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아들은 5급한자도 척척 읽는데....엄마인 나는 휴~~~ 

고전을 좋아한다고 떠드는 내가  한자를 알고 있는 수준은 바닥을 친다...  

명문대 사학과, 국문학과에 각각 다니는 이웃집 학생들이 "초등학생때부터 한자공부를 꾸준히 해야돼요..학교공부하는데 반드시 필요해요" 라고 해서 시작된 우리 아들의 한자공부,,, 

초등학교 입학 2년전부터 시작된 한자공부를 가면 갈수록 어려워는 하지만,,, 

꾸준히 한자공부를 하고 있는덕에 학교에서 하는 특성화한자교육시간이나, 국어과목등에서 두각을 나타낸다. 

가끔 공부하다가 막히는 한자문제를 나에게 물어보곤 하는데...난, 어떡해어떡해!! 다..어렵다, 어렵더라!! 

사실 한문을 공부하려고 사둔 책만 5~6권쯤 된다...좋다는책, 많이 팔렸다는 교재, 추천 받은 교재등등... 

하지만 몇장 넘기다 만 책들이다. 암기하는게 참 힘들더라... 

나도 언젠가 원문서를 읽고 싶다... 

한문 문장을 보고 도대체 어디서 어떻게 끊어 읽어야하는지를 제발 좀 알고 싶다... 

사람이름인지, 동사인지 형용사인지...감도 잘 안온다.    

내가 한문을 공부하려고 하는 목적이 뭔가 부터 생각해야 한다.  

부수를 먼저 알아야한다는데...그리고 나서 부수를 이용해서 한자분석, 한자급수도전...? 뭐 그건 차차 생각하고...

 

 이웃집 학생들( 국문과, 사학과)이 추천했다..자기들은 볼만했다고,,도움도 되었다고...

한자의 기원, 문장의 품사, 문법구조, 응용, 실제원문들까지 쉽게 설명해준다.  

차근차근, 쉽게, 기초없는 이에게 도움을 준다니 한번 읽어보고 싶다..  

그러나, 사람마다 틀리니...정말 도움이 되는게 확실할까? 싶기도 하지만....그러나 그건  

공부를 해봐야 하는 문제고.... 현재 우리집에서 썩고 있는 5~6권에 1권 더 더한다고 무슨 큰일이야 나겠나??ㅋㅋ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용어 用語 쓰는말, 일정한 분야에서 주로 사용하는 말.....  

역사용어!! 제대로 알고 , 제대로 쓰고 있나?  누구?  나!! 

정말 복잡미묘,,다사다난했던 우리 역사는 알기고만 있기에도 너무 벅찰만큼 어렵고, 난해하다. 

보면 보면 볼수록 참으로 아리송하기도, 마구 헷갈려 머릿속이 어지러울 때도 많다. 

특히 잘 배웠다고,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용어가 시대에 따라, 사람에 따라 변하고, 부셔지고, 깨지고, 합쳐치면서  

적합하지 않게 쓰인것이 그냥 정착되기도 하고, 학문적으로 정확한 검토없이 그냥 사람들에 의해 쓰이다가 학술용어로 정착이 

되기도 하고, 잘못된것도 모르고 관용어가 되버려서 원래는 그뜻이 아닌데 그 뜻, 즉 의미가 변하기도 한다.   

작년에 조카가 "고모, 한일합방이야?, 한일병합이야? , 한일강제병합이야? 도대체 다 같은 뜻이야? 다 다른 뜻인거야? 이중에서 내가 맘에 드는거 하나를 골라쓰면 되는거야?" 참으로 어렵다!!  

배우는 아이들에게는 정확한 용어 사용이 매우 중요하다. 정확한 용어를 사용할수 있도록 역사를 알아야 한다는..또 똑바른 역사를 우리가 알려주어야 한다는 뜻.이다.. 

 어른들이 예전에 배워서 그냥 계속 쓰고 있는 용어, 그 어른이들이  함께 보편적으로 받아들여 쓰고 있는 용어, 텔레비전등 대중매체에서 쓰는 용어 등....  

왜 가끔 신문을 보면 독자투고, 독자 한마디라는 코너에 '그말 말고 이말로 쓰면 좋겠다'라는 내용이 자주 보이지 않는가?

그말이나 이말이나 다 똑같은 말아니야?   아니다. .아닐수도 있다...아닌것도 많다...다만 모를뿐이다.  

 

 

 

 

 

 

 

<역사용어 바로쓰기> 역사비평사의 책의 서문을 보면 

   
 

 말은 의식을 구속하고 제약한다. 잘못된 용어로 쓰인 역사는 잘못된 역사 이해와 역사 인식을 낳는다. 그렇기 때문에 말을 바로 쓰고 바로 붙이는 일, 역사용어를 바로 이름 짓고 부르는 것 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그래 우리는 근대사회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중요한 주요 개념어들이 대개 일본으로부터 받아들여졌다. 일제가 만들었다가 맞겠다.  당연히 말도 안되고 적합하지도 않은 뜻, 왜곡된 의미들이 많을 것이다.    

안그래도 근대사는 잘 알려지 않았다..여기 '잘'이라는 것은 잘못된 이라는 뜻도,활발하지않게 라는 뜻도 있다.. 

워낙 굴곡도 심하고, 이념도 정신없이 않은가.....??

특히 현근대사의 제대로 된 역사만들기를 위해 꼭 필요하고, 당연한 것이니 숨어있는 뜻, 끄집어 내지 않은 용어의 뜻을  

부디 학자들을 통한 전면적인 검토가 이루어져야한다고 생각한다.   일제가 만든 왜곡된 역사용어는 반드시 고쳐져야한다. 

일본 신나서 춤추라고 우리가 북치고, 장구쳐주면 안되는 일이지 않는가?

부적절한 용어를 적절한 용어로 바꾸는 일은 당연히 되어져야 한다. 우리 스스로  문제인식을 해야만 고쳐지겠지....

항상 생각하지만 역사를 알고, 이해하고, 자꾸 우리 역사를 훼손하려는 나라에게 똑똑히 대응하고, 밀어내려면 역사는 과거가 아니라  현재진행형이라는 사실을 절대 잃지말아야한다,  

과거의 일이 곧 현재의 일이고,  미래를 위한 일이라는 것, 과거의 문제가  곧 현재의 문제 , 미래의 문제이다.  그래서 역사 바로 보기, 바로세우기는 , 바른 용어, 제대로 된 용어에서 비롯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역사를 보는 시각은 다양하다. 여러분야의 여러사람들이 보는 시각에 따라 다양하게 정의될수 있고, 이름붙여질수 있다..  

'역사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책을 쓴 '역사가'를 이해하라고 하더라.  

하나의 용어로만 정리한다는것 자체가 어렵다는 건 누구나 다 안다.

을미사변, 민비, 헤이그 밀사, 대동아전쟁, 정신대, 이조시대,이조백자, 창씨개명,일제시대, 6.25전쟁, 쇄국정책,신사유람단, 극동, 을사조약 ,광주사태이라는 용어는 다 적합할까?  아니다!!  

왜 아닌지를 논의해야 한다. 다함께 이야기 해봐야한다..우리 민족에게 일어난 일을 우리의 시각으로 바라보고 명명하는 건 꼭 필요하다. 역사의 주인은 우리니까...... 

이책을 읽다보면 어? 그래? 응!! 그런거구나? 라고 스스로 느낄수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택리지는 1751년(영조 27년), 실학자 이중환이 저술한 우리나라 대표적 인문지리서이다.    내용을 보면 풍수지리설이 인용되어있다. 실학자답게 실학적 입장에서 저술되었다. 

청담 이중환(1690~1752)은 토지를 기본바탕으로한 정치경제사회의 개혁을 꿈꾼 개혁사상가, 경세치용 실학, 성호학파의 종장 성호 이익(1681~1763)의 재종손이다. 그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워 일찍부터 실사구시의 학풍을 익힌 이중환. 

이후 경종2년에 병조정랑이 되었다가 영조 즉위후 신임사화의 고변자들의 일파로 지목되어 유배된 후 1727년에 유배에서 풀린후 부터 거처없이 20년을 전국을 다니며 얻은 것을 <택리지>로 남긴다.  

 

 <택리지>의 내용은 팔도총론과 복거총론 이렇게 2편으로 나누어져 있다.

팔도총론에서는 우리나라를 팔도 즉 평안도, 함경도, 황해도, 강원도, 경상도 , 전라도, 충청도,경기도로 나누고 그곳의 지리와 지역성을 그 지역출신자와 관련해서 썼다.   

복거총론에서는 살기좋은 곳을 택하여 그 지역의 입지적 조건을 설명하였다.  

실생활에서 도움을 주는 저술방식과, 근대 한국 지리,사회학,경제등에 큰 영향을 준 이중환의 택리지. 

과연 어떤 지리적 요건을 갖춘 곳이 정말 살기 좋은 곳인가?  생활에 큰 이익을 주는곳? 물맑고, 산높은 경치좋은 곳?    

 

택리지를 교본으로 삼아 30년간 답사끝에 다시쓰는 문화,역사 지리서 <신정일의 신 택리지>    

두 발로 쓴 대한민국 국토교과서란 타이틀이 정말 정말 잘 어울린다.

 2006년도에 완간된 <다시 쓰는 택리지>가 다섯권으로 있었다 

 

  

 

 

 

  

 

  

 

 

<신정일의 신 택리지>는 왠지 땀냄새가 나는 매우, 인간적인 매우, 바람직한 답사기같다.

조선시대 전국 가지에서 서울로 통하는 큰길 일곱대로 따라 홀로 걸으며 , 길에 관련된 역사, 사람, 문화를 직접보고 기록하며 역사와 문화, 경제, 인물지리,문화유산, 풍속, 경제상황등을 자세히 적고 있다.  30년의 오랜세월이 묻어나는,,직접 발로 다니며 쓴 글이라서 더 신뢰가 가고, 더 의미있게 느껴지는 답사기이다.

특히 우리 국토를 어떻게 하면 사라져 버리지 않게, 제대로 보존을 위한 제언을 한다. 안타까움과 새로운 의식을 할수 있게끔 일깨우는 저자의 노력에 감사드린다. 좁은 소견을 가진 내가 봐도 물맑고, 공기좋고, 산세좋고, 햇볕좋은 곳에는 어김없이 콘도, 별장, 숙박업소, 음식점등이 과감히 들어서 꽉 막고 있다는 생각을 했으니....역시 내가좋은곳은, 너도 좋고, 얘도 좋고 한가보다...

책에 실린 대부분의 사진도 저자가 직접찍은 것으로 여러 텍스트와 함께 이해하고, 느끼고, 감동하는데 큰 도움준다.  사진자료가 얼마나 독서에 도움을 주는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것이다. 답사기 책을 가기전에 읽고, 다니면서 읽고, 다녀와서 읽을때의 느낌이 각기 다르 듯이......

묵묵히 자기자신의 길을 걸으며 우리 국토를 올곧이 바라보고, 바라본 그것에 대해 마음으로 쓴 이 책의 내용을 보니 우리시대의 진정한 애국자가 아닐까 한다.  발로 걷고, 머리로 생각하며, 가슴으로 쓴< 신 택리지>

완결되기만을 기다린 책~~ 드디어 완결된 책!! 

그 분의 이야기를 보고, 나도 구석구석 걸으며 사람이 살고 싶은곳, 사람이 살만한곳, 자연과 하나되어 살아간 역사문화의 흔적에 대해 함께 논하고 싶다. 

유홍준의 나의문화유산답사기, 신정일의 신 택리지......... 같이 보면 더 좋을듯....나, 복터졌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명랑'과 같은 맥락으로 쓰이는 단어는 무엇인가?  괘활, 생기발랄,밝다,청랑 등등... 

그럼 반대되는 말은?   침울, 우울,궁상? 아~모르겠다..침울한 얼굴, 침울한 표정, 침울한 분위기가 생각나서..김샌다!!

'명랑' 왠지 이응 받침이 두개라서 더 명랑한 느낌을 주는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혹시 점잖으면서 명랑한 사람을 본적이 있나?  누가 그러더라 '난 그런 사람이 이상형이야'라고....참 ~~내!!

요즘 명랑욕(남의 인격을 지나치게 무시하지 않으면서 남을 유쾌하게 만드는욕설)을 얼마나 잘하고 사는냐에 따라 내 삶의 질이 달라짐을 느낀다..참아준다만이 올바른 삶을 사는 100%의 방법은 아니기에..ㅋㅋ 

정말 자연스러운 명랑함이 중요하다.  틀에 박힌것 처럼 보이지만 정말 한결같은 명랑함이 중요하다....

지어낸듯한 부자연스러운 명랑함은 정말 많이 거북스럽기에... 또 지나치게 명랑했다가 갑자기 확~침울해지는 사람을 보면 힘들다 못해 무섭지 않은가..

태생자체가 명랑한 사람은 주위 사람들까지 기분좋게 만드니... 

과히 배우고는 싶지만 잘 되지 않는 일 인듯....생겨먹은게...난 그래서..ㅋㅋ  

흔히 하는 말이 있지 않은가...  ?

1. 규칙과규율을 제대로 엄수하면 이 사회는 명랑한 사회가 됩니다. 

2. 감사의 표시는 명랑한 사회를 만드는 모법답안. 

자, 그럼 사회에서 말하는 '명랑'은 무엇일까? 강압적인 명랑화에 반항하는 사람은 없었을까?  

그 옛날 '명랑'과 요즘 '명랑'은 같은 의미 일까?  

신간을 훑어 보다 보니  '불온한 경성은 명랑하라'라는 왠지 명령받는 듯한...어디서 많이 들어 본 그런 망할말투의 책제목이 눈에 띈다.... 

울산대 국어국문학부 소래섭 교수는 ;일제 총독부의 조선, 특히 경성 지배코드를  '명랑'으로 규정한다.... 

오호라 누가 명령질인가? 했더니 또 그 넘(?)들이다..  의도적으로 또 강요하기의 떼질일것이다. 

식민통치를 위한 일제의 프로젝트의 꼬락서니를 한번보자...  

이제 책 내용을 보자.... 

1920년대말 경성의 인구는 30만명을 약간넘는다. 1930년대말에는 70만명에 달할정도로 급속도로 팽창되었다.  

급히 먹는밥이 체한다고 그런 사회속에서 여러문제가 발생되는건 어쩜 당연한일... 

도시문제해결을 위해 이때 조선총독부가 내건 구호는 '도시 명랑화'였다. 즉, 경성 명랑화 프로젝트인 것이다.  

나도 이야기는 사실 처음 듣는데.... 도시인의 생활,교양,위생, 문화향상,증진을 방해하는 것을 퇴치한다는 것이란다.. 

 '도시명랑화' 이 이름으로 조선총독부 쐬이들은 무슨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려 했을까?  

공장에서 찍어낸듯한 제품같은 사람을 만들려는 속셈이 빤히 보인다.  총독부의 체재에 언제나 '네'하고 순응하는 사람, 그 체제에 저항하는 세력을 뿌리 뽑으려는 그들의 속셈@@  

그들은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명랑'의 반대개념이 아닌 '불결, 불량, 퇴폐,저급,불온,불신같은 뜻으로 끌고 나갔다고 한다. 그러니 당연히 건전, 정화의 의미를 만들어내겠지... 

왜 지금 '명랑'이와 과거를 많이 물어보고싶은 과거의 '명랑'이는 다른것일까?  

'명랑'이라는 단어에 숨겨진 문화적,역사적 '명랑'의 의미는 의외로 진지하다. 

식민지시대에 행해지는 강압통치를 아주 정당화하기 위한 방법으로 도시 명랑화, 두뇌명랑화,감정명랑화라고 저자는 말한다. 

세상이 바뀐 지금 시대에는 명랑화라는 말은 더 이상 쓰지 않는다...그러니 나도 모르는거 아닌가? '쿨하다'라는 단어로 표현하면 모를까?  하지만 이 책을 읽고 정말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 진정 명랑화라는 말이 쓰이지 않는지...생각해보라@@ 의외로 있다....말은 못하겠다...잡혀갈까봐!!! 

이 책이 흥미로운 점은...조선총독부의 명랑정치를 구경하는게 전부가 아니라는 점이다...그 명랑정치속에서도 재미를 찾으려고 했던 사람들...즉 반항아들....명랑과 건전을 거스르는 사람들!! 진정한 명랑인이 아닐런지.....  

왜 슬프면 안돼나? 내 감정이 시키는데로 좋은면 좋고, 싫으면 싫고, 행복하면행복하고, 슬프면 슬픈대로.....살면되지!! 

꼭 아닌척,,안그런척 해야되나? 누굴위해서....??

이 책에서  '명랑'이란 단어로 그 시대를 보고, 그 시대사람들을 바라보고, 명랑화 운동의 잔재여파가 언제까지 미쳤는지도 봐 보자...

** 이책과 함께 보면 더 좋을듯...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침묵의 황태자, 시대의 경계인, 망국 한의 상징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 이은' 

오늘 KBS역사스페셜에서는, '시대의 경계인-마지막 황태자 영친왕 이은'을 방송했다.  

조선왕조500년 망국한의 상징인 영친왕의 기구한 일생을 조명하고, 그가 조선 백성들의 차가운 시선속에서도 일생을 침묵했던 이유를 알아본다.   

태평양 전쟁 반발직전인 1941년 당시 중국 전선을 시찰하던 사람은 일본 육군 중장 신분의 조선인, 영친왕 이은이었다. 

영친왕 이은은 고종의 아들이자,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다.  

그는 왜 일본 군인이 되었는가? 

영친왕 이은(1897~1970),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 고종과 귀비 엄씨사이에서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순종과 덕혜옹주와는 이복형제이다.    

 

 

 

고종에 대한 일본의 양위압박으로 강행된 양위식때 1907년 그의 나이 10살때 황태자에 책봉(엄마 엄귀비의 궁중내에서의 힘이 대단했던건지, 일본에게 이용당한건지) 되었으나 4개월뒤인 그해 12월 , 조선통감인 늙은염소 이토 히로부미(조선에 을사조약을 강요하고 헤이그특사사건을 빌미로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켰다. 이놈도 일본에서는 근대화를 이끈인물로, 조선에서는 조선식민지화에 앞장선 원흉으로 하얼빈에서 안중근의사에 의해 저격당해 죽었다)에 의해 강제로 일본 유학길에 오른다. 유학은 무슨 유학? 고종의 반일적인 감정에 대한 압박 수단으로 그의 아들을 볼모로 잡은 것이다.  

 

그렇게 일본으로 끌려간 영친왕은 신유학 문명의 이름아래 일본인으로 교육되어진다. 일본육군사관학교등을 거치며 군인생활을 하던 중 1917년 일본황족여성 이방자와 혼혈정략결혼을 한다. 고종 승하 이듬해이다.정략결혼은 한국과 일본의 융화를 심화시키려는 속셈이며, 일본이 주체가 된 결혼자체가 대한제국 황실을 철저히 무시한 처사다. 사실 조선인의 애국열, 교육열은 순전히 조선의 미래를 위한 것이었다. 조선인의 민족정서로는 자의든 타의든 영친왕 이은의 결혼 자체를 받아들이기가 너무 힘들었을것같다. 

  

 

 

 

덕혜옹주도 일본과의 강제정략결혼의 희생자 


황태자를 바라보는 조선인의 시선은 얼마나 차가웠을까? 1945년 일본패망직후 일본의 신헌법 시행으로 영친왕부부는 특권을 상실하며 왕족에서 평민으로 전락한다. 생활고로 결혼후 살았던 저택도 매각했다..그렇다고 환국 또한 쉬운일은 아니었다. 당시 대통령 이승만은 영친왕의 정치적 입지를 우려해 귀국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1963년 반신불수의 몸으로 일본으로 끌려간지 56년만에 고국으로 돌아온다. 7년간의 실어증, 뇌일혈로 투병하다가 일본으로 끌려가기전 22일동안 살았던 창덕궁 낙선재에서 영면한다.  

 

 

 

그는 창덕궁 낙선재로 얼마나 돌아오고 싶었을까? 그는 정말 타의에 의해서 살수 밖에 없었을까? 일생동안 고난의 길을 걸은 사람이라는 그의 무덤 옆 비석의 비문의 뜻이 정말 사실일까?  

고종의 붕어 후 3.1독립만세운동, 순종의 승하로 독립운동이 반복될것을 우려하며 일본의 조선 식민통치의 최대위기를 맞을때 그는 어떤 역할을 했었어야했는가.? 

방송내용 중 박한웅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실장의 말을 옮겨본다. 

   
  "영친왕은 한편으로는 대한제국 황위 계승자라는 존재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일본황실의 일부였습니다. 그 얘기는 한편으로는 절반은 일본인이라는 비난이 언제나 따라다녔고, 또 일본에서 살던 절반은 조선인이라는 비난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화려한 영광도 있지만 자기의 정체성이 한국에도 환영받을수 없었고, 일본에서도 환영받을 수 없었던 경계인의 삶이었단 것, 다른 한편으로는 나라를 망하게 한 책임자 또는 친일파 또는 망국노라고 하는 비난속에서 어떠한 말도 할수 없었던 존재 그러한 존재들이 망국의 왕실들이 보여주는 모습입니다."
 
   

* 관련 책 보기 

    

 

 

 

 

 

 

 

 

 

 

 

 

 

 

 

 

 

 

 

 

 

 

 

 

 

 

 

 

 

 


댓글(1)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1-05-13 11:11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