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에게는 아직도 열두 척의 배가 남아있습니다. 신이 살아있는 한 왜적이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 죽고자 하면 반드시 살고, 살고자하면 죽을 것이다" 

 " 가벼이 움직이지 말라, 침착하게 태산같이 무거이 행동하라" 

" 석자되는 칼로 하늘에 맹세하니 산과 물이 떨고, 한번 휘둘러 쓸어 버리니 피가 강산에 물들인다"   

 

2004년 9월 4일~2005년 8월 28일까지 104부작으로 방송된 "불멸의 이순신"    

2005년 역사교과서 왜곡과 독도 문제 등으로 반일감정에 머리가 지끈거릴때 정말 화끈하게 스트레스 풀어주셨던 드라마!! 

이 드라마 이후로 속시원한 드라마를 본적이 없으니 난 감히 최고의 드라마라 이야기 할란다.. 

김명민이라는 배우의 진가를 알게된 드라마라 더 귀한듯.... 김명민 짱~

사실 이 드라마에서 영웅 이순신의 휘하의 수많은 인재들의 모습을 보여줘서 너무 만족스러웠다. 
책사 권준, 과학자 나대용과 그를 보좌했던 거북선과 무기를 주조한 이름모를 민초들.. 임전시 목숨을 아끼지 않고 싸웠던 정운을 포함한 많은 부하장수들.....그들이 존재했기에 진정한 지도자로서 이순신이 더 빛나는것 아니겠는가.....

정말 울면서 열심히 봤었다. 방송될때마다 가슴을 울리는 장군의 말씀에 전율했다. 
  
" 이들을 모두..내가 죽였다.....그러나 나는 구차한 목숨을 당분간은 더 이으려 한다. 부하들의 목숨을 헛되이 하지 않기위해서다.

" 우리에게 아무도 목숨을 바치라 강요하지 않았다. 이곳을 지킬것을 결의 한 것은 바로 우리들 자신이다. 지금도 늦지 않았다. 두려움을 느끼는자, 싸울의지가 없는자, 이곳 녹둔도를 떠나라.  

" 전쟁은 병장기만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병력만으로 하는 것은 더욱 아니다. 승리의 가장 큰 관건은 이길수 있다는 확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굳은 결기에 있으니...오직 마음으로 싸우는자, 그 자만이 최후의 승자가 될것이다"

" 명심하라, 살고자 두려움에 곁을 주는자, 죽을 것이요, 승리를 위해 기꺼이 죽고자 하는 자, 살것이다."  

" 전쟁에 임하는 자의 마음이 승리의 시작이요 끝이니 군사들의 사기 진작을 위해 최선을 다하라." 

" 나는 부하들을 믿는다. 조선수군은 그게 누구든 더럽게 목숨을 구걸하지 않는다" 

야비한 침략자의 의지를 끊어버리고, 조선을 지킨 임진왜란...그 전쟁을 패배한 전쟁이라고 누가 감히 말할것인가? 

세 번의 파직과 두번의 백의종군에도 불구하고 불굴의 의지로 나라를 지킨 충무공 이순신... 
나라가 그를 위해 무엇을 주었다고..임금과 그의 정적들의 견제를 항상 받으면서도 .. 임금부터가 중심을 잃고 우왕좌왕하고 있을때 애국심과 신념으로 나라를 구한 이순신... 
학연,지연,혈연등의 잇속관계가 아닌 원리원칙에 따른 일처리, 뛰어난 전략전술, 구습을 버리고 철저한 준비와 의지로 부하들에게 흔들림 없는 절대적 신뢰를 주며,  엄한 원칙으로 부하를 이끌었던 진정한 지도자 이순신... 
위기속에서 희망을 찾고, 그것을 기회로 삼아 7년 전쟁을 승리로 이끈 이순신....  

이번주 역사스페셜은 충무공 탄신 기념일 기획 <철저분석 한산대첩>이었다.   

1592년 7월 8일 거제와 통영사이의 좁고,암초가 많은 부적합한 장소 견내량(일본수군이 정박해있었다)에서 이순신 장군은 <넓은 바다로 적을 이끌어낸후 왜적을 모두 잡아버린다, 인출전포지계·引出全捕之計>는 목표와 계획을 세우고 판옥선 6척의 유인함선을 출동시켜 적의 선봉을 쫓아가서 급습하고 이에 왜군이 일시에 쫓아나오자 거짓후퇴하며 적을 유인하였다. 
 

조선수군은 예정대로 한산도 앞바다까지 유인 후 신호에 따라 모든 배가 북을 울리며 뱃길을 돌리고, 호각을 불면서  학의 날개처럼 포위하는 학익진(鶴翼陣) 전법을 펼치며 진군하였다.
지자총통, 현자총통,승자총통을 한꺼번에 쏘아 적선을 격파 .. 왜군은 조선수군의 포격에 순식간에 격파되어 무너졌다. 왜선 59척을 침몰시키고, 이로인해 왜군 9천여명이 전사했으며 한산도로 도망친 400여 명은 군량이 없이 13일간을 굶주리다가 겨우 탈출하였다. 거의 전멸이었다. 


한산대첩은 한산도 앞바다에서 1592년(선조25) 7월 8일 임진왜란 초기 수세에 몰렸던 전세를 조선수군이 확~ 뒤집어 버린 전투로 진주대첩, 행주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대 대첩으로 불린다. 

ㅎㅎ 임진왜란 발발 후 , 불과 20일 만에 한성이 함락되면서 역사상 최대의 위기를 맞았던 조선에게 한산대첩은
대륙침략을 향한 일본의 망할 야욕과 오만을 꺽어버린 화끈한 일대 반격이었다.

역사스페셜에서는 이순신의 승리보고서인 <견내량파왜병장>을 중심으로 한산대첩의 전투과정과 승리요인을 분석하고,추적한다.     

도대체 학익진은 어떤 전술인가?    

또 우리 수군의 화포는 재장전하는데 시간이 적지않게 걸렸다. 그런데 어떻게 재빠르게 포를 쏟아 부을수 있었을까?

학이 날개를 펼친 듯한 진형을 확인할 수 있는 ‘우수영 전진도첩(右水營戰陳圖帖·)’. 학익진은 U자형의 진법으로 적보다 우세한 전력으로 적을 포위해 싸우기에 적합했다. 그런데 해상에서 배가 적선을 향해 이동할 때 측면의 포를 활용할 수 없기 때문에 화력 집중에 어려움이 있다. 조선 함포의 단점을 극복할 수 있었던 비결은 판옥선(板屋船·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전투선. 1층에 노꾼을, 2층에 전투원을 배치했다)이었다.

제작진은 "바닥이 평평했던 우리 수군의 '판옥선'이 한산대첩 승리의 비결이었다"고 말한다. 우리의 전선은 왜군의 병선과 달리 바닥이 평평한 평저선으로 탁월한 선회 능력을 가진 판옥선이었다.  조선 수군은 판옥선의 탁월한 선회 능력으로 화력 공백기인 재장전 시간 동안 공격력을 잃지 않았다는 말이다.판옥선의 선회를 통해 연속적인 포격을 했던 조선 수군의 공격에 조총이 주무기였던 왜군의 반격이란 쉽지 않았다.   

  
  

 

 

 

 

 

 

  

  

진형을 확인할수 있는 우수영전진도첩

 

 

 

 

 

 

 

 

 

 

 

 

 

  

 

 

  

조선 수군의 승전비결은 ' 연속 포사격'

 

 

 

 

  

판옥선의 탁월한 선회능력으로 화력 공백기인 재장전 시간동안 공격력을 잃지 않았다.

 

 

 

  

동아시아 해군의 저력을 보여준 이순신 ' 한국의 살라미스 해전'이라는 평가를 받는 한산대첩.

 

   

이순신을 ‘동방의 넬슨’이라 평다람  영국 해군 제독 발라드의 책

 

  

  

  

 
충무공 이순신(1545∼1598) , 충무공은 무과에 급제하여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를 지내던 때 왜적의 침입이 있을 것에 대비하여, 여수를 중심으로 배를 만들고 군비를 늘리는 등 일본의 침략에 대처하였다. 선조 25년(1592)에 임진왜란이 터지자 옥포대첩, 거북선이 최초로 모습을 드러낸 노량해전, 당항포해전, 한산대첩 등 곳곳에서 전승을 거두었고, 정유재란 때에는 명량대첩 등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그가 죽은 후 1604년 선무공신 1등에 올랐고,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충무(忠武)’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선조 25년(1592) 이곳에 제승당을 짓고, 26년(1593)부터 30년(1597)까지, 해군의 중심 진영으로 삼아 해상세력을 장악하고 나라의 어려움을 이겨나갔다. 그러나 선조 30년(1597)에 제승당을 포함한 이곳 군영이 모두 불에 타서 폐허가 되었다.
그 후 영조 15년(1739)에 제승당과 함께 ‘제승당유허비’를 세운 후 여러 차례 공사가 이루어졌고, 일제시대 때 지방 유지들에 의해 다시 세워지게 되었다.
원래 제승당은 임진왜란 중 충무공이 부하들과 함께 작전계획을 세우고 일을 보던 ‘운주당’이란 건물 자리에 영조 때 집을 짓고 ‘제승당’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다.
경내에는 제승당을 비롯하여 충무공의 영정을 모신 ‘충무사’와 ‘한산정’, ‘수루’ 등이 있으며, 산봉우리에는 한산대첩비와 함께 거북등대가 있다.

 

한산도 이충무공 유적(제승당) 

 

좌수영대첩비 

 

명랑대첩비 

 

** 함께 보면 좋을 책 

 

 

 

  

 

 

 

  

 

 

 

 

 

 

 

  

 

 

 

충무공 이순신의 현충사, 충무공이순신 기념관을 보자..



충무공탄신일인 2011년 4월28일 오늘 현충사 경역밖에 충무공이순신기념관이 문을 열었다. 기념관은 충무공 관련유물과 임진왜란 당시 해전사료를 수집,전시,교육을 위한 역사테마관이다.  전시동 3개실에서는 난중일기 와 충무공의 칼 등 유물 40여점, 교지등 고문서 13점을 전시한다. 문화재청이 기념관에서 충무공을 주제로 특별전을 정기적으로 개최한다니 기대해 보자.   

충무공 이순신 장군은 1545년 , 서울 건천동에서 아버지 이정과 어머니 변씨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충무공은 어린시절 가족과 함께 외가가 있는 충남 아산 백암리로 이주하여 성장하고 혼인하고 무과에 급제할때 까지 살았다..  

충남 아산은 내 고향에서 가까운 곳으로 중,고등학교때 현충사로 소풍을 참으로 많이도 갔다.   

잠시 현충사를 소개하면.................

아산 이충무공 유허(현충사)는  충무공 이순신의 영정을 모신 사당으로 1598년 노량해전에서 순국한지 108년이 지난1706년(슥종32년) 아산지방유생들의 사당건립건의로 세워졌으며, 그 이듬해인 1707년 숙종에게 '顯忠祠'라 사액받았다. 그 뒤 이곳은 200년간 향불이 끊기지 않게 추모하였으나 그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사당철폐되고, 국권피탈이후엔 일제탄압을 받았다. 1932년 동아일보사의 주최로 전국민의 성금을 모아 현충사를 중건하고 영정을 봉안했으며, 광복후에  매년 4월28일(양력)에는 충무공 탄신제전을 올렸다.  1966년부터 1974년까지 본전(충무공의 영정을 모신곳) , 유물전시관(거북선모형, 난중일기,서간첩,교지,각종무기보존), 고택,활터,정문등을 중건하며 현충사 경내확장및 종합적 조경공사를 하며 성역화되었고. 1968년에 현충사관리사무소를 설치하고 관리와 제전에 관련된 사항을 관장시켰다.    
    

현충사와 현충사 유물전시관의 유물

 현충사

 

 난중일기,서간첩

무과홍패 

선무공신교서 

 

 장검  

충무공 묘역 

 

광화문네거리의 동상과 현충사에 모셔신 그냥 이순신 말고 , 온몸으로 난세를 극복해간 인간 이순신을 보자. 

충무공의 국난극복의 정신을 충무공의 후예로서 가슴깊이 되새기며 , 불굴의 의지, 사명감의 표상인 충무공의 삶을 기억하며  더이상 북의 도발에 억울한 희생이 없기를 ..  


나라를 위해 희생한 고인들을 영원히 잊지 않고 기억하겠습니다. 
미안합니다. 반성합니다. 오늘도 순국장병들을 애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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