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이 자 후쿠자와 유키치(복택유길,福澤諭吉) <1835~ 1901>는  누구인가? 

일본의 최고액 화폐인 1만엔권의 초상인물... (예전 1만엔권은 쇼토쿠태자-고대 아스카 문화를 꽃피운 역사적 인물)  

메이지의 스승 혹은 일본 근대의 스승,교육자, 계몽운동가, 자유민권의 신봉자라 일컬을 정도로 일본의 근현대사에서 그는 메이지일본의 대외정책과 문명개화에 큰 영향을 미친 핵심.  진짜? 진짜로? 이게 당신의 본모습이야?

김옥균과 박영효,유길준에게는 개화파의 스승이었던 후쿠자와는 개혁과 개화를 꿈꾸었던 김옥균·박영효·유길준 등과 관계를 맺으면서 조선에서 친일개혁을 지원했다. 또한 수제자 이노우에 가쿠고로(井上角五郞)를 조선에 파견하여 한국 최초의 신문이라 할 수 있는 '한성순보'를 주관하면서 조선의 정세변화를 주시했다. 그리고 막후에서 갑신정변에 깊이 관여했고, 정변이 실패하자 '탈아론(脫亞論)'을 발표하여 조선침략에 앞장선 인물이다.  이광수는 '하늘이 일본을 축복하셔서 이러한 위인을 내리셨다'고 부러워하며 한국의 후쿠자와를 꿈꿨다나 뭐라나....(네네~~ 잘나셨어요!!) 

 

 

이 책은 그가 남긴 글과 발언들을 근거로 일본근대화의 영웅 혹은 침략전쟁의 선동가인 후쿠자와의 일본안, 일본밖의 두 얼굴을 낱낱이 분석한다. 저자 야스카와 주노스케는 지금 일본에서 엄밀한 현실인식과 탄탄한 이론으로 무장하여 발언하고 행동하는 대표적인 양심적 지식인이다.

후쿠자와는 청일전쟁 개전전 아시아에 비극을 남긴  탈아시아론으로 침략전쟁의 사상을 북돋운 아시아의 원흉으로 비난을 받지만 일본에선 서양문명의 충격속에 일본을 주권국민국가로 만들기 위한 정신적 토대를 만든 위대한 사상가로 존경받는다.   

도대체 누가 피해자이고 누가 가해자인가......메이지 유신이후 청일전쟁에 이르기까지 그는 일관되게 조선침략을 주장했다고 한다.침략의 선두자, 그런 인물을 영웅으로 떠받들며 그를 그 위치에까지 올려놓은 일본을 어떻게 생각해야하는지....뭘 어떻게 생각해 알면서...... 식민지배를 항상 정당화하는 그 꼬라지를 보고 뭔 생각을 해야돼?

이 책은 서장과 본론 4장으로 구성돼 있다. 서론에서는 '일신독립해야 일국독립한다'는 후쿠자와의 유명한 명제에 대한 오독을 포함하여 후쿠자와 연구의 불가사의한 7개의 명제를 제시하고 있다. 1장에서는 상황에 따라 바뀐 후쿠자와 자신이 글을 통해, 마루야마 마사오의 맹신적 후쿠자와 예찬론을 공박하고 있다. 이 책의 중심이라고도 할 수 있는 2장과 3장은 후쿠자와의 아시아 인식을 비판적으로 분석하고 있다. 특히 임오군란 이후 조선의 정치·사회변동 때마다 발표한 그의 입론에 나타나고 있는 조선(중국, 아시아) 멸시와 침략의 후쿠자와 상을 보여주고 있다. 4장에서 저자는 메이지 시대에 움트기 시작한 아시아침략사상은 결국 '어두운 쇼와'로 이어졌고, 후쿠자와가 그 중심에 있다고 고발한다. 그리고 부록으로 포함된 '후쿠자와 유키치 아시아인식의 궤적'은 후쿠자와뿐 아니라 메이지 시대 일본의 아시아 정책을 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서 가치가 있다.
 

이책을 읽고 난 후 우리는 무엇을 얻을수있을까? 한국과 일본의 역사 인식자체의 틈새를 조금이라도 좁힐수있을까? 

역사란 지난간 옛일이 아니라 지금 현재도 계속 진행중이다.  

언제까지 우리는 중국이 주장하는 동북공정, 우리 문화까지도 지들거라고 우기는 말도 안되는 웃기는 짓을... 

일본이 독도영유권을 주장하며 역사교과서를 왜곡하는 짓거리를 보고만 있어야 하는가...... 

이렇게 중국과 일본이 왜곡된 역사로 학생들의 역사교육을 시킬때 우리 아이들에게는 지금 우리는 어떤 역사교육을 시키고 있는가..  ?  우리는 2011년부터는 고등학교에서 국사를 배우지 않고도 졸업할수있단다. (4/22일 추가작성)** 고맙습니다..무조건 감사합니다.!! 필수에서 선택으로 선택에서 다시 필수로 오락가락하는 것이 맘에 안들기는 하지만..이제라도 정신차렸다면 다행인것....내년 고교 입학생부터 한국사를 필수과목으로 배우게 되었습니다. 여전히 수능시험에서는 선택과목으로 남았지만요... 시험목적이 아닌 역사교육 자체에 의미를 두어야 맞지만 우리 교육현실상....수능에 반영이 안된다면 효과는 어느정도일까? 현재 현실적으로(2014년 수능 개편안확정) 어려운 문제가 많죠? 그치만 화이팅~합시다.)

이렇게 외면받는 우리의 역사...몰라서, 모르기때문에 우리는 계속당해야하는가...뭘 제대로 알아야 구체적으로 반박하며 논리적으로 피터지게라도 싸워볼수있지않을까?  왜곡된 역사를 지들꺼라고 빡빡우기며 배우는 그 아이들과 우리 역사를 빼앗긴 줄은 알면서 말릴생각을 감정적으로만 한 우리아이들에게 다가올 미래는......

식민지배와 한국전쟁으로 우리 민족은 참으로 많이 다쳤다. 이런 역사를 되풀이 하지 않으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하는가.....오늘은 곰곰히 생각해보자..부디 독도는 우리땅 노래만 부르지 말고 왜 독도가 우리땅인지 좀 자세히 알자!! 

우리아이들을 독도를 지키고, 역사 왜곡을 막는 그들속으로 밀어넣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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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과 함께 '조선시대 기록문화의 꽃'으로 불리는 의궤가 돌아왔다.  

병인양요때 프랑스가 약탈해간 지 145년만이다.  이번에 반환되는 의궤는 어람, 즉 임금 열람용이 많은데다 유일본도 30권 가량 포함돼 있어 더욱 귀중하다.

외규장각 도서 296권가운데 유일본8권을 포함한 1차 반환분 75권이 먼저 돌아오고 . 다음달 27일까지 모두 네차례에 걸쳐 항공편으로 돌아온다. 이번 의궤반환은 영구반환이 아닌 대여 형태로 들어온다. 

온습도 조절 특수상자에 담겨 이송돼 국립중앙박물관 수장고에 안전하게 보관된다.

정부는 오는 7월19일부터 9월18일까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외규장각 도서 특별전시회를 가질예정이다.  

 

 (사진출처 중앙일보)

  

외규장각 도서는 1975년 프랑스국립도서관의 직원으로 일하던 재불 서지학자 박병선 박사가 297권을 발견해 공개하면서  존재가 알려졌다

  1991년에 서울대가 공식적으로 반환을 요구했지만 프랑스가 등가교환(문화재 맞교환)을 주장하면서 무산되었다.  그후 1993년 한프정상회담때 미테랑대통령이 경부고속철도부설권을 프랑스의 테제베가 따기 위한 의도로  <휘경원원소도감의궤>1권을 가져와 반환의지를 밝혔으나  또 무산되고 그후 외규장각 도서반환 협상은 지난해 G20서울정상회의를 기점으로 방한한 사르코지 대통령을 설득, 5년단위의 갱신이 가능한 '임대'방식의 반환에 합의했다. 

양국은 이후 실무협상을 거쳐 합의문에 서명했으며, 국립중앙박물관과 프랑스 국립도서관 간 약정으로 최종 반환 일정을  조율했다.  양국 간 합의문을 보면 대여받는 외규장각 의궤의 문화재 지정은 절대 불가하며, 전시를 하는것도 프랑스의 허가를 받아야 한단다.....  무조건 반환되어야 한다..무조건 반환되어야한다...약탈해 갈때 그놈들 맘대로 가져간것도 화나는데 약올리는것도 아니고 대여는 무슨 대여~~ 그거 우리꺼야!! 손떼~ 

 

외규장각을 알기 전에 먼저 규장각에 대해서 알아볼까? 

숙종때 작은전각을 마련해 '규장각'이라 했으나 직제는 없었고, 정조 즉위후 1776년(정조1년) 규장각(奎章閣)이 창덕궁에 세워졌다. 규장(奎章)은 임금의 시문이나 글을 가르키는 말로 이름대로 역대왕의 글과책을 보관하기위한 왕실도서관 역할을 했다. 

정조는 여기에 비서실 기능과 문한 기능을 통합적으로 부여하고, 과거시험주관, 문신교육의 임무까지 부여했다. 이후 실학자와 서얼 출신의 학자들을 채용하며 많은 책을 편찬하였다.  

1782년에 좀 더 안전하고, 체계적으로 자료를 관리할 목적으로 외규장각을 세우자 원래의 규장각을 내규장각이라 이르고, 서적을 나누어 보관하도록 했다.

외규장각은? 

외규장각은  1782년(정조6년) 강화도에 설치한  왕실 관련 서적 보관목적으로 만든 왕립도서관인 규장각의 부속도서관이다. 규장각 도서 중 영구 보존의 가치가 있는 책들을 별도로 보관한 외곽서고이다.  

설치 후 왕실이나 국가 주요행사의 내용을 정리한 의궤를 비롯해 총 천여권의 서적을 보관했으나 1866년(고종3년) 병인양요( 흥선대원군의 천주교 탄압사건에 대한  보복으로 프랑스군이 침입한 사건)때 프랑스군에 의해 강화도가 습격당하면서  일부서적은 약탈, 나머지는 불에 타 없어졌다.

외규장각도서는 외규장각에만 있는 유일본으로 사료적 가치가 우수하며, 제작 당시의 비단 장정 유지본으로 미술적 가치가  뛰어나다. 현존하는 조선시대 어람용 의궤중 다수인 298책이 이에 해당된다.   

  

그럼 여기서 의궤를 알아볼까? 

의궤(義軌)는 조선시대에 왕실이나 국가의 주요행사가 있을때 그 과정과 의례절차,내용등을 기록과 그림으로 소상하게 정리한 기록이다.  의례 또는 의식의 궤범이 되는 책이라는 뜻이다. 실록에도 의궤의 기록이 남아있지만 내용의 규모가 크고, 그림으로 표현되어야 하는 부분이 많아서 의궤로 제작되었다.   태조부터 편찬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임진왜란 때 유실되어 현존하지 않는다.

의궤가 작성되는 주요행사로는 왕비,세자등의 책봉, 왕실의 혼인, 추숭이나 존호가상, 태(胎)의봉안,국가의 각종제사(종묘사직), 친경(친농,친잠), 사신영접, 국왕행차,궁궐건물건축및 보수, 공신녹훈, 왕실인장이나 어진제작및 봉안, 궁중잔치,실록편찬등을 기록해 국가의 주요행사에 모범전례를 만들어 유사한 행사가 있을때 이를 참고하도록 하였다.  굉장히 구체적으로 기록되었는데 의례 및 준비과정을 날짜별로 기록한 각종공문서, 업무분담, 담당자명단,동원인력수, 소요된물품,경비내역등과 행사 하이라이트부분을 그린 반차도 등 그외 많은것을 기록함으로써 당시의 모습을 입체적으로 볼수있다. 

현존하는 의궤로 가장오랜된 의궤는 선조의 첫번째 정비 의인왕후 박씨의 장례에 대한 것이 기록으로. 1601년(선조34년)에 만들어진 '의인왕후 빈전혼전도감의궤' 와 '의인왕후산릉도감의궤'이다.  

대체로 의궤는 5~8부가 제작되었는데, 국왕열람용으로 어람용1부가 포함되며 나머지는 관련관서 및 사고에 나누어 보관햇다.

의궤는 유일본인 어람용과  일종의 복제본인 분상용으로 구분하기도 한다.조선시대 어람용 의궤는 국왕 열람 목적으로 임금에게 바치는 유일본인 고급도서로,  고급 초주지를 사용해 화려한 비단 표지로  제작되었다.  외규장각 도서에 유일본, 어람용이 많은 이유는 외규장각이 왕립도서관이며 당시  어람용의궤류 대부분이 외규장각으로 보내졌기 때문이다.  

 조선왕실의궤는 서울대규장각2900여책,장서각550여책 그리고 프랑스,일본등 흩어져있는것까지 포함하면 4100여책이 남아있는것으로 추정한다.

  

 너무 반가운 마음에 오늘은 이책 다시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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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틈새 한국사' 시리즈 3권.  재물과 권력을 향한 욕망의 인물사 ' 우리 역사 속 부정부패 스캔들'

책에 등장하는 아홉 명(송유인, 충혜왕, <이인임,염흥방,지윤>, 조말생, 박원종, 장현, 박종신, 민영휘, 이지용)의 공통점은?  

재물과 권력에 대한 욕망이 다른 누구보다 강했던 인물들이다.   

부정부패에는 홍길동의 몽둥이 찜질이 제일인데...ㅋㅋ

이들 중에는 권력을 위해 아내를 바꾼 자(송유인)도 있으며, 어떤 이는 자신의 주군을 몰아낸 이(박원종)도 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사료에 나타난 이들의 면면을 이야기함과 동시에 그들의 모습에서 보이는 고려시대부터 구한말까지의 시대상을 투영한다.  

빨리 읽고 싶다..맘껏 썩을것들이라고 ....떠들어 볼 예정~

 

 책 소개를 보자~

망국에 이르는 병, 부정과 부패
권력의 획득과 부의 축적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특히 국가가 국가다운 체제를 유지하지 못할 때 자연히 각종 비리와 불법이 판을 친다. 이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고려의 송유인은 무신정권기의 혼란함을 설명하는 수단이 되며, 권세가 이인임과 염흥방, 환관 지윤은 원나라에 의해 국왕의 거취까지 결정되던 고려 말 암흑기를 표현할 수 있는 하나의 전형이 된다. 또한 조선의 시골 수령 박종신은 세도정권에 의해 국정이 좌지우지되던 구한말 모습의 여러 단면들 중 하나다. 저자는 이들의 모습을 통해 부정한 재물과 권력의 추구는 시대와 사회의 여건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하나의 사회현상이자 그 시대의 자화상이며 또한 현대를 사는 우리가 경계해야할 하나의 지표로 이야기한다.

돈과 권력의 결합
철저한 신분제 사회였던 조선에서 사대부가 아닌 중인이 권력의 중심에 접근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 책은 숙종 대 역관가문으로 조선에서 이름난 부자였던 인동 장씨가 자신들의 재물을 이용해 남인 세력의 권력과 결합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인동 장씨의 재물을 통한 '로비'의 결과 그들 가문의 여식인 희빈 장씨가 숙종의 왕비가 되지만, 정상적인 과정을 거치지 않고 획득한 권력은 그 뿌리가 단단하지 않은 법이다. 갑술환국으로 남인에서 서인으로 정권이 교체되던 시기, 인동 장씨 가문은 "역관 활동으로 모은 재물로 대저택과 호화로운 의복 등 사치가 극에 달했으며 정계의 정승, 판서들과 서로 결탁해 음흉한 모의를 기도"한 죄목으로 정계에서 축출을 당한다.

나라를 팔아 얻은 재물과 권세
저자는 이 책에서 민영휘와 이지용을 통해, 구한말 일제 초 재물 축적을 위한 경제 활동에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나선 전현직 고위 관료들의 모습을 이야기한다. 한일병합 이전 이미 백성들의 토지와 금전 등을 수탈하고 매관매직을 통해 엄청난 재산을 소유한 이들이 그렇게 모은 재산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쩌면 일제에 봉사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었을지 모른다. 물론 그렇게 지킨 재산이 온전히 보존되지는 않았다. 왕실 종친이기도 한 이지용은 한일병합 후 한동안 도박에 빠져 일제에 의해 받은 귀족 작위가 몰수되기도 한 사실이나, 민영휘에게 토지와 재산을 수탈당한 이들이 제기한 소송의 사례를 확인하는 것은 이 책이 독자들에게 주는 또 하나의 재미다. 
  

여기에 나온 재물과 권력의 똥개들을.. 대략 알려진 걸로만 한번보자...가관일세~~   

송유인(宋有仁  언제태어났는지도 모름 ~ 1179)  

고려시대의 무신 수없이 많은 권력 중심의 자리에 있었음.얘기하기도 입아퍼~  정중부(고려시대의 무신. 왕이 무신을 차별하는 데 불만을 품고 왕의 보현원 거둥 때 문신을 죽이고 정권을 장악)의 사위,
송나라의 거상 서덕언의 처와 결혼했으나 무신의 난으로 정중부가 권력을 쥐자 아내를 내쫓고, 정중부의 딸과 결혼..정중부를 등에 없고 인사권을 장악하고, 왕 못지않은 호화생활을 하며 그 위세를 더럽게 떨쳤음.. 경대승(1154~1183)고려의 무신으로 1179년 정중부(鄭仲夫) 등을 제거하고 실권을 장악하였다. 도방(都房)을 설치하고 문관(文官)과 무관(武官)을 고루 등용하여 무신정변으로 와해된 조정의 질서를 회복하려 했으나 1183년 30살의 나이로 병사)에 의해 정중부의 일족과 송유인도 살해되었다.  

 

충혜왕 [忠惠王, 1315 ~ 1344]  

고려 제 28대 왕. 충숙왕의 아들, 1330년 왕위에 올랐으나 방탕하고 주색을 일삼아 왕위를 다시 부왕 충숙왕에게 넘긴 뒤, 원나라로 돌아가야 했다.돌아가서도 황음광포한 짓을 계속하였다. 1339년 복위하였으나 방탕한 짓을 일삼았다. 1343년에는 총애하는 은천옹주를 위해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삼현(三峴)에 새로 궁궐을 지었는데, 개성에서는 “왕이 민가의 어린이 수십명을 잡아 새 궁궐의 주춧돌 밑에 묻고자 한다.”는 소문이 돌아 집집마다 아이를 안고 도망하고 숨는 등 소란이 일었다.사무역(私貿易)으로 재화를 모으고 무리한 세금을 강제로 징수하여 유흥에 탕진하고, 백성들의 토지와 노비를 약탈하여 보흥고(寶興庫)에 소속시키는 등 실정이 많았다.. 이에 원나라에 가 있던 이운(李芸)·기철(奇轍) 등이 왕의 실정과 횡포함을 그곳의 중서성(中書省)에 알림으로써 원나라에 끌려가서 게양현(揭陽縣)으로 귀양가다가 악양현(岳陽縣)에서 죽었다. 시호는 헌효(獻孝)이고, 원나라의 시호는 충혜이며, 능은 영릉(永陵)으로 지금의 개성에 있다. 

 

이인임(李仁任, ?~1388)  그의 졸개들 지윤,염흥방..

고려시대의 문신, 공민왕의 서북면도통사로 원나라으 동녕부를 정벌로 광평부원군에 책봉.1374년 공민왕이 살해되자 우왕을 추대하여 정권을 잡고, 친원외교정책을 행하며 친명파를 제거했다.그후 충복인 지윤, 염흥방과 함께 권력을 휘두르며 매관매직,전국에 걸쳐 토지와 노비를 축적을 일삼았다. 이들은 흉악한 종들을 전국으로 보내 좋은 토지를 가진 사람들에게 덮어놓고 물푸레나무로 곤장을 쳐서 강탈하였는데, 그 임자가 국가에서 발행한 토지 문서를 가지고 있어도 감히 시비를 가리지 못하였다고 한다. 그 때 사람들이 이것을 '물푸레나무 공문'이라했다. 그후  최영,이성계에 의해 안치되었다가 죽었다.

 
조말생(趙末生, 1370년 ~ 1447년)  

조선의 문신이다.태종때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무수히 많은 벼슬을 했다. 태종의 각별한 총애를 받았으며 세종때 예문관 대제학을 거쳐 판중추원사에 이르렀다. 글씨에도 뛰어났다.그러나  세종 8년(1426년)에 우의정 조연, 곡산부원군 연사종과 함께 병조판서 조말생이 사헌부의 탄핵을 받았다. 죄목은 장오죄(贓汚罪). 관리가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부정하게 이익을 취하는 범죄, 오늘날의 뇌물수수죄에 해당한다. 민간의 노비소송을 몰래 거들어주고 노비를 뇌물로 받은 혐의였다. 결국 이들은 귀양을 떠나야 했다.  병조판서로서 파저강을 토벌하고 대마도를 정벌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던 조말생.. 세종은 그를 사사시키라는 언관들의 주장을 물리치고 충청도에 유배를 보냈다가 곧 복귀시킵니다. 그리고 조말생으로 하여금 여연군 침략에 대비하게 합니다. 이후 조말생은 파저강 토벌과 여진족 재침략 대비와 변방수비, 사민정책 등을 추진하며 세종의 신임에 부응하게 됩니다. 

 

박원종(朴元宗, 1467년 ~ 1510년) 

조선전기 무신, 무술이 뛰어나 음보로 무관직에 기용되었다. 중종을 옹립하는 반정의 주도적 역할을 하여 정국공신 1등에 책록, 영의정에 오르고 평성부원군에 봉해진다.중종초 박원종의 의정진출로 의정부의권한이 강화되기도 했다.중종반정의 주모자인 박원종 등 1등 8명에게는 토지 150결과 노비30명을 주었는데 여기서 결이란 조선시대 토지면적을 말하는 단위로 1결이 2,700여평으로 150결은 41만평이다. 와~ 대지주다.중종반정의 일등공신 박원종은 조선 역사상 가장 호사스런 주택을 소유한 사람으로 꼽힌다. 박원종의 집을 찾은 사람이 그의 처소에 이르려면 안대문만 다섯을 지나야 할정도였다니 그 규모와 사치가 가히 짐작이 간다..후 와~~ ,1613년~?)  

 

장현( 張炫

조선 인조~숙종때의 역관으로 희빈 장씨의 아버지 장형의 사촌형제이다. 인조17년에 역과에 응시, 장원으로 합격하고, 역관의 수장이며 당대의 갑부로  역관장현 국중거부라는 별칭도 있었다니 ....돈이 도대체 얼마나 많은거야?  당시 청나라는 일본과 교류를 단절하고 있었기 때문에 직교역대신 조선의 왜관을 통해 중국문물을 구해서 이 중계무역으로 당시 역관들은 상당한 부를 축적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장현역시 중계무역을 통해 재산을 모았을 것이다. 그는 병자호란후 왕자들을 수행하여 중국에가서 6년을 머무는 동안 왕자들과 친분을 쌓았고, 그덕분에 특권무역을 하며 부를쌓지 않았을까?  숙종 대 역관가문으로 조선에서 이름난 부자였던 인동 장씨가 자신들의 재물을 이용해 남인 세력의 권력과 결합 인동 장씨의 재물을 통한 '로비'의 결과 그들 가문의 여식인 희빈 장씨가 숙종의 왕비가되었지..훗`  아~ 책 읽어보자!! 

 

박종신(臣 )  

 순조11년 황해도 곡산부의 농민이 환곡운영의 폐단과 수령의 수탈에 반발하여 관에 저항한 사건을 곡산민란이라고 하는데..그 때 곡산부사가 박종신이다. 박종신은 읍폐를 고친다는 명분으로 아전과 향임의 환곡운영권을 탈취하였고, 부민의 곡식을 침탈했다. 이에 곡산농민들은 관에 저항했고 부정한 관리를 내쫓은 최초의 사건이 되었다. . 이 난으로 박종신은 유배되었다. 19세기 초 농민항쟁으로 농민의 패배로 끝났지만, 몇개월뒤 홍경래의 난이라는평안도 농민항쟁으로 비화되었다. 아~ 이것도 책 읽어보자! 

   

민영휘 (閔泳徽, 1852 ~ 1935) 

명성황후의 척족의 세력을 배경으로 정계에 진출, 갑신정변을 진압하고 동학농민운동때 청군의 지원을 요청했다. 임오군란때 탐관오리로 유배되었다. 일본의 강제병합후 화려한 친일행각의  공로로 일본정부의 자작의 작위를 받았고, 거액을 투자해서 천일은행과 휘문학교를 설립하였다. 민영휘는 관직에 있을때 수탈한 재물을 이후에 잘불려, 일제강점기동안 조선 최고의 갑부 중 한사람이다.

 이지용(李址鎔, 1870~1928 ) 

친일파 , 민족반역자. 19014년 외부대신서리로 한일의정서를 협정 조인하고,내부대신으로 을사늑약에 찬성하여 조인에 서명함으로써  이완용, 박제순, 이근택, 권중현과 함께 을사오적의 한 사람.. 흥선대원군의 형인 흥인군 이최응의 손자다. 일본이 주는 백작의 칭호도 받고 일본천황의 생일에 초대도 받고.....1912년 도박죄로 태형을 선고받으며 작위도 몰수되었다. 썩을것들...
 

* 함께 읽으면 더 재밌고 도움되는 좋은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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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을 나르는 서적중개상... 조선 후기 책쾌(冊쾌)라는 말을 처음 들어본건,,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서 낸 규장각교양총서 시리즈중  4권 '조선 전문가의 일생'에서

 11장 조선시대엔 왜 서점이 없었을까
- 책 파는 사람, 책 읽어주는 사람·이민희 강원대 국어교육과 교수의 글이다. 

 

 틈새 한국사 시리즈 2권 -   평생을 책과 함께한 마지막 서적 중개상    책쾌 송신용 

책소개를 보자~ 

마지막 서적 중개상, 송신용의 삶 복원

서적 중개상을 일컫는 '책쾌'는 도서의 제작과 출간, 유통이 제한된 환경으로 인해 대부분의 것이 일부 계층에 의해서만 이루어지고 향유된 근대 이전 지식문화의 한 단면을 이해할 수 있는 좋은 수단이다. 이 책은 일제 강점기, 해방과 분단, 그리고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었던 지식문화의 혼란기 모습을 조선의 마지막 서적 중개상으로 불러도 좋을 '송신용'의 일생을 통해 살핀다. 그런 의미에서 책쾌 송신용은 시대를 볼 수 있는 창이며, 문화를 읽는 코드로 이야기할 수 있다. 송신용의 삶을 통해 그가 활동한 시대의 지식문화의 한 단면을 확인할 수 있음은 물론 우리의 문화적 역량이 지금은 어디쯤 와 있는지 저울질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서적중개상은 책을 짊어지고 돌아다니며 개인적으로 흥정을 해 서책을 팔던 전문 상인이다. 개인적인 이윤 추구가 목적이었지만 정치·경제 ·사회·문화 등 다양한 분야의 지식을 전파하는 전령사 역할을 했으나 산업구조의 변화와 함께 1960년대에 사라졌다. 저자이민희교수는 서적중개상 송신용에 대한 연구를 통해 그가 역사 속에서 담당했던 역할에 주목하며 독립운동가이자 전문 필사가였던 그의 삶을 조명한다.   

  

이책의 내용을 보자면  

책쾌 송신용이 누구인가를 알아보고, 구한말 이후 서적 중개상의 모습 복원하며 서적 중개상의 활동을  재조명한다.

 마지막 서적 중개상이라 할 수 있는 송신용의 삶과 함께 구한말 이후 서적 유통 현장의 모습을 함께 이야기한다. 구한말 이후 우후죽순처럼 세워진 민간서점 등의 영향으로 과거와 같은 서적 중개상의 활동은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러한 사회적 흐름 속에서도 한국전쟁 이후까지 소수의 특정 고객을 직접 찾아다니며 흥정하고 매매하던 서적 중개상은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 책에서 복원을 시도하고 있는 송신용의 활동 모습은 구한말 이후 조선에서의 서적 유통의 한 단면과 사라져 가던 서적 중개상들의 활동상을 가늠할 수 있는 좋은 시금석이 된다. 송신용이 활동했던 시대의 서적 중개상을 단순히 재리를 좇는 경제 활동가들 중 하나로 이해하는 것을 경계한다. 구한말과 일제 식민시대, 그리고 해방과 한국전쟁이라는 사회 혼란기 속에서 이루어진 도서의 유통과 출판, 보급과 소비는 이익 창출을 위한 경제활동이나 개인의 욕구 충족이라는 목적만이 아닌 문화적 혹은 어떤 일정한 가치 내지 의식을 바탕으로 하는 투쟁적 활동의 결과였다.

따라서 책쾌, 즉 서적 중개상은 그저 책을 파는 것으로 그들의 활동이 종결되는 것이 아닌 책의 보급과 유통으로 사회와 문화에 일정한 영향을 끼쳤던 '문화 활동가'였다. 이 책은 더불어 그들의 모습 속에서 당대의 열악한 서적 유통을 극복하고자 자생적으로 생겨나 활동한 사회적·문화적 움직임으로 이해할 수 있음을 강조한다


이책을 보면 알겠지만 읽기전에 그럼 필관 송신용이 우선 누구신지 짤막하게 보자면!    

필관 송신용( ·1884∼1962).  

1930년대 중반∼1950년대 말 서울을 중심으로 왕실()과 관가()를 드나들며 내방 가사 등 국문학 자료와 고문서를 수집해온 서적중개상이다. 서울대 규장각에 있는 2권 2책의 ‘한경지략()’ 등 그가 아니었다면 사라졌을 고전이 한두 권이 아니다.

필관은 양명학 연구의 대가인 정인보, 국어학자인 이희승 이병기 최현배, 소설가 이광수 박종화 등과 교류했다. 서화 감식의 대가였던 오세창, 한남서림 주인이었던 전형필과도 가깝게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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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틈새 한국사> 시리즈가 출간되는 의미는?
역사가 외면한 과거, 새로운 의미 찾기의 여정 그리고 그 여정의 즐거움!
지금의 우리가 읽는 ‘역사’는 과거의 ‘사실’임과 동시에 누군가가 그것에 의미를 부여한 흔적이다. 그렇게 ‘의미 부여’에서 소외된 과거의 사실은 단지 ‘기록’으로만 남아 후세에 전한다.  

이에 <틈새 한국사>는 그 동안 ‘의미 부여’에서 소외된 과거의 기록들을 찾고자 한다. 그 기록들은 ‘인물’일 수 있으며, ‘문화’나 ‘사회’의 모습일 수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지금까지 우리가 간과한 과거의 기록들이 이 시리즈에서 의미를 가진 또 하나의 역사로 그 모습을 드러낼 수 있기를 기대한다 

  역사는 의식적으로 외면했거나 감추고 싶어하는 것이 있었나? 

 

역사의아침 '나는 불온한 선비다' 에서는 조선을 지배한 사상적, 정치적 경향과 다소 거리가 있는 그래서 그들과는 다른 꿈을 꾸며, 다른 삶을 살고자하는 9명의 사상가를 이야기 한다.    

이들을 통해서 그들의 남다른 일생, 그들의 사상과 사회인식을 엿보고, 그들을 통해 그 시대의 조선을 살펴본다. 더불어 그들에게 배울점, 그들의 생각이 우리의 마음에 어떤 의미를 줄지도 한번쯤 생각해 봄도 바람직할것같다.

광인 김시습, 비범한 보통인 서경덕, 반주자학자 박세당, 양명학자 정제두, 시골 서생 이익, 과학사상가 홍대용, 천주교인 이벽, 역사에서 사라진 유수원, 경험주의자 최한기가 바로 그들이다.     

그때의 역사속에서 그들을 보면  사상이나 태도가 체제와 통치권력에 맞서는 불온한 사람들로 보이지만 세상과 다른 꿈을 꾼 조선의 사상가들 ...그들의 사상에서 난 희망을 느낀다.

 자세한 그들의 모습은 책으로 보고 그분들을 한번 가벼이 살펴보자..

  

  
1장 공명과 지조 사이에서 고뇌한 ‘광인’ _ 김시습

당대의 권력자의 글에 사정없이 비판과 조롱을 서슴지 않았던 매월당 김시습 . 조선 최고의 지식인, 문학가, 사상가였으면서도 평생을  떠돌아다녔던 매월당. 당대의 천재였지만 그는 추악한 세태를 증오하며 스스로 아웃사이더가 되었다. 그리고 그 누구보다도 도발적이고 파격적인 소설들을 썼다. 그가 남긴 글들은 시대를 초월하는 걸작으로 남았고, 그의 독특한 이미지는 전설이 됐다.
세살때  보리를 맷돌에 가는 것을 보고 “비는 아니 오는데 천둥소리 어디서 나는가, 누른 구름 조각조각 사방으로 흩어지네( )”라는 시를 읊었다는 매월당 김시습(1435(세종 17)∼1493(성종 24))은 생육신의 한 사람인 조선 전기의 학자이다 . 신동·신재()로 이름이 높았다.  5세에 이미 신동(神童)이라는 소문이 국왕인 세종에게까지 알려져 장래에 자못 크게 쓰겠노라는 전지까지 받았다 한다. 그러나모친의 사망, 부친의 무능, 계모의 등장, 결혼생활의 불행등 가정사도 불행했고, 수양대군이 단종을 내몰고 왕위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고 통분하여, 책을 태워버리고 중이 되어 법명을 설잠이라 하고 방랑길에 올랐다. 그는 끝까지  절개를 굳게 지키며 불교와 유교의 사상을 아울러 포용한 사상과 탁월히 뛰어난 문장으로 조선 전기의 사상계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유·불 관계의 논문들을 남기고 있으며, 특히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를 존경하며 그들과 같은 삶을 살아가려 하였다. 그뿐 아니라 15권이 넘는 분량의 한시들도 그의 전반적인 사상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1493년 (성종 24년) 59세에 부여 무량사에서 운명했다.  

 

2장 자연에 자신의 삶을 맡긴 ‘비범한 보통인’ _ 서경덕
 화담 서경덕徐敬德 (1489년(성종 20)∼1546년(명종 1)은  황진이(黃眞伊)의 유혹을 물리친 일화가 전하며, 평생 관직에 나가지 않고 송도에 머무르며 학문 연구와 교육에만 전념하였다.집안 형편이 어려워 끼니를 거르는 경우가 많았지만, 학문에 힘쓰는 제자들을 가르치는 낙으로 평생을 살았다.  박연폭포(朴淵瀑布)·황진이와 함께 송도삼절(松都三絶)로 불린다. 격물(格物)을 통해 스스로 터득하는 것을 중시했으며, 독창적인 기일원론(氣一元論)의 철학을 제창하였다.주요저서로는 화담집이있다. 

  

3장 반주자학의 길을 간 ‘타고난 반항아’ _ 박세당

 서계 박세당(1629(인조 7)∼1703(숙종 29))은 조선 후기의 학자. 당시의 정국을 주도하던 노론계의 반대입장에 선 반주자학자였다.소론(少論) 계열로서 노론(老論)의 송시열(宋時烈)과 개인적·정치적 대립관계에 있었던 그는 대외정책에 있어서 친청(親淸)정책으로 실리를 추구할 것을 주장하여 송시열을 비롯한 강경론자들에게 '오사(五邪)'의 하나로 지탄받았다. 학풍과 사상 연구에서 벗어난 실사구시적 학문 태도를 강조하였다.그는 정치적으로 소론계()와 빈번하게 교류하면서, 소론의 거두인 윤증()을 비롯하여 박세채(), 처숙부 남이성(), 처남 남구만(), 최석정() 등과 교유하였다. 그리고 우참찬 이덕수(), 함경 감사 이탄(), 좌의정 조태억() 등을 비롯한 제자를 길렀다.  사서(四書)와 서경·시경을 주해한 책사변록(思辨錄)≫을 지어 주자학(朱子學)을 비판하고 독자적인 견해를 발표함으로써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려 관직을 삭탈당하고, 유배 도중 옥과(玉果)에서 죽었다. 그 직후 이인엽(李寅燁)의 상소로 신원(伸寃)되었다.
 
 서계 박세당은 만년에 자손들에게 남긴 '계자손문(戒子孫文)'에서 "늘 근신하고 천사람의 뒤에 종적을 감추라"며 다른 사람 앞에 나서지 말 것을 당부했다. 또 자신이 죽은 후에는 상례를 간소화해 무늬가 있는 비단을 쓰지 말고,3년 상식(上食)은 예가 아니므로 졸곡(삼우제를 지낸 뒤의 제사) 후에는 그칠 것 등을 강조했다. 또한 독서와 학문,교제를 충(忠)과 신(信)에 근본할 것을 강조하고 혹시 재물이나 아내가 꾸민 말로 형제 간에 다투는 일이 없도록 경계했다
 
 
    

4장 용기와 확신으로 가득 찬 ‘행복한 이단자’ _ 정제두

하곡 정제두1649년(인조 27)∼1736년(영조 12)는 조선 후기 유학자,지식과 행동의 통일을 주장하는 양명학을 연구,발전시킨 양명학자이다.20여 세 때부터 박세채(朴世采)를 스승으로 섬기며 수학하였고, 처음에는 주자학을 공부하였으나 일찍부터 양명학에 심취하였다.가학으로 강화학파를 형성했다.정제두가 후학에게 남긴 말 중의 하나가 의연후취(義然後取)다. ‘욕을 버리고 의롭고 정당하다는 것을 안 후에 취하라’는 것이다. 

   

5장 시대의 모순을 이야기한 ‘시골 서생’ _ 이익

  이익 (李瀷, 1681~1763)  조선 후기 실학자로 사회실정에 맞는 실용적인 학문과 양반도 생업에 종사하라느 사농합일() 이론을 주장하였다 .농사를 짓던 경험에서 토지와 농경생산의 중요성을 깨달은 이익은 이를 중심으로 한 경제제도의 개혁을 주장하였는데 그 근간이 토지제도의 개혁이었다. 그는 한전론을 통해 개인의 소유할 수 있는 토지를 한정하여 가급적 많은 사람들이 균등하게 토지를 소유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빈부의 양극화를 막는 길이라고 하였고, 농민들이 자율적으로 운영하는 사창제를 실시할 것을 주장하였다. 인재등용에 대해서는 과거제도에만 의존하지 말고  여론과 평판에의해 훌륭한 인재를 천거해서 채용하는 공거제()를 함께 실시할 것과 병역문제는 향병제()를 두고 나라를 지키기 위한 무기의 개발과 군마() 양성, 성지수축 등을 추진해야 한다는 등 여려 방면에 걸친 일대 혁신을 주장하고. 토지를 바탕으로 한 정치·경제·사회적 개혁을 꿈 꾼 이익은 많은 제자를 두고 자신의 호를 딴 성호학파를 형성함으로써 후대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주요저서로는 자신의 개혁사상을 풀어 놓은 《성호사설(星湖僿說)》과 《곽우록(藿憂錄)》과 그 외 다수가 있다. 

   

6장 세계로 향한 창을 연 ‘과학사상가’ _ 홍대용

홍대용 (洪大容, 1731 ~ 1783)은 조선 후기의 실학자이며 조선최고의 과학사상가이다.서장관으로 북경 사행에 참여한 작은아버지 홍억의 수행군관, 즉 자제군관(子弟軍官)이라는 이름으로 참여한 그의 중국 여행은 세계관을 변화시킨 큰 경험이었다. 중국을 다녀 온 뒤 을병연행록도 남겼다. 그가 지은 과학사상에 관한 저술[의산문답]은 1623년 갈릴레이가 쓴 천동설과 지동설에 대한 오디세이, 즉 [두 우주 체계에 관한 대화]에 비견되는 글이다. <의산문답>은 가상 인물인 실옹(實翁)과 허자(虛子)가 펼치는 대담 형식으로 되어있고,30년간 성리학을 익힌 허자가 자신의 학문을 자랑하다가 의무려산에서 실옹을 만나 자신이 그 동안 배운 학문이 헛된 것이었음을 풍자한 놀라운 작품이다.   

 

  7장 시대와 가족이 외면한 ‘조선 천주교의 선구자’ _ 이벽

이벽 李檗, 1754~1786  한국천주교 창립의 주역이었던 광암 이벽(李檗),이벽이 추구한 것은 조선사회의 근본적인 변혁. 때문에 이벽은 유학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유학 외에 다양한 학문을 공부한다. 그 과정에서 서구의 학문을 공부하던 그는 스스로 천주교 교리를 깨우친다. 그리고 천주교를 종교로서 받아들이고 정약용, 정약전, 권철신 등 당대 선비들에게 천주교라는 사상을 전한다 이익(李瀷)을 스승으로 하는 남인학자의 일원이었으며, 이가환(李家煥)․정약용․이승훈(李承薰)․권철신(權哲身)․권일신(權日身) 등과 교유하였다. 이벽은, 그를 형제들처럼 무관으로서 출세시키려는 아버지의 소원을 뿌리치고 오직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 결국은 서른둘의 나이로 병사했다고 전해지는 이벽. 그간 천주교에서는 이벽을 배교자로 보는 시각이 팽배했다. 그가 배교자로 지목된 이유는 단하나, 아버지의 자결앞에서 신앙을 양보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그의 죽음을 순교로 보는 의견이 부각되고 있다. 이벽은 끝까지 신앙을 버리지 않았고 또한 그의집안에서는 죽음에 이르는 순간까지 계속된느 박해가 있었기 때문에 결국 박해로 죽음을 맞이한 순교자라는 것이다.  

 

8장 역사에서 사라진 ‘비운의 사상가’ _ 유수원

유수원 1694년(숙종20)~ 1755(영조31) 조선 후기의 문신.실학자이다.  소론이었던 유수원은 같은 소론계 영의정 조태구를 배척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탄핵받아 파직되었다.숙종-경종-영조로 이어지는 이 시대는 피비린내 나는 ‘당쟁의 시대’였고 또한 정치적, 사회적인 격동기였다  노론과 소론의 대립이 극에 달한 것은 경종 때였다 숙종 말 경종의 왕위계승을 지지했던 소론과 경종의 동생인 연잉군(:영조)을 지지한 노론 사이에 나타난 정쟁.. 경종때 소론이 정권을 장악했으나 영조가 즉위하고 다시 노론의 시대가 왔다. 그의 삶은 당쟁의 여파로 힘들었지만 학문과 경륜이 뛰어나며, 유형원, 이익,정약용과 함께 실학자의 한사람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그의 저서로 사회개혁안을 제시한 책, 중상주의 경제학의 고전인  우서(迂書)가 있다.그는 18~19세기 수많은 실학자들을 매료시킨 중상주의 경제학 이론을 개척하다시피 한 선구자였습니다. 이 책에서는 조선의 부국과 백성의 안민을 위한 정책개혁을 .즉, 사농공사의 신분질서 및 차별철폐, 상업적 농업,상공업의 발전 그러니까 사회개혁+경제개혁에서 찾고 있다. 영조때 대역죄인으로 처형되었다. 소론의 숙청작업에 희생양?  

 

 9장 인간 본성의 선천성을 부인한 ‘경험주의자’ _ 최한기

혜강  최한기   1803(순조3)~1877(고종16), 기존의 동서양의 학문적 업적을 집대성한 수많은 연구 저서를 내고 한국의 근대사상이 성립하는데 큰 기여를 한  19세기를 대표하는 실학자,  평생 학문에 정진하여 수많은 책을 저술했다.대동여지도를 만든 김정호와 교분이 두터웠다. 최한기는문(文)·사(史)·철(哲)의 종합적 동양학의 틀에서 머물지 않고 물리·천문·지리에서 의학 등으로 광활하게 펼쳐진 ‘기학(氣學)’ 즉 개인과 사회와 자연이 질서있고 조화롭게 순환과 변화를 통해 발전하고 궁극적으로는 세계 각국인을 가르치고 잘 인도하여 전인류가 화합하는 이른바 “兆民有和”의 세계를 목표로 하는 사상을 가졌다. 수많은 저작을 통해 경험주의적 인식론을 확립하고, 사물을 수학적,실증적으로 파악할것을 주장해 한국 사상사에 근대적 합리주의를 싹트게 했다.그의 학문적 관심은 세계 인문·지리·천문·의학 등 실로 다양하다.

 **이 책과 함께 읽으면 좋은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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