / 실학을 집대성한 정약용 / 청나라를 배우자, 북학 / 균역법 시행
정조
호학 군주, 정조 / 탕평의 재시도 / 홍국영의 세도정치 / 규장각 제도의 창설과 기능 강화 / 영남 만인소 / 정조의 왕권 강화

순조
어린 군주, 순조 / 정순왕후의 수렴청정 / 신분제의 붕괴 / 천주교 박해 / 벽파의 정치적 몰락 / 안동 김씨의 세도 / 효명세자의 대리청정 / 홍경래의 난

헌종
호색의 왕, 헌종 / 풍양 조씨의 세도 / 이양선 출몰 / 천주교 박해의 재연, 기해박해 / 김대건 신부 처형, 병오박해

철종
강화도령, 철종 / 왕위 계승의 변칙, 기유예론 / 동학의 창도자, 최제우 / 삼?의 문란 / 농민 항쟁의 확대 / 이하전(李夏銓)의 옥사 / 암흑천지를 비춘 불빛

고종
시련의 군주, 고종 / 대원군의 10년 세도와 내정 개혁 / 대원군의 쇄국정책 / 조선의 개항 / 위정척사 운동 / 임오군란 / 갑신정변 / 세계사를 바꾼 거문도 사건 / 동학과 농민 봉기 / 갑오경장 / 명성황후 시해 사건 / 상투와 단발령 / 의병 봉기 / 아관파천 / 고종의 환궁 / 대한제국의 탄생 / 「독립신문」과 독립협회 / 독립협회와 독립문 / 대한제국 운명의 갈림길이 된 러일전쟁 / 조약 아닌 조약, 을사늑약 / 돌아오지 않는 밀사

순종
황제 아닌 황제, 순종 / 대한제국 장교 박승환 / 대한국인 안중근 / 반만년 역사의 치욕, 국권피탈

부록
조선 왕실 세계도 / 조선의 국왕 / 조선왕조실록 편찬 일람표 / 조선의 왕릉 / 조선 시대 품계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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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의 차 문화 천년’은 전6권으로 간행될 예정이며, 그 목록은 아래와 같다.
1. 조선 후기의 차 문화 - 시
2. 조선 후기의 차 문화 - 산문
3. 삼국, 고려 시대의 차 문화
4. 조선 전기 및 중기의 차 문화(근간)
5. 조선 후기 및 근대의 차 문화(근간)
6. 승려의 차 문화 (근간)

2009년 6월에 조선 후기의 차 문화를 1, 2권으로 출간했고, 2011년4월 삼국시대,고려시대의 차문화 3권이 출간되었다.  




 

 

 

 

 

 

 

 

 

 

 

한국에 차가 전래된 것은 가야국 시조 김수로왕에게 시집온 인도 공주 허황옥부터라는 설이 있을 만큼 그 유래가 오래되었다. 차와 관련한 오랜 문화적 전통은 한국, 중국,일본을 비롯한 한자 문화권에 공통된 것으로 한자,유교,선종계통의 불교와 함께 동아시아의 문화적 전통을 이해하는 중요한 코드이다. 한국에서의 차문화 곤련 문헌 자료의 정리와 소개는 일부 애호가들의 손에서 개별적으로 이루어져왔기때문에 전문연구자들이 이용하기에는 내용이 소략하고 부정확한 경우가 많았으며 일반인들이 교양으로 접하기에도 힘들었다. 한국의 차 문화 천년’은 한문 고전에 익숙한 전문 연구자들이 관련 문헌을 폭넓게 정리하고 번역했다. 삼국시대로부터 근현대에 이르는 한국의 차 관련 문헌을 시대별로 정리하여 번역함으로써 차 문화 연구의 기초 자료는 물론 일반인들의 한국 차 문화 이해에 기여할 것이다 .  


 차는술, 시와 함께 조선 후기 사대부가의 문화 코드였다. 조선 시대 사대부가에서는 우정의 선물로 술과 함께 차를 선물하곤 했다. 남겨진 시와 산문 기록을 통해 차를 주고받는 다양한 모습들을 확인할 수 있다.

자하 신위는 자신의 생일날 손수 만든 정갈한 솔잎차와 향기로운 계로주를 보내준 것에 대해 감사하는 시를 지었고, 추사 김정희의 아우 김명희는 초의 선사에게 차를 받고 사례하는 시를 지었다.   추사가 초의 선사에게 편지를 보내어 스님의 모습은 보고 싶지 않고 편지도 보고 싶진 않지만 차의 인연만은 끊을 수 없으니 어서 차를 보내달라고 조르는 문장에선 이들만의 돈독한 교유와 멋을 느낄 수 있다.   다산 정약용은 차를 좋아하기로 유명한데 몇 백 년이 지난 지금도 다산초당 앞에는 다조(茶?; 차 부뚜막)가 제자리를 지키고있다. 다산이 승려 혜장에게 보낸 편지에서, 고통이 많은 이 세상 중생을 제도함에 가장 중요한 것은 보시를 베푸는 일이며, 이름난 산의 좋은 차를 몰래 보내주는 것이 가장 상서로운 일이라오. 모쪼록 목마르게 바라고 있음을 생각하고, 은혜 베풀기를 인색하지 말기를 라고 했는데, 이 글 또한 재미있다.

 

 

 

 

 

 

 

    

 

  

이 책은 ‘한국의 차 문화’가 담겨 있는 다양한 옛글을 번역한 것이다.  

조선 후기의 차 문화와 관련한 기록들을 모아 번역하고, 시와 산문으로 나누어 각각 1권과 2권으로 수록하였다. 작품의 수록 순서는 저자의 생년을 기준으로 하였고, 매 작품마다 해설을 두어 작품 분석은 물론, 저술 배경 등을 상세히 밝혔다.   '한국의 차 문화 천년’은 삼국시대부터 조선 후기, 근대에 이르기까지 차에 관한 문헌 기록 자료를 집대성하는 데 목표를 두고 있다. 차시(茶詩)를 포함한 개인 문집의 자료, 『조선왕조실록』, 『고려사』, 『삼국사기』 등의 관찬 사료(官撰史料)와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 『성호사설』(星湖僿說), 『음청사』(陰晴史) 등의 별집류(別集類)를 비롯하여 아직까지 발굴되지 않은 자료까지 차에 관한 모든 문헌 자료를 망라할 계획이다

1권에서는, 임수간에서 시작하여 다산 정약용, 자하 신위, 초의 선사, 추사 김정희, 해거재 홍현주, 신기선에 이르기까지 모두 44명의 차시(茶詩)를 수록하였다. 이 책에서는 조선 후기 차 문화의 구체적 양상을 보여주는 것들을 중심으로, 그 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인물들의 차시를 많이 수록하고자 했다. 

2권에서는, 이익의 '다식'(茶食)에서부터 이덕리의 '기다'(記茶), 서유구의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에 이르기까지 모두 29명의 차에 관한 글과 <승정원일기>, <조선왕조실록>에서 뽑아낸 차에 관한 기록을 담았다. 1, 2권의 권말에 인명사전과 서명사전 항목을 마련하여, 중요하게 거론되는 사람과 책의 경우 설명을 따로 했다  . 

역자

송재소宋載邵 성균관대학교 명예교수
유홍준兪弘濬 전 문화재청장
정해렴丁海廉 현대실학사 대표
조창록曺蒼錄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책임연구원
노승석盧承奭 순천향대학교 이순신연구소 대우교수
이규필李奎泌 한국고전번역원 연구원                    
 

 

 

 

 

 

 

 

 

 

 


 

 삼국시대와 고려 때 창작된 시문(詩文) 중에서 '한국의 차 문화'가 담겨 있는 다양한 옛 글을 엄선하여 번역한 책.   

- 이 책은 삼국시대와 고려의 차 관련 문헌을 엄선, 번역한 것이다.
- 작품의 수록 순서는 저자의 생년을 기준으로 하였다. 단 『동문선』과 『고려사』의 기록은 별도로 장을 마련했는데, 『동문선』에 수록된 시들은 개인 문집이 없는 경우이다.
- 권말에 인명사전과 서명사전 항목을 마련하여, 중요하게 거론되는 사람과 책의 경우 설명을 따로 하였다.
- 가야와 신라, 그리고 고려의 다기(茶器) 유물 사진을 수록하여, 차 문화의 이해를 도왔다

우리나라 차 문화의 시초는 삼국시대로 추정되며, 당시의 문헌은 많이 남아있지 않지만 그 하나하나가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다. 또, 불교가 화려하게 꽃피었던 고려시대에 이르러 그 영향을 받은 차 문화 또한 크게 융성했는데, 이 책에서는 그 두 시기의 기록들을 통해 당시 우리의 생활 속에 깊게 자리하고 있던 차 문화에 대해 들여다본다 

차문화가 발달하게 된 데에는 불교문화의 영향이 매우 컸다. 삼국시대를 이어 고려는 불교가 화려하게 꽃피었던 시기였다. 경남의 화계와 밀양, 전남의 광양과 순천 등 주요한 차의 산지가 대부분 사찰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경내에 따로 다헌(茶軒)을 마련하거나 공양을 위해 인근에 차밭을 가꾸기도 했던 것으로 파악된다. 특히 통도사 인근에는 전문적으로 차를 만들어 바치던 다소촌(茶所村)이라는 마을이 있었다. 통일신라 말기에 세워진 전남 장흥의 보림사에는 아직도 차밭이 남아 있어서, 차 문화와 불교문화의 밀접한 관련을 엿볼 수 있다.

 삼국시대는 사료가 남아 있는 것이 매우 드문데, 가야와 신라의 기록이 주를 이룬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실린 기록들과 최치원의 『고운선생문집』, 『계원필경집』을 1차 자료로 하였다. 고려는 개인의 문집, 그리고 개인 문집 없이 『동문선』에만 실린 작품, 『고려사』 『고려도경』 등을 1차 자료로 하였다.  


  역자 

송재소_성균관대학교 명예교수
정해렴_현대실학사 대표
조창록_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수석연구원
이규필_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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