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김진명'하면 제일 먼저 생각나는 소설은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그때 기억으로 정말 이 소설의 인기는 대단했다. 이 소설을 안 읽고는 이야기가 잘 안될정도로 인기가 많아었던걸로 기억한다.

극단적인 민족주의, 과도하고 거친 상상력의 작가라는 꼬리표가 붙어있다는 작가..  김진명

난 흥미롭다. 그의 소설들이 기존 통념을 뒤집는 역사해석과 인물에 대한 평가가 과감하고 밀어부치는 내용의 박진감있는 속도감에 난 만족한다. 대한민국의 역사소설계에 큰인물임은 확실한듯하다.

사실 <천년의 금서>를 읽고 약간은 아주 약간은 혼란스러워서 한동안 잊고 살았었는데 이번에 역사상 가장 강력했던 고구려의 이야기를 현실과 픽션을 넘다들며 풀어냈다는 <고구려1,2,3권>이 출간되었다.  

그 의 글 답게 고구려를 읽어본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내용이 속도감있고 ,긴장감넘치며, 치밀하고, 장면들이 역동적이며 주인공이 한 개성한다는 이야기를 한다. 

이번 그의 역사해석은 어떠할지 궁금하다. 현재의 정세에 맞추어 '고구려 역사 바로알기'에 제대로 공헌을 하는지 한번 읽어보자.   

고구려는 우리의 역사로 우리 것이지만 그 역사의 흔적이 남아있는 곳은 지금의 중국영토이기 때문에 중국의 시건방진 동북공정의 황당한 주장을 웃기지도 않게 바라보고 있는 상황이 아닌가....나중에 영토문제로 충돌할수있는 중요한 문제이다. 

 
무려 17년부터 기획했으며 데뷔부터 숙원해오던 필생의 역작이기도 하다는 <고구려>  

그가 이토록 치열하도록 역사에 대한 이야기를 소설로 풀어내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번 소설은 고구려 700년 역사에서 가장 극적인 순간 즉 고구려의 최대위기와 최고의 영광이 함께하던 시대로 알려진 미천왕때부터 고국원왕,소수림왕,고국양왕,광개토대왕,장수왕 등 여섯 왕의 이야기를 말한다. 

2~3년 걸쳐 전체 13권 분량을 완간할 예정이라고 하니 기대해보자.. 개천절을 택해 '고구려'를 쓰기 시작했다는 작가는 "호흡이 굉장히 짧은 글만 써오다 처음으로 이런 대작을 쓰게 돼 생소하기도 하지만 끝까지 초심을 잃지 않고 진지하게 임해 세상에 대한 약속을 지키겠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삼국시대 고대국가 중의 하나인 고구려.. 고구려라는 나라 이름은 城을 뜻하는 고구려어의 '구려' 에 高라는 한자어의 미칭을 덧붙인것이라고 책에서 읽었던것같다.  시조는 동명왕(주몽)이고 그후 27대의 왕위를 이었다.

700년 고구려 역사는 크게 고구려성립에서부터 3세기말 미천왕의 큰아버지 봉상왕까지를 첫 시기로, 4세기초 미천왕때부터 6세기초 문자왕대까지를 두번째시기로, 6세기 중엽 안장왕이후 보장왕 27년 멸망때까지를 세번째시기로 본다.. 

첫시기를 국가성립및발전기,  두번째 시기를 고구려발전의 전성기로, 세번째시기를 쇠퇴기로 본다. 

 

이 번 출간된 고구려 1,2,3권은 고구려의 전성기의 기틀을 마련한 4세기 고구려 15대 왕 미천왕(美川王,재위300~331)의 일대기를 담았다.

왕이 되기 전 소금장수였다는 미천왕 을불...어쩌다 서천왕의 손자가  소금장수가 되었는지..소금장수가 어떻게 왕이 될수있었을까?  고구려 초기는 5부족의 힘에 의해 나라가 움직였다. 그 힘겨루기속에서 살아남기위해서 궁궐을 도망쳤던 을불.... 

큰아버지 봉상왕이 아버지를 죽일당시 다행히 화를 면했지만 궁을 나와 처음 의탁했던 곳에서 하는 노예생활이 괴로워 그 집을 나와 한 일이 소금장수였다. 그마저도 도둑으로 몰려 못하게 되자 거지처럼 살았다는 을불....그후 큰아버지 봉상왕의 폭정에 지친 대신(국상 창조리)들이 왕을 몰아내고 왕의 조카인 을불을 왕위에 올림으로 을불은 고구려 15대 미천왕이 되었다.  

미천왕은 왕위에 오른 후 가장 열심히 한일이 진나라를 상대로 영토를 넓히는 일이었다고 한다. 진나라의 낙랑군을 멸망시키고,대방군을 정벌하여 영토로 삼는다. 그덕분에 새로운 농경지를 차지하므로써 경제적으로도 큰 발전을 이루었다. 고구려 더 넗은 영토확장의 계획과정에서 요서지역에서 성장한 모용선비(북아시아의 유목민족인 선비의 일파, 모용부)의 방해로 요하를 건너 서방으로 나아갈수 있는 기회를 놓쳤다. 그 후 여러차례 요동지역을 차지한 모용부를 공격했으나 실패했다. 그렇지만 그는 강한 고구려를 만든 사람이며, 농업,상업을 발전시키고, 영토를 넓혀 고구려의 성장기틀을 마련한 고구려의 왕임에는 틀림없다.  

 

미천왕 을불이 아마 소금장수로 살아봤기 때문에 백성들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그들의 나은 삶을 위해 노력하지 않았을까?   

** 고구려를 알고싶다면 함께보자 

 

 

 

 

 

 

 

 

 

 

 

 

** 고구려 왕위 계보를 보자. 

1. 동명왕 <B.C.37~B.C. 19>

2. 유리왕 <B.C.19~18>

3. 대무신왕 <18~44>

4. 민중왕 

5. 모본왕 

6. 태조왕 

7. 차대왕 

8. 신대왕 

9. 고국천왕 

10 산상왕 

11. 동천왕 

12. 중천왕 

13. 서천왕 

14. 봉상왕 

15. 미천왕 <300~331>

16. 고국원왕 <331~371>

17. 소수림왕 <371~384>

18. 고국양왕  <384~391>

19. 광개토왕 <391~413>

20. 장수왕 <413~491>

21. 문자왕 

22. 안장왕 

23. 안원왕 

24. 양원왕 

25. 평원왕 

26. 영양왕 

27. 영류왕 

28. 보장왕 <642~668> 

  

** 고구려 석비를 보자.   

충주 고구려비 (국보 제205호) 
국내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고구려 석비로, 장수왕이 남한강 유역의 여러 성을 공략하여 개척한 후 세운 기념비로 추정된다. 1979년 입석마을 입구에서 발견되었는데, 오랜 세월이 흐른 탓에 발경 당시 비면이 심하게 마모되어 있었다. 고구려 영토의 경계를 표지하는 비로, 백제의 수도인 한성을 함락하고 한반도의 중부지역까지 장악하여 그 영토가 충주지역까지 확장되었음을 말해준다. 역사적으로 고구려와 신라,백제 3국의 관계를 밝혀주는 귀중한 자료로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유일한 고구려비로 역사적 가치를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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