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쾌함이라 함은..아주 즐겁고 너무 시원하여 화끈한 그런 유쾌함을 말하는 것인데.... 

글항아리에서 나온 책 제목이 ' 통쾌한 동양학' 이라.....흠~~~  

동양의 언어 ·문학 ·역사 ·종교 ·철학 ·학문 ·기예() ·풍속 ·관습 ·미술 ·음악 등 좁은 의미의 문화를 연구하는 학문... 동양학. 그의 기본개념은 충忠, 효孝, 인仁, 의義, 예禮, 지智, 신信, 성誠, 도道  잘 정리된 학문으로서의 동양학에 대한 이미지가 오히려 생활 속에서 작동하는 살아 있는 동양학을 보지 못하게 만드는 경우가 있는데, 이를 해소하자고 말한다. 틀지어진 이론으로서의 동양학이 실제와 따로 가거나 이해가 불가능할 때 대중으로부터 멀어진다.

 책 『통쾌한 동양학』에는 동양학을 알아나가는 과정에서 과거와 현재가 서로 ‘통’했으면 하는 것과, 또 그 과정이 즐거웠으면 하는 바람이 담겨 있다고 한다.    

즐거운 동양학, 통쾌한 앎을 위하여
이 책에서 저자는 연구답사 등으로 동아시아 각국을 활보하며 깊이 흡입한 견문을 동양 고전과 연결시켜가며 논의를 전개시키고, 동아시아 문화의 본질과 그 속에서 한국이 차지하는 위치 등에 대한 고민과 나름대로의 해법도 담았다.이 책은 이것을 크게 네 가지 다른 각도에서 정리했다. 첫째, 생활 속에 남아 있는 전통문화의 긍부정적인 측면을 살피고, 혹 주변에서 갖고 있던 선입견을 해소하려 했다. 둘째, 한국 문화의 저력이 결코 만만치 않음을 전통 가치 속에서 확인하고 재조명했다. 특히 가족주의와 효사상이 갖는 강한 한국적인 힘을 역사적 사실들을 통해 증명해보았다. 셋째, 우리 주변의 잘 알려지지 않았거나 잘못 알려진 역사적인 사실들을 새로운 각도에서 밝혀보았다. 마지막으로 세계 패권국을 꿈꾸는 우리와 이웃한 중국의 야망을 되짚어보고, 동아시아 시대에 우리가 어떤 채비를 갖춰야 할지 문화적으로 점검해보았다.  

동양 고전의 눈으로 오늘의 현실을 읽어내다의 의미답게 책의 내용이 알찼으면 싶다..기대한다. 

 


난 그가 그냥 좋다~ 그 사람의 말을 듣고있자면 유쾌하고, 통쾌하고, 상쾌하다. 

개인적으로 그를 알지 못해도, 그래도 TV에서 보는 모습이 그 사람 자체의 진짜 모습일것같다는 신뢰를 주는 내 마음속 1순위이다.. 

그냥 끊임없이 응원하고 격려하고 싶은이의 책이 나왔다..그럼 당장봐야지.. 

따뜻한 웃음과 건전한 세계관으로 서민들의 마음을 어루만져온 소통과 소신의 국민 MC 김제동의 첫 책.  

2010년 2월부터 그가 경향신문에 연재하고 있는 「김제동의 똑똑똑」 인터뷰를 엮어냈다. 책에는 소설가 이외수, KBS 전 사장 정연주, 시인 김용택, 제주 해녀 고미자 등, 김제동이 만나온 각계각층 명사들의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다. 늘 '여러분이 옳습니다.'라며 자신의 이야기를 맺는 그는 이 책을 통해 자신을 낮추고 여리게 다가감으로써 만날 수 있었던 그들의 진짜 모습을 전해준다.

김제동은 스스로를 '좌파도 우파도 아닌 기분파'라 칭하며 웃음을 주는 연예인으로서의 본분을 강조한다. 이는 정치적 편향성이 아니라 진실을 올바로 비추는 데 자신의 웃음을 사용하고 싶다는 그의 가치관을 그대로 드러낸다. 날카로운 눈으로 오늘의 우리를 바라보는 그들의 대담은 불필요한 껍데기 없이 현실을 들여다보게 하면서도, 그 저변에 깔린 따뜻함으로 절망과 아픔보다는 희망과 치유의 메시지를 전한다.

그가 만난 25인의 인물은 이 시대 대한민국의 뜨거운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각 분야에서 소통과 상생의 길을 찾고자 노력하는 인물들과의 솔직 담백한 대화는 김제동 특유의 풍자, 본질을 향한 촌철살인의 멘트가 더해져 흥미와 각성을 일깨운다. 독자들은 자신의 분야에서 당당하고 분명하게 자신의 목소리를 전해주는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 교감하며, 공생하는 사회와 개인의 삶에 대해 각자의 화두를 던져볼 수 있을 것이다.   

목차를 보니 아니다 싶은 사람도 있다는 생각도 하지만..그건 니 생각이고~~

1. 이외수(소설가) - 연예인이건 작가건 시대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거 아닌가?
2. 정연주(KBS 전사장) - 지금의 힘든 경험은 미래를 위한 축복일 겁니다
3. 김용택(시인) - 내 아이 귀하면, 다른 아이 귀한 줄도 알아야죠
4. 고미자(제주 해녀) - 어머니 제주를 그대로 살려두세요
5. 엄홍길(산악인) - 산이 놓아주질 않네요. 산에 보답하며 살래요
6. 박원순(변호사) - 역사의 바른 편에 서 있는 지금 제 자리가 좋아요
7. 정재승(과학자) - 공동체 이익을 대변하라고 지식인에게 권력을 준 거 아닌가요?
8. 홍명보(올림픽축구대표감독) - 수비수처럼 제일 뒤에서 경기장을 지켜주고 싶어요
9. 고현정(배우) - 연예인은 광대, 대중은 귀족이지
10. 강우석(영화감독) - 조롱, 풍자, 공감이 어우러져야 인간적인 영화죠
11. 이정희(민노당 대표) - 진보가 분열됐다고요? 그래도 포기하지 않을래요
12. 김C(가수) - 아티스트로서의 자뻑이 나를 강하게 만들었지
13. 남경필(한나라당 의원) - 군대 가고, 세금 내고, 법치를 해야 진짜 보수죠
14. 안희정(충남도지사) - 이제 국민들은 다 알아요. 어떤 대통령이 좋은 건지
15. 양준혁(야구선수) - 땅볼이라고 뛰다 말고 돌아오는 거, 난 인정 못해!
16. 설경구(배우) - 작품 속 인물이 찌꺼기처럼 남아서 늘 괴롭혀
17. 조정래(소설가) - 대기업이 잘돼야 잘산다는 건 잘못된 교리입니다
18. 황정민(배우) - 예술은 밑바닥 비주류의 힘으로 진보하는 거라구
19. 정호승(시인) - 인간에 대한 믿음을 버리면 안 돼요
20. 소녀시대 수영(가수) - 스물두 살 철부지이고 싶은데, 세상이 용납하지 않아요
21. 최일구(MBC 앵커) - 문턱을 낮춰 사람들을 끌어안는 뉴스를 전하고 싶어요
22. 문용식(나우콤 대표) - 상식적으로 얘기하는 게 좌빨이라면, 좌빨하고 말죠
23. 유인촌(문화체육관광부 장관) - 예술은 거리로 나오기 전에 어두운 곳부터 밝혀야죠
24. 나영석(KBS ‘1박2일’ PD) - 거칠고 투박한 감성 포장하지 않을래요
25. 신영복(성공회대 석좌교수) - 길은 누가 여는 게 아니라 여럿이 함께 가야 생겨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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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반사(茶飯事) 다반사의 사전적 정의는 '차를 마시고 밥을 먹는 일이라는 뜻이다, 보통있는 예사로운 말을 이르는 말이다 

“항상 먹는 차(茶)와 밥(飯)처럼 ‘늘 있어 이상할 것이 없는 예사로운 일’을 비유하는 말" 일테다.  

신라와 고려때 널리 애용됐던 차는 조선에 들어서면부터 잊혀진다. 잊혀지던 차문화는 18세기로 들어서며 다시 되살아났고  

다산 정약용과 그의 제자 초의선사, 그리고 추사 김정희에 의해 그 진가가 발휘된다..

다산이 18년 동안의 귀양살이가 풀려 고향으로 돌아가게 된 1818년 8월 그믐날 강진에서 양성한 18명의 제자들과 계를 만들고 약조한 ‘다신계(茶信契) 절목’에도 차를 채취하고 만드는 내용이 나온다. 추사 김정희의 아우 김명희는 1850년쯤 초의 선사에게서 차를 선물 받고 사례로 쓴 시에서 자신이 평소 차를 즐기지 않아 학질에 걸렸으며, 중국에서 들여온 차에 비해 초의 스님이 보내준 우전차는 거의 바라밀의 경지라고 읊고 있다.    

다산정약용 과 추사 김정희는 워낙 알려진 분이고 초의선사에 대해 자세히 보자. 

 '초의선사(草衣禪師 1786-1866)'는 조선 후기의 대선사로서 우리나라 다도를 중흥시킨 분이다. 그래서 '다성(茶聖)'이라 부른다
다산 정약용(1762∼1836)에게서는 유학()과 시문()을 배우고, 소치 허련(1809∼1892), 그리고 평생의 친구되는 추사 김정희(1786∼1856) 등과 폭넓은 교유를 가졌다. 

그는 수행생활과 함께 차()에 대한 조예가 깊었다.  초의선사의 사상은 선(禪)사상과 다선일미(茶禪一味)사상으로 집약되는데 특히, 그의 다선일미 사상은 차를 마시되 법희선열(法喜禪悅)을 맛본다는 것이다. 즉, 차(茶) 안에 부처님의 진리[法]와 명상[禪]의 기쁨이 다 녹아있다는 것이다. 이 사상을 펼치면서 숭유억불 정책으로 불교탄압과 함께 쇠퇴한 다도문화를 다시 역사속으로 끌어들였다.   

초의선사는 차에 대한 저술도 활발하게 하였다. 

 한국의 다경(茶經)이라할수있는 동다송(東茶頌)을 저술하였다.  동다송은 초의선사가 차를 알고자 해서 묻는 해거도인 홍현주(海居道人 洪顯周)에게 지어서 보낸 차의 전문서이다,   동다송의 대의(大意)를 요약해 보면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가 있는데, 첫째로 차는 인간에게 너무나도 좋은 약과 같은 것이니 차를 마시도록 해라. 둘째로 우리나라 차는 중국차에 비교해서 약효나 맛에 있어서 결코 뒤지지 않는다. 육안차(六安茶)의 맛이나 몽산차(蒙山茶)의 약효를 함께 겸비하고 있다. 셋째로 차에는 현묘(玄妙)하고 지극(至極)한 경지가 있어 다도(茶道)라고 한다는 것이다.

1828년 지리산 칠불암에 머물면서 지은 차서()인 《다신전()》이 있다. 다신전의 내용은 찻잎따기, 차만들기, 차의 식별법, 차의 보관, 물을 끓이는 법, 차를 끓이는 법, 차를 마시는 법, 차의 향기, 차의 색 등 20여 가지 목차로 상세하게 다룬 책이다.
 

 

 

 

 



'새로 쓰는 조선의 차 문화'  

"차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었다"라고 말하는 저자 정민 한양대교수는 차에 빠져들게 된 계기를 2006년, 18세기 말의 국내 최초의 다서(茶書)인 '동다기'의 필사본을 발견하면서부터라고 밝힌다. 

동다기(東茶頌)’는 초의선사가 1837년 지은 차 예찬론인 ‘동다송(東茶頌)’에 그 내용이 일부 인용되고, 저자가 다산 정약용이라고만 알려졌을 뿐 그 실체가 확인되지 않았다.
그러나 필사본을 조사한 결과 동다기의 원래 제목은 기다(記茶)이며, 저자는 학계에 알려졌던 다산 정약용이 아니라 당대 무관 이덕리(1728~?)가 1785년을 전후한 진도 유배 시절 쓴 것으로 드러났고. 가장 대표적인 전통차 전문서로 꼽혔던 초의 선사의 〈동다송〉보다 발간 연대가 50년  앞선다. 

이덕리는 ‘기다’에서 차의 효능을 자세히 설명하고, 차 사업을 국가가 직접 관리함으로써 수출을 통해 얻은 수익을 국방 강화에 활용해야 한다는 등을 강조하고 있다.

 

 

몸이 허약했던 다산은 만덕산 백련사에 놀러갔다가 주변에 야생 차가 많이 자라는 것을 보고 승려들에게 차 만드는 법을 알려줬고 이후 다산의 제다법은 다른 사찰의 승려들에게 퍼져나가게 됐다. 

스물네 살 때 당시 마흔여덟이던 다산을 찾아가 차를 배운 초의는 장시 '동다송'을 통해 차의 역사와 우리 차의 효용, 그리고 차를 마시는 절차와 방법까지 일목요연하게 정리했다. 

'전다박사(煎茶博士)'로 불린 초의의 존재를 더욱 빛낸 것은 바로 추사 김정희. 초의차를 접하고 단번에 매료된 추사는 초의에게 수차례 편지를 보내 '반 협박'에 가까울 정도로 차를 얻는 데 몰두했다.   

실학파의 거두 정약용, 명문대가 출신의 유림 김정희, 그리고 초의선사....다산 정약용과 다성 초의선사의 나이 차를 뛰어넘는 학문적 친분,  추사 김정희와 초의선사의 오랜 교우관계 .... 

이들의 활발한 교류속에서는 수많은 일화와 수많은 덕담이 있다.    

다산을 스승으로 모시며 유학과 시학을 배운 초의는 “하늘이 맹자 어머니 같은 이웃을 내려주셨다”고 칭송할 만큼 다산을 존경했다. 실학에 열중하던 다산도 사제관계를 떠나 선과 다도에 몰두하는 초의의 구도자적 자세를 존경했다다산 연구가 차벽이 쓴 다산의 후반생에 보면 초의는 다산초당에서 1810년에서 1815년 사이에 길게는 6개월 동안 함께 생활하며 배웠다. 다산은 초의를 위해 시를 지었다. 


"축 늘어진 초의와

풀어헤친 민둥 머리에,

너의 중 껍데기 벗겨 버리고

너의 유자의 뼈 드러내었다.

묵은 거울 이미 갈고 닦았고

새 도끼는 무디지 않아서,

이미 밝게 깨치었으나

이것은 곧 제이월(第二月 두 번째 달. 즉 무의미함을 뜻함)이로세"

['경인년 제석에 여러 벗들과 함께 운자를 각자 정하여 짓다' 중 다섯 번째 시 '초의선(草衣禪 ) 



 초의선사는 해마다 봄이면 정성 들여 해남 대둔사 일지암에서 차를 만들어 추사에게 보냈다. 추사는 차가 떨어지면 글을 지어 초의선사에게 차를 채근했다. 추사가 제주도에 유배되자 초의선사는 유배지까지 찾아가 함께 차나무를 심고 차를 만들고 교분을 나누었다. 힘든 친구를 찾아가 말로 위로하는 대신 차나무를 같이 심는 이 모습은 감동이다. 이 시기 추사 김정희가 초의선사와 함께 생활하며 써 준 시를 보면 그들의 각별하고 돈독한 사이를 알수있다. 
 

스님은 멋대로 마냥 웃고 있으소
마음에 걸림돌 없는 곳이 바로 우리 사는 데라오.
사람 옆의 산새는 부질없이 지저귀다 말다하고
손님 맞은 시내구름, 스스로 더웠다 시원했다 하네.
한 침상에서 다른 꿈 없는 것이 좋기만 한데
같은 음식 먹으면서 다른 속내 있겠는가. <초의에게 주다 贈草衣>

 더구나 추사 김정희는 선과 차가 둘이 아니라는 초의선사의 선다일여(禪茶一如)사상을 깨닫고 그 유명한 명선(茗禪)이라는 글을 선물한다. 명선(茗禪)에서 명(茗)은 다(茶)와 같은 뜻이며 의미로는 선다일여(禪茶一如), 다선일미(茶禪一味)와 같은 뜻이다. 초의선사는 추사가 먼저 세상을 떠나자 뇌소(雷笑)와 설유(雪乳)라는 차를 달여 한잔 마시자며 슬피 눈물을 적셨다. 뒤늦게 부음을 접하고는 <그윽한 길을 꽃바람이 쓸어 가는데 외로운 달만 어둡다>고 한탄했다고 한다.


 

 

 이덕리가 쓴 것으로 밝혀진 '동다기'와 이보다 30년 앞선 1755년 지어진 이운해의 '부풍향차보'를 토대로 우선 조선 차 문화 중흥의 시작과 다산과 초의, 추사의 차 사랑을 각종 문헌을 토대로 살펴본 정민 한양대교수,.  

난 이책에 기대하는 바가 크다..  

 

**돌베개의 한국의 차문화천년 시리즈와 함께 볼 꺼다..복터졌다..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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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후기 영조시대 역관 출신 문인 이언진(1740∼1766)

 저항과 아만’ ‘골목길 나의 집’은 연암 박지원의 ‘우상전’을 통해 존재가 알려진 천재 시인 이언진과 그의 작품 ‘호동거실’을 다룬 책이다.  

골목길 나의집은 이언진과 그의 시집 호동거실'을 소개하기 위해 전체를 완역하고 매수마다 작품 감상 및 짧은 평 위주로 수록했다

저항과아만은 '호동거실'의 평설(評說)이다. 전체의 특징과 가치를 논하고 아울러 연암 박지원과 대별되는 새로운 유형의 이단아 이언진을 철저히 분석했다.

 박희병 서울대 국문학과 교수는 “신분차별이 당연시됐던 조선시대에 근대적 사상인 인간의 자유와 평등, 다원적 가치와 인간의 자율성을 논한 선구적 인물이다. 26년의 짧은 생을 살다 갔지만 평생 글쓰기로 사회적 억압과 싸운 치열한 저항가였다" 라고 하며 일반인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이언진에 관한 책을 잇달아 낸 것은 지식인으로서 글쓰기로 사회의 부조리에 끝까지 저항했던 치열함에 끌렸기 때문이다.라고 밝혔다.

 

  

 

 박희병교수의  '이언진 3부작'의 마지막 이언진 평전 

  저항과 아만’ ‘골목길 나의 집’만으로는 그의 진면목을 알기는 쉽지않았다.,  그래서 박희병교수의 이언진에 대한 각별한 애정과 쏟은 공력을 실감할수있는 이언진 평전이 반가운 이유다.'호동거실'을 기본 자료로 하고, 연암 박지원이 쓴 전기 '우상전(虞裳傳)', 이언진이 조선통신사 수행 역관으로 일본에 갔을 때 일본 유학자들과 나눈 필담집 '앙앙여향(怏怏餘響)'과 '양호여화(兩好餘話)' 등을 정세하게 들여다봤다

 

 

 

 “나는 늘 우상을 한 번도 만나보지 못했음을 늘 한스럽게 생각했다. 또한 그의 문장들은 이미 불살라 버려서 남은 것이 없으니 세상에서 그를 알아주는 자가 없을 것이다. 이에 상자 속에 간직했던 것들을 털어 내어 전에 그가 내게 보내왔던 시 몇 편을 발견하고 이것을 빠짐 없이 써서 ‘우상전’을 꾸민다.” 

 연암은 이언진의 사망 소식을 듣고 그의 전기를 썼는데, 「우상전」이 바로 그것이다.  

 이언진은 스무 살 때 한학(중국어)으로 역과(譯科)에 합격한 역관이자 천재적인 문인이었다. 영조39년(1763) 그는 조선통신사의 일원으로  일본에 가면서 지은 ‘바다를 구경하다’(해람편)와 일본사람들에게 지어 준 뛰어난 시로 역관의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조선과 일본에서 동시에 이름을 얻었다.  우상은 여러 번 연암에게 시를 보내온 적이 있었다. 그때마다 연암은 시를 전하는 사람에게 농담으로 그의 시를 보잘 것 없다고 했는데, 그러한 우상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연암은 우상전을 지었다. 

<<우상전>>은 조선후기 대문호 연암 박지원의 한문단편 ≪연암집 燕巖集≫권8 별집(別集) <방경각외전>에 실려 있다.   

이언진은 역관으로 조선시대 일본으로 보낸 외교사절단인 조선통신사의 일원으로  일본을 다녀온 뒤 스물여섯의 짧은 삶을 마감했다. 조선에선 무명이었지만 일본에서는 문명을 떨쳤다. 그와 필담을 나눈 일본 지식인들은 자신들의 저서에 이언진과 나눈 대화를 기록했다. 그에 대해 일본인들은 “참된 재사”라 평했다

 통신사는 막부의 수장인 쇼군이 교체될 때마다 일본을 방문하여 양국의 친선 증진에 기여했다. 통신사 행렬은 대마도를 거쳐 에도(동경)까지 가는 동안 일본 백성들로부터 성대한 환영을 받았다.
통신사의 파견 목적은 임진왜란 이전에는 왜구의 칩입금지 요청이 주가 되었다. 그후 일본과의 전쟁상태 종결을 위한 강화와 수호체결, 포로인 쇄환, 대마번의 견제 및 일본국정 탐색, 막부장군의 습직(襲職) 축하 등 매우 다양하였다. 한편 일본에서 조선으로 파견된 일본국왕사는 주로 경제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그들은 동(銅)을 가져와 생필품인 쌀, 콩, 면포(綿布) 등을 가져갔다. 통신사 일행이 통과하는 객사에서는 한시문·학술의 필담창화라고 하는 문화상의 교류가 이루어졌으며 학술·사상·기술·예술 등을 전하기도 하였다.  지금 한류의 원조격인듯싶다.

짧은 생을 산 데다 병으로 죽기 전 자신의 글을 다 태우는 바람에 그는 후대에 잘 알려지지 않았다.  남긴 작품이라곤 170수의 연작시 '호동거실' 정도밖에 없는, 스물여섯 살에 요절한 이언진은 도대체 어떤 사람인가?.

 그런데도 그의 이름이 워낙 알려졌기에, 여섯명이나 되는 작가가 그의 전기를 지었다. 그 가운데 그를 만나본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그가 남긴 시와 전해들은 이야기만 가지고 암중모색하며 그의 모습을 재구성해낸 것이다. 

<< "파리한 모습에 손가락이 길었다."   "총기가 세상에 뛰어나, 한 번 보면 잊지 않았다”   "책 읽기를 좋아하여 먹고 자는 것까지 잊었다. 다른 사람에게 귀중한 책을 빌리면 소매에 넣어가지고 돌아오면서, 집에 올 때까지 기다리지 못해 길 위에서 펼쳐 보며 바삐 걸어오다가 사람이나 말과 부딪치는 것도 알지 못했다">>라고 그들은 이언진을 평했다 

나는 남들이 하는 것은 따라하지 않는다"는 철학을 고수한 혜환 이용휴(李用休.1708-1782)의 제자인 이언진.  

그래서 이언진은 스승의 가르침대로  개성적인 시인이 된것일까?

이언진의 스승 이용휴는  18세기 연암 박지원과쌍벽을 이룬 문단의 거장이다.  

조선 영조 때의 실학자. 실학파의 중심인물인 성호() 이익()의 조카이자 노긍, 심익운과 함께 조선 후기의 3대 천재로 불린 실학의 대가 18세기 대표적 문인인  금대 이가환(李家煥.1742-1801) )의 아버지로 성호학파의 대표적 문인이다.  

창강 김택영과 다산 정약용은 각각 《소호당문집》권2와《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권15에서 그의 문학활동을 높이 평가하였다. 주요 작품에 《혜환잡저》,《혜환시집》등이 있다 
  

남인계 문인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을 뿐만 아니라 이언진.이단전과 같은 걸출한 여항시인들을 제자로 거느리기도 했다 

천민 시인 이단전 < 1781년 어느 봄날 못생긴 청년 하나가 재야 문단의 권력을 한 손아귀에 쥐고 있던 73세의 대작가 이용휴를 찾아왔다. 그 청년은 소매자락에 넣고 온 시집을 노인에게 건넸다. 노인은 천천히 시집을 훑어보고는 좋다 나쁘다 말도 없이 곁에 있던 벽도화(碧挑花) 가지 하나를 꺾어 청년에게 주었다. 청년은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부처가 빙그레 웃으며 제자 가섭에게 꽃을 주어 그를 인정한 염화시중(拈華示衆)이 떠올랐기 대문이다. '내 너를 훌륭한 시인으로 인정하겠노라.'라는 마음이 벽도화 한 가지로 표현된 것이다. 이용휴로부터 상찬을 받은 청년이 바로 이단전이었다> 


**함께 읽으면 좋은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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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다. 먹은 누룩이 아니고, 책에는 술그릇이 담겨 있지 않는데 글이 어찌 나를 취하게 할 수 있는가. 장차 장독 덮개가 되고 말 것이 아닌가. 그런데 글을 읽고 또 다시 읽어, 읽기를 사흘 동안 오래 했더니, 꽃이 눈에서 생겨나고 향기가 입에서 풍겨 나와 위장 속에 있는 비릿한 피를 밝게 하고, 마음속의 쌓인 때를 씻어내어 사람으로 하여금 정신을 즐겁게 하고 몸을 편안하게 하여, 자신도 모르게 무하유지향(無何有之鄕)에 들어가게 한다.  

- 문무자 이옥(李鈺, 1760~1815)의 묵취향서 -

 "나는 요즘세상의 사람이다. 내 스스로 나의 시, 나의 문장을 짓는데 선진양한(先秦兩漢)과 무슨 관계가 있으며, 위진삼당(魏晉三唐)에 무어 얽매일 필요가있는가”라고 자부하던 문무자 이옥(李鈺, 1760~1815). 그는 새로운 글쓰기로 정조에게 맞섰다.   

  18세기는 천재의 세기라 불린다. 18~19세기 조선 문단에서 불었던 장르적 열풍이 있었다. 개성이 풍부한 작가들이 숲의 나무처럼 많은 18세기 후반의 문단에서 최고의 지성 박지원과 북학파들, 정약용 그리고 김려나 이옥이 이러한 새로운 물결의 주인이었다. 이 천재들이 일으킨 새로운 글쓰기가 산문 즉, 소품문(小品文)이다.소품문은 말 그대로 짧은 글, 자투리 글 성격의 현대적 장르로 말하면 에세이다.  과거답안 같은  문장이 아니라, 소품에다가 현재의 조선의 사회 문제를 담기 시작했다.

 소품문에는 문학의 소재로 잘 다루어지지 않던 많은 것들이 소품문에서 즐겨 다루어졌다.  혜택받은 존재가 아닌 소외된 인간들, 미천한 인간으로서 여성과 중인 평민들 그리고 어린이의 생활모습의 일상들,  담배와 물고기, 새와 바둑, 음식과 화훼 같은 기호품을 문학의 소재로서 당당하게 문학의 영역으로 끌어들였다.한문산문에 비해 자유롭고, 내용 또한 계몽적이고 교훈적인 데서 벗어나 자신의 마음을 따라가는 내면의 흐름을 보여준다. 소품 문학의 문체는 연암 박지원의 허생전, 양반전, 호질 등을 떠올리면 된다. 소재의 폭이 넓으며 자신의 내면을 스스럼없이 표현하여 자기 색깔의 개성이 드러난다. .

소품문이 크게 유행하자 문체의 변화가 체제의 안정성에 위협이 될지도 모르겠다고 판단한 정조는 문체를 지난날의 모범적인 상태로 되돌리려 1792년 당시 유행하던 소품(小品), 소설 등의 문체가 정통적 고문을 어지럽히는 잡문체라 하여 문체반정(文體反正)을 일으킨다
 

이옥이 성균관 유생으로 있던 1792년 국왕 정조가 출제한 과거시험에 소품체 과문을 제출,  정조 임금으로부터 불경스럽고 괴이한 문체를 고치라는 하명을 받기도 하고 매일 10편씩 열흘 동안 시를 지어 바치라는 과제를 주기도 하고, 과거 응시 자격을 박탈해 보기도 하고, 경상도 삼가현(三嘉縣ㆍ지금의 경남 합천지역)에서 충군(充軍ㆍ범죄자에게 내리는 군역)하는 엄벌을 내리기도 했지만 이옥은 자신의 글쓰기를 고집하며, 그의 뜻을 굽히지 않은 것으로 유명하다.이른바 '문체반정(文體反正)'의 시범케이스다. 이런 정조의 생각은 박지원, 남공철, 김조순 등 당대 일류급 문사들도 곤욕에 빠뜨렸다.  

정조는 소품 문학을 억압하는 ‘문체반정’을 시행하면서 신분과 처지에 따라 문책을 달리했다. 남공철과 같은 주요 집안의 자제는 직접 불러서 엄하게 훈계하고 문체를 고치게 했다. 박지원의 경우에는 남공철을 통해 ‘문체를 고치면 홍문관과 같은 청화한 관직을 주마.’라며 당근 정책을 썼다. 그런데 이옥처럼 양반이기는 하지만 한미한 무반계 출신에게는 가차없는 처벌을 내려 시범케이스로 삼았다.

이옥은 문체로 인하여 관직 진출이 막혀버렸지만, 그의 문체를 고치지 않았고 신념을 지켰으며 이후 문학 창작에 몰두하게 된다. 자기만의 개성적인 문체와 내용을 고집함으로써 군주로부터 견책을 당할 만큼 독특한 창작 활동을 보였다. 그러한 그만의 창작 방식으로 인하여 그의 작품들은 조선시대 그가 살아온 시대를 바라보는 색다른 시각을 후대에 남겨주고 있다.


 

 

 

 

 

 

 

 

 

  이옥은 개인 문집도 없는 데다 묘지나 행장을 발견할 수 없어 그 생애는 매우 불분명하다

이번에 나온 전집은 성균관 시절부터 절친했던 벗 김려가 나중에 그의 글을 수습해 ‘담정총서’로 한데 모은 것이 주요한 근거가 됐다.이밖에도 여러 문집에 분산되어 있던 그의 글을 모아 한글로 옮긴 '완역 이옥 전집'(전 5권·휴머니스트)은 실로 이옥 사후 200년 만의 일이다. 

오랫동안 한문 고전을 정독해온 실시학사 고전문학연구회에서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이옥의 글들을 전부 모아 장르별, 작품별로 새롭게 배열하고 교감,교열을 거친후, 세 권의 번역문으로 엮었으며 자료편으로는 원문과 영인본 각각 1권씩으로엮었다.  

 

 

 

안대회교수의 고전산문산책.. 을 읽고 이옥의 글을 더 많이 읽어보고 싶다라는 생각이 들어 이옥 전집을 구입, 읽게 되었다. 

<고전 산문 산책>의 저자 안대회교수는 지난 10년 동안 조선 후기 소품문을 연구하고 소개하는 일을 꾸준히 진행해왔다. 그 10년의 성과를 담아내다 보니 772쪽이라는 두툼한 책이 되었다. 안대회는 정민 과 더불어 한문학을 일반 독자에게 널리 보급한 소중한 학자이다.
그는 18세기 한국 문학을 주로 연구해오면서 소품문이 중요한 문학사적 현상임에도 무관심의 영역에 방치된 것을 문제로 여기고, 작가를 발굴하고 작품을 해석하며 가치를 부여하는 작업을 해왔다. 그는 18~19세기 소품문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조선 후기 문화의 색다른 모습을 많이 찾을 수 있었다고 한다. 소품문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 현상을 이해하는 것은 조선 후기 문화와 문학의 다양한 현상을 해명하는데 크게 기여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이책은 조선 후기 천재 작가 23명의 고전산문 160여 편을 담았다. 이 책에서 주목한 작가는 17세기 초반에는 허균이 있고, 18세기에는 이용휴, 심익운, 박지원, 노긍, 이덕무, 이가환, 유득공, 박제가, 이서구, 유만주, 이옥, 남공철이 있으며, 19세기에는 김려, 강이천, 심로숭, 정약용, 유본학, 장혼, 이학규, 남종현, 홍길주, 조희룡  같은 작가를 새롭게 조명한 것이 특징. 낡은 문체보다는 새로운 문체를, 전형적인 것보다는 변화를 추구한 글을, 관념적이기보다는 현실적인 글을, 이념적이기보다는 정서적인 글을, 규범적이기보다는 실험적인 글들을 가려 담았다. 

01 허 균 ― 개성 충만한 사회비판
02 이용휴 ― 일침견혈(一針見血)의 산문
03 심익운 ― 좌절한 영혼의 독설
04 박지원 ― 눈이 번쩍 뜨이는 문장
05 노 긍 ― 냉소와 자의식의 산문
06 이덕무 ― 섬세한 감성 치밀한 묘사
07 이가환 ― 지사의 비애와 결벽의 정서
08 유득공 ― 벽(癖)에 빠진 사람들
09 박제가 ― 강개한 정서와 예리한 시각
10 이서구 ― 언어 밖으로 넘쳐난 사상과 감정
11 유만주 ― 결함 세계의 품격
12 이 옥 ― 저잣거리의 이야기꾼
13 남공철 ― 소외와 일탈의 인생
14 김 려 ― 상처받은 인생 불편한 심기
15 강이천 ― 무명의 불량선비
16 심로숭 ― 살아남은 자의 슬픔
17 정약용 ― 마음의 열망
18 유본학 ― 고담한 산문미학
19 장 혼 ― 여항 문단의 편집자
20 이학규 ― 비탄과 인고의 정서
21 남종현 ― 가난한 서생의 고단한 삶
22 홍길주 ― 천하의 지극한 문장
23 조희룡 ― 유쾌함과 위트의 문장 

 

** 위 글들은 이옥전집, 고전산문산책을 읽거나 출판사 책소개등의  내용중에서 발췌하여 정리한 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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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항아리 출판사의 '나무가 민중이다'를 주말동안 후르르륵 읽었다.  

글항아리’는 연암 박지원이 조각글을 쓰면 항아리에 던져두었는데 그것이 나중에 책이 되었다는 이야기의 의미가 덧붙여진 명명이라 하니, 인문서를 내는 출판사 이름으로는 맞춤인듯 싶다. 

출판되는 책마다 나의 독서욕구를 마구마구 자극하니 감사할따름이다.. 

  

고주환의 '나무가 민중이다.' 

이 책은 나무와 풀을 통해 민초들의 삶을 기록했다. 

나무는 1. tree   2. wood   3. firewood  세가지 뜻으로 이야기할수있고, 

풀은  grass이고 

민초는 grass roots, ‘백성’을 질긴 생명력을 가진 잡초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그 대상, 그 내용의 독특함 자랑하고 구성지고 재미난 구전기록과 

사이비어원연구자(?)답게 독특한 해석도 눈길을 끈다.

이책에서 다루고 있는 대상은 민초의 생활과 가까웠던 풀과 나무이다.   


갈포옷에 갈건쓰고 칡넝쿨로 갈혜삼아 신고 칡떡에, 칡국수 해먹고 죽으면 칡넝쿨로 묶어 칡캐낸 자리에 묻기까지 칡하나로 완성되는 민초삶의 끄나풀 칡,  불쏘시개부터 왕궁의 기둥까지 삶의 동반자 소나무,  국수말아먹고 약재로 쓰는 느릅나무, 호패, 다듬잇방망이.떡메에 행운을 가져다 준다는 의미로 도장,부적을 만든데 썼던 대추나무 등의 우리 민족의 나무들과,  밝힐수록 무성해지는 질경이, 아무데서나 자라 이땅의 민초와 동고동락한 쑥,절개와 모험의 민초 민들레 같은 풀 그리고  등이 휠 것 같은 삶의 무게인 ‘지게’와 머리에 돌을 이고 찧던 어머니의 ‘디딜방아,신의 영역에 대한 중매자 신목같은 죽은식물도 다룬다.  

그리고 부모님의 삶 특히, 농사꾼이자 목수 아버지의 이야기는 이책의 주요 에피소드이며,   어머니나 주변 어른들로부터 얻은 풀과나무의 생활상식과 민담을 이야기하고,  유년시절 나무는 놀이기구이고, 풀은 채소였던  저자의 경험으로 부터 얻은 것들과  본인의 삶도 추억한다. 기억력이 놀라울 뿐이다.  

 나무와 풀과 관련된 구성지고 때로는 재미도 있는 구전 기록들을 들려주며. ‘사이비 어원연구자’를 자처한 저자답게  철저히 ‘민초적’ 관점을 견지한 채 나무나 풀 이름의 기원을 이야기한다.  세간에 잘못 알려져 있거나 설이 분분한 것들에 대해서는 직접 고증에 나서거나 연원을 정리했다 

책을 읽고 일요일 무작정 식구들을 이끌고  천태산을 등산했다..영국사까지 올라갈 요량으로...  

천태산은 충북 영동과 충남 금산에 걸쳐 있다. 해발 715m에 불과하지만 기암괴석과 노송들이 어우러진 경치는 과히 감탄할만하다. ‘ 1361년 개경을 침공 당한 공민왕은 피란 길에서 맑은 범종소리에 이끌려 국청사(國淸寺)에 머무르게 된다. 왕과 공주는 국태민안을 염원하는 백일기도에 들어갔고 마지막 날 왕비는 꿈에 원각국사를 만나 ‘오랑캐가 물러갈 것’이라는 응답을 받게 된다. 용기를 얻은 고려 군사들은 한파와 폭설을 이용해 기습 공격을 펼쳐 오랑캐를 몰아냈다.  공민왕은 환궁하자마자 국청사 부처님의 가호를 입어 ‘나라가 평안’하게 되었다며 절 이름을 영국사(寧國寺)로 바꾸게 했다. 

삼신바위를 지나 삼단폭포를 보고 은행나무를 지나 원각국사비까지....

책을 읽고 가서 그런지 나무하나 풀하나가 예사로 안보이더라..  뚜렷한 소득은 없지만 나도 민초이기에....  

직찍 사진들과 천태산 영국사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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