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항아리 동양고전시리즈 제 3권 <손자병법>

 중국 제나라 출신으로 춘추전국시대 오나라의 왕 합려를 섬긴 손자 孫武(본명 손무) 가 지은  

<손자병법>은 작전의 성전聖典으로 중국뿐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무신들의 지침서였다.

건양대 김원중교수의 번역으로 글항아리에서 출간되었다.

이 책에서 손자는 "싸우지 않고도 적을 굴복시키는 것이 착한 자의 으뜸"이라고 가르치고 있지만 "일단 싸우면 반드시 이기는 방법"도 알려주고 있다.  


 

 글항아리 동양고전 시리즈이다...   

열린정치와 소통의 리더십의 성전聖典 시리즈 제 1권 정관정요,   

제왕학의 성전聖典 2권 한비자...    

작전의 성전聖典 제3권이 요~~~ 손자병법이다. 



  손자병법을 읽고, 아니면 손자병법을 읽기전에 어떤식으로든 탄력을 받아보고 싶다면....이책을...읽는것이 좋겠다!! 


   

   

 

  

  

 

 책 제목이 <유럽사 산책 >인 만큼... 

내용면에서는 나에게 절대 부담은 주지 않을것같다.

 왠지 책상위에 앉아서만 써내려간 내용이 절대 아님을  믿고싶다.   

이 책을 위해 저자가 1년동안 유럽 20여개나라, 60여개 도시를 누볐다고 한다. 저자는 어떤 사람을 만나고, 또 무얼보고 무얼느꼈을까?

유렵 연합(EU)....서로 유기적인 관계인 그들......

그 들의 역사도 그 처럼 하나의 흐름으로 엮어져 있을까? 

찡하고, 쉽지만 결코 가볍지않은 생생한 글, 사람냄새 팍팍 풍기는 글을 기대한다.. 

꼭 읽어야지!  와~~ 페이지수 한번 소담스럽네......~~ 

 

 

<클릭, 한국미술사> 

시대별로, 분야별로 나누어 한국미술을 이야기 한다.  

 책 구성이 자랑하는 말을 들어보자. 

회화에서 건축, 선사에서 근대 까지 정통 한국미술사를 알려주며, 

각 분야 전공자들의 밀착된 친근한 해설, 

인터넷 세대를 위한 입체적 편집, 

역사의 외곽까지도 잘 챙기는 , 제대로 짜인 通史를 말하며 

한국미술 관련 교양이 필요한 학생, 강의 하는 선생님, 한국 미술 전공을 택한 새내기 학생,  

그밖에 나같이 한국미술, 한국문화라면 사족을 못쓰는 사람들~~~읽으랍니다...!!! 

책이 판형은 괜찮은데...... 

좀 겸손한 디자인이네요~~ 하기사 뭐 책얼굴이 그렇게 중요한가요...책내용인 마음이 중요하지요.. 사람이 그러하듯...... 

그러나...그치만....그래도~~~

생긴게  좀 서운합니다..그려!!!   명색이 한국미술사 관련 책인데.....ㅋㅋ

   
 

 회화편은 시대별로 일반회화, 불화, 근대의 경우 서양화와 동양화를 다루었으며 작가와 작품을 함께 서술하여 자연스럽게 풀어나갔습니다.
조각편은 불상 중심으로 각 시대 작품들의 의미, 흐름, 재료와 제작기법을 설명하였습니다. 토우, 십이지상과 무덤 조각, 장승 등 개별적 주제에 대해서도 꼼꼼히 조명하였습니다.
도자편에서는 토기-청자-백자의 막연한 상식을 벗어나 다양한 작품과 세부 특징을 정리한 표들, 가마터와 운송경로 등 뒷배경까지 살펴보는 풍부한 지식을 만날 수 있습니다.
공예편은 불교공예와 금속공예 양식과 사례를 질 좋고 풍부한 도판 자료로 들여다봅니다.
건축편은 사찰의 공간적.구조적 특징과 시대에 따른 변화를 알아보고,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을 중심으로 세계에 자랑할 만한 우리 건축사의 업적들을 살펴봅니다.
석조편은 석탑의 체계와 변화과정에 더해 석등, 석비, 당간지주, 승탑 등 상대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석조물들을 보는 방법 또한 알려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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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신분제는 양반~중인~상민~천민의 구조이다.  
 
양반은 지배 신분층을 말하고, 문반과 무반을 총칭하는 개념이기도 하다. 
말 그대로 왕이 조회 朝會할때 왕을 중심으로 東은 文班, 西는 武班으로 나누어 섰는데...이 두 班열을 양반이라고 하는 것이다. 
 
 양반.. 사대부士大夫 <사림士林< 사류士類<  사족士族, 이는 갈수록 더 넗은 범위의 양반층으로 말하는 용어다...  
 
양반은 조선의 지배 신분층으로 벼슬을 얻어 나라 관리로서 정치를 하고, 사회적으로나 경제적(토지,노비)으로 특권을 누리며 
그 뿌리를 단단히 내린다. 노비를 대대로 물려줄수 있고, 자녀들에게 재산도 물려 줄수 있는...특권을 누린...그들.!!! 
 
<조선양반의일생>에서 보면 양반의 생애를 국가의 중심 세력이면서 조선 사회의 그늘이기도 했다고 표현했다.  
정말 한 문장으로 그들을 가장 잘 표현한 했다고 할수 있다. 

 

<조선을 이끈 명문가 지도> 

권오영,김문택,김학수,성봉현,이근호,이기순,이상필,이성무,이영춘,임선빈,한희숙 공저다.
 
 조선을 이끈 명문가에 대한 계보학적, 인문학적으로 따라 가는 그들의 이야기를  

읽어보자....  

 

 

   
 

 인간 행동을 연구하는 행동과학자 혹은 경제심리학자가 조선시대를 파고든다면 무엇보다 먼저 가문의 족보와 그 계보에 얽힌 다양한 변수들을 묻고 따질 것이다. 조선을 이끌어간 양반들의 행동을 가장 근저에서 규정한 것은 바로 ‘가문의 논리’였기 때문이다. 그간 조선시대를 다룬 역사 연구는 이 ‘가문의 논리’에 소홀했다. 이 책은 이러한 점에 착안하여 조선시대 대표 가문의 계보가 어떻게 설정되고 서로 얽혀들었으며, 각 가문을 지탱한 가문의 철학, 인적 구성, 문화적·경제적 여건 등을 종합적으로 조명함으로써 조선시대 역사를 움직인 ‘실질적인 변수’이자 잘 드러나지 않는 ‘내재적 변수’의 한 측면을 파헤치고자 한다. 이성무 전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이 이끄는 뿌리회 및 뜻을 함께하는 연구자들은 현지답사와 문헌 연구를 토대로 하여 전체 4권 분량으로 조선을 이끈 명문가에 대한 계보학적, 인문학적 탐색을 해나갈 예정이다.

 
   

 

맘먹은대로..즉 계획대로 꾸준히 시리즈로 출간되면....기꺼이 감사히 읽는다.
난 왜 그렇게 시리즈를 좋아하는지.....뭔 맘인지...참~~   

판형 좋다~내 개인적으로 말이다...   기왕이면 다홍치마라고~~ㅎㅎ!!  

그럼,

권력 과 부를 지녔고,,,게다가 지식으로 까지 무장한 무리들은 누구인가? 
예상대로 '양반 '이다. 

관료체제가 확립(경국대전에서 성문화됨)되면서 양반의 개념은 관직을 가진이뿐아니라 그의 가족과 家門까지를 의미하도록 그 범위가 넒어진다.

가문...이라는 건  한마디로 양반 중에서도 베스트 오브 베스트 인거다.   

양반도 급이 있다. 양반이라고 해도 다 같은 양반이 아닌것이다.  

조선 사회에는 가통家統, 학통學統, 대통大統이라 하여 이른바 3통이 존재했다. 학문적 전수의 계통과 질서를 담은 학통이 ‘학문권력’을, 왕통의 계승을 뜻하는 대통이 ‘정치권력’을 상징한다면 가계의 계승을 뜻하는 가통은 ‘가문권력’의 상징이었다

16세기 이전에는 본인의 능력으로 성취되는 삶을 사는 사회였다면 그 이후에는 개인 가치가 가문속에서 좌지우지 되는 

양상을 보인다. 즉  이 시기의 조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가문을 먼저 알아야 한다는 뜻이다.

   
  조선의 양반사회에서 가문의 존재가 부각되고 그 영향력이 강화된 것은 17세기 이후였다. 17세기를 기점으로 이런 변화가 나타난 것은 혼인 및 상속제도의 변화와 관련이 깊었다. 혼인에 있어서는 남귀여가혼男歸女嫁婚을 제한하는 대신 친영親迎이 강조되고, 상속에 있어서는 자녀균분에서 봉사조의 강화를 통한 장자 중심으로의 변화가 그것이다. 특히 왜란 이후 예학에 대한 이해가 심화되고, 『소학』 『가례』 등 주자학적 실천윤리나 예제가 사회 전반에 깊이 뿌리내리면서 세상의 모습도 크게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이른바 ‘예학禮學의 시대’ ‘종법宗法의 시대’가 그 서막을 열게 되었으니, 그것은 곧 부계친 중심의 ‘남자의 시대’ ‘가문의 시대’를 뜻했다  
   

이책의 저자들은 말한다. 

가문 간의 연대는 정치·학문·사회 등의 분야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이루어졌다.가문을 알면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지고, 사료를 해석하는 맛도 달라진다 

   
  가문을 보전하기란 참으로 힘든 일이었지만 조선의 명가들은 슬기로움과 지혜를 바탕으로 집안을 유지·발전시켰고, 저마다의 가풍을 이어주며 역사의 주역으로 활동했다. 그러면 명가의 기준은 무엇인가? 양반 사대부에 있어 왕조 500년을 관통하는 최고의 가치는 역시 벼슬이었다. 명가의 일차적 요건은 벼슬이라 하겠지만, 벼슬만 이어진다고 그 조건이 충족된 것은 아니었다. 명가가 되려면 가풍과 저력이 있어야 하고, 그것은 당대인에게 모범이 되거나 역사 발전에 기여하는 무언가여야 했다. 가령 청백이나 효열이 그런 예일 수 있고, 도학이나 문한 혹은 절개나 의리를 생각해볼 수 있다.  
   

그럼 이 책에 소개된 그 대단한 10개의 명문가는 어떤 집안인가? 
이름만 들어도 고개는 끄덕여 진다. 

   
  이 책에 소개된 10개의 가문은 이러한 경향을 망라하는 조선의 대표적 명문가들이다.이들 가문은 서울 및 경기, 호서, 영남 등 그 터전이 서로 달랐고, 학파나 정파 그리고 가치와 지향도 한결같지 않았다. 하지만 이들은 사림시대를 살며 정치·학술·문화계의 리더로 활약하며 시대정신에 충실했고, 자가의 번영을 넘어 세상의 발전을 함께 고민했다는 점에서 역사의 주역이자 선각자들이었다. 그리고 자신들에게 주어진 시간과 공간, 삶의 환경과 조건들을 조화롭게 용해시켜 여느 가문과는 차별되는 가풍을 창조하고, 또 지켜옴으로써 전통시대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더욱 풍요롭게 했다. 그래서 이들이 남긴 삶의 자취는 특별한 집안의 이채로운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공유하고 공감해야 할 역사적 자산이 된다. 이것이 이들 가문의 역사와 전통 그리고 삶의 흔적을 이 한 책에 담아 펴내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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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으로 읽는 한국 근대의 풍경>  이충렬....  

간송미술관을 세운 간송 전형필의 일대기를 한 권의 책에 담았던 <간송 전형필>의 저자다.

이 책은 개항부터 한국전쟁에 이르기까지를 그림을 통해 바라본 책이다. 

저자는 10년 전부터 해외에서 떠도는 국내외 작가들의 한국 근대 관련 그림과 자료(당시 문헌, 국내외 신문기사, 외교문서)들을 수집해왔으며 1898년부터 1958년 사이에 그려진 그림 86점을 통해  근대, 현대사를 꼼꼼히 살펴본다. 

희귀 사료와 국내 최초로 공개되는 그림들도 다수 있다고 하니 더 보고싶었다. 

 

   
   이 책은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 사건, 장소에서 역사의 흔적과 사람의 이야기를 좇고 있다. 봉건시대가 막을 내리고 근대가 시작되어 전개되는 과정, 그 시기를 관통했던 주요한 정치적 사건과 사회 문화사를 그림을 통해 추적했다. 개항부터 해방 후까지, 역사를 목격한 결정적 그림을 통해 마침내 근대를 만난다.

국내외 화가들의 작품 86점, 일본 통감부와 외무성의 비밀문서, 미국 국무부 문서와 재판 기록, <고종실록> <순종실록>의 기록, '황성신문' '독립신문' 등의 기사까지. 풍부하고 정확한 사료와 그림의 생생한 증언을 통해 한국 근대사의 숨겨진 이면을 집요하게 추적해 밝혔다. 희귀 사료와 국내 최초로 공개되는 그림들도 다수 수록되었다.
 
   

 

책에 나온 내가 개인적으로 맘에 드는 그림 몇장을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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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을 생각하면  머리아프다, 옳은것이뭐고, 그른것이 뭔지 조차 헷갈린다. 

 그들이 계속 살아있었다면....오래도록 역사속에 숨쉬고 존재했더라면...혹시 우리의 역사가 달라졌을까?  의문도 생긴다.  

 

 

 

 

   

 

 

 

 

 

고종,,,그리고 김옥균을 그냥 스치듯 바라보면..... 

그들은 도대체 나라를 놓고 무슨 시도를 했었나? 이다. 

이리 뜯어먹히고, 저리 뜯어 먹히려는 나라를 위해 ~~ 과연 그들은 무엇을 하려고 했었나?  

청과 일본사이에서 공처럼 이리저리 차이다 버려진 사람들인가?

개화정책을 사이에 두고 고종 과 김옥균은 각자 어떤 생각을 했었나 말이다.!!    

그들은 왜 쫓기고  쫓는사이..... 죽이니까 죽어야 되는 관걔였던건지?

 

너머가 찾은 사람들 시리즈  

1권  새로 읽는 고종시대사 <고종44년의 비원> 과   2권 <김옥균, 역사의 혁명가 시대의 이단아>  

 

<고종 44년의 비원> 저자 장영숙의 한마디를 보자 .

   
  고종은 꽉 막힌 군주가 아니었다. 유연한 대외인식 속에서 당대 사람들 대부분이 오랑캐라며 멀리 하던 일본과 서양을 동시에 품었다. 부족한 문물을 그들에게서 받아들였다. 개화된 나라와 부강한 국가를 꿈꾸면서 개혁을 추진하였다. 의정부 대신들과 갈등을 일으키면서까지 소장 개화파를 총애하였다. 넘어지고 실패를 거듭하면서도 개화를 추진하기 위한 관제개편을 끊임없이 단행하였다. 중국을 통해, 일본을 통해, 서양을 통해 많은 서적들을 들여오게 하였다. 책을 통해 서양을 배워나갔고, 신진지식인을 장려하였으며, 한국을 문명국으로 이끄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이른바 개화정책의 선두에 고종이 있었다.  
   

 

<김옥균, 역사의 혁명가 시대의 이단아> 박은숙의 한마디를 보자. 

   
 

 만일 그때 죽지 않았다면, 김옥균은 또 어떤 모습으로 우리에게 비추어졌을까? 친일파, 독립운동가, 무역상, 방랑 시인, 투기꾼……. 무한 상상이 가능하리라. 많은 사람이 박영효처럼 친일파가 되었을 것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김옥균이 죽을 때와 자리를 잘 선택한 것이라고도 한다.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대담한 기질과 모험적 열정,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성격, 조선의 독립을 향한 일편단심 등을 반추해보면, 오히려 만주 벌판의 독립운동가나 세계를 누비는 모험적 무역상, 누군가의 자본을 이용한 광산 경영자 등의 모습을 상상하는 게 더 자연스럽다.

 
   
 

 애국과 매국의 양 극단의 평가를 받는 주인공 김옥균,  

능력 있는 군주인지....아님 무능력한 군주인지 너무 많이 헷갈렸던 고종.... (어쩜 지금도 헷갈리는중~~)

여러 각도로, 여러 사료들을 많이많이 살펴봐야~~만이  둘다 인정하든 아님 둘다 인정안하든,,, 

좋은 결론이든, 아님  어정쩡한 결론이든 내릴듯...하다.!!   

바라만 봐도 상처가 될듯~~  

시대가 사람을 그리 만든건지? 아님 사람이 시대를 그렇게 만들어 놓은건지....쯔읏~ 

짊어지기엔 너무 무겁고, 힘든 커다란 짐이었던 것만을 생각하며 그들을 바라볼까도 싶다.!!

 

조선 역사상.......

연산군,,,그리고 광해군을 함께 포함해서 승자처럼 보이는 이들에 의해 평가되어질수 밖에 없는 그들이 안쓰럽다.!!  

새로운 조명~~ 그래 분명히 필요하다!! 객관적으로 정확히 말이다..

그들이 말하고자 하는것, 그들이 하려고 했던 일, 그리고 오해,아님 진실,  다면적이거나 혹 일면적이거나~~

치열해보이다 못해 처절해 보이는 그들의 삶을 살펴보자~~ 

그들의 일면 일면을 모으고 모아서 다면적인 걸 어디 한번 만들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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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운동사 연구자이며 전 독립기념관장을 지낸 김상웅이 쓴 < 이회영 평전> 

이 평전을 서술하면서 저자가 가장 강조한 이회영의 모습은 '노블레스 오블리주'   

저자는 말한다.

   
 

 국가와 정부가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지, 지도층의 의식과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온몸으로 보여준 이회영은 '살아있는 교과서'이자 '지나간 미래상'이다.

 
   

'노블레스 오블리주' noblesse oblige란?  

사회 고위층 인사(높은 사회적 신분,고귀한신분)에게 요구되는 높은 수준의 도덕적 의무를 말한다.... 프랑스어로 정당하게 대접받기 위해서는 명예만큼 의무를 다해야 한다는 뜻이다.

기부활동과 특히 전쟁과 같은 국난에 기득권층의 솔선 자세가 더욱 필요한....그런 세상에서

투철하고 솔선수범하는 자세의 삶.......의무에 충실한...그런 의식있는 삶.....이것이 진정한 명예렷다..!!  

대한민국에서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보여준 이들은 누가 있을까?  

정직하게 벌어 바르게 쓴 유한양행, 유한양행을 설립하여 민족자본 형성에 기여한 기업인 유일한 柳一韓 1894~1971, 그는 손에 꼽히는 부자였음에도 보통인보다 소박한 생활을 한것으로알려져 있다. 우리나라 최초로 종업원 지주제를 실천하고, 물론 회사도 자식에게 물려주지 않고, 경영전문가에게 맡겼으며(전문경영인 등장의 길을 여는 선구자적 역할) 재산도 모두 사회사업에 내놓았다. 이렇듯 기업 경영으로 민족자본형성에 기여한 사업가이며 , 독립운동가인 유일한...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 

유통업으로 벌어들인 전 재산을 기부해 기근에 시달리는 제주도민을 살려던 김만덕 1739~1812, 이가환이 시를 지어 헌정하고, 영의정 채제공이 <만덕전>이라는 전기를 써서 바쳤던 시대를 뛰어넘은 창의적인 자선사업가,여성기업인이다. 현재 '김만덕 나눔 쌀 만섬 쌓기 운동이 추진되어 그 정신,뜻을 기리며 이어가도록 한 나눔과 봉사의 표상 김만덕...  

400년 동안 9대 진사와 12대 만석꾼을 배출(1대 최진립1568~1636부터 12대 최준1884~1970까지)한 경주 최부자집(경주최진사집), 나라에 흉년이 들면 집앞마당에 100일동안 대형 가마솥을 걸었고, 나라를 빼앗겼을땐 독립운동자금을 대다가 재산을 압류당하고, 광복후에는 모든 재산을 학교에기부했다. 가훈도 사회환원과 인간에 베푸는 삶을 살도록 정하여 원칙을 지켰다.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은 하지마라, 만석이상의 재산은 사회에 환원하라,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흉년기에는 재산을 늘리지 마라, 시집온 며느리들은 3년간 무명옷을 입게하라, 사방 백리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이다. 부와 권력의 유착을 경계했고, 욕심부리지말고 사회환원을 말하며,신분의 귀천을 따지지 말고 사람을 아끼고 사랑하고,검소하게 절약하는 교육을 며느리에게 하며, 상부상조를 가르쳤던 것이다. 이 신념으로 사회복지에 힘쓴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우당 이회영의 삶을 살펴보자.   

우당 이회영을 알게 된 건 <조용헌의 명문가>에서 처음으로... 그 다음 더 자세함을 원해 <이덕일의 이회영과 젊은 그들>을 읽으면서 였다.

 

 

 

 

 

 

 

 

 

 

우당 右堂 이회영 李會榮 1867~1932  

백사 이항복李恒福 의 11대 후손이며 백사 이항복이래 8대를 이어 판10명의 재상을 배출한 명문가 집안의 6형제중 넷째아들이시다.  

위로 형 이건영, 이석영, 이철영 아래로  동생 이시영과 이호영이 있었다  

동생 이시영은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이다.  

이회영은 형제 넷은 독립투쟁으로 잃었고, 자신도 고문끝에 순국했다. (동생 이시영만 홀로 남아 초대부통령을 지냄)

백사 이항복을 먼저 살펴보자. 

백사 이항복李恒福  1556~1618, 한음 이덕형과의 돈독한 우정으로 그 들의 일화는 한번은 다 들어봤을만큼 유명하다.  임진왜란때 선조를 보필했으며, 전란후 병조판서로서 나라수습에 힘썼다.이후 좌의정, 영의정이 되었으며, 광해군 즉위후에도 정승에 자리에 있었으나, 폐모론에 반대입장에 서며 삭탈관직되어 북청에 유배되었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관직수행능력, 청렴,근검, 도덕,경효,인의등의 덕목을 겸비한 조선시대 이상적인 관직자에게 주어지는 청백리의 대표적인 인물이다.(총217명배출) 

경주 이씨 백사공파의 일원인 이회영,,

1910년 강제로 한일합병조약이 체결되어 나라를 일제에 빼앗기자 신민회를 결성하고, 독립운동을 위해 이회영은 형제들에게 전 가족이 만주로 이주해 일제와 싸우자고 하며 “이것이 대한 민족된 신분이요, 또 왜적과 혈투하시던 백사白沙(이항복) 공의 후손된 도리라고 생각한다. 여러 형님들과 아우님들은 나의 뜻을 따라주시기를 바라노라”고 설득했다. 

여섯 형제의 전 재산을 팔아 마련한 돈 약 40만원(현재화폐가치로 600억원정도, 당시 쌀 한섬이 3원이었다)을 갖고 여섯 형제 일가를 모두 이끌고 만주로 가서 독립운동에 전념한다 .  

경학사, 그리고 신흥무관학교..... (설립당시 신흥강습소라는 명칭)설립

신흥무관학교는 우당 이회영과 그의 형제들 그리고 신민회 동지들이 모든 걸 다 걸고 설립, 운영한 독립군 사관학교, 대한 독립군의 요람이다.  

물론 설립자금은 이회영 형제일가의 전 재산을 처분하여 마련한 40만원이었다. 

   
 

 '이것이 대한민족 된 신분이요, 왜적과 싸운 백사 이항복 공의 후손 된 도리다' 라며 

온갖 고난과 가난한 삶속에서도 평생 포기하지 않은 독립운동  

우당 이회영 

그가 죽음으로 실천한 것은 사회 지도층의 높은 도덕적 의무였습니다.
 
-KBS 한국의 유산 중에서 --

 
   

2011년 6월 10일은 신흥무관학교 설립 100주년이 되는 날이다. 신흥무관학교는 일제강점기 항일무장투쟁의 상징이자 요람이었다. 전략전술, 검술등을 교육, 무장독립투쟁사에 찬란하게 빛나는 청산리대첩·봉오동 대첩의 주역(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은 북로군정서, 대한독립군과 함께 청산리 대첩에 참여, 일본군 1만 2000여명을 사살)들도 대부분 신흥무관학교가 길러낸 독립전사들이었다. 1911년 설립하여 1920년 폐교하기까지 10년 동안 항일전사 3500여 명을 길러냈으니 가히 ‘독립군 사관학교’였다 

이철영, 이동녕, 이상룡, 여준, 이광 등이 교장을 역임한 신흥무관학교는 1911년 12월 김연, 변영태, 이규봉, 성주식 등 40여 명의 청년들을 특기생으로 배출한 것을 비롯해 1919년 11월 안도현 삼림지역으로 이동할 때까지 약 3,500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졸업한 생도들은 청년 독립운동을 펼쳐 행동조직을 조직(의열단,다물단)하고, 일본밀정을 암살하는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이렇듯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은 중국은 물론 국내에서 벌어진 수많은 항일무장투쟁의 현장에서 주축으로 활약했다.  

또한  조선의 국권상실후 국권회복을 위한 방법으로
네덜란드에서 열리는 제2차 만국평화회의  헤이그 밀사파견을 주도하며, 가장 절친이자 동지 이상설을 대표로 보낸다.

그리고 고종의 급서로 물거품 된 계획 고종의 국외 망명을 추진한 계획 등이있다.!  

명문가의 자손,,,그는 왜 인간의 절대자유, 절대평등을 주장하는 아나키즘을 받아들이고, 목숨을 바치며 독립운동을 했을까?

   
   우리나라에서 아나키즘은 독립운동의 한 형태로 수용되었다. 귀족 출신의 이회영이 아나키스트가 된 것은 개인적 성향 외에도 아나키즘이 독립운동 이론으로나 해방 후의 정부 수립 이론으로 적합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회영의 아나키즘 이론은 ‘만인이 평등하다’는 원리를 실천해나가면서도 공산주의처럼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빠지지 않고 개인과 사회의 자유를 확장할 수 있는 현실적 방책이었다. 이회영이 아나키즘을 자신의 사상으로 확정지은 때는 1923년 9월로, 이회영은 이미 57세로 환갑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회영은 여러 청년들과 교류하며 아나키즘이란 사상이 자신의 평소 지론과 맞다고 생각을 굳힌 뒤 아나키스트를 자처한 것이다. 이회영은 천진에서 살던 1927년 김종진이 방문하자 토론 끝에 그를 아나키스트로 전향시킬 정도로 단단한 이론적 토대를 갖추고 있었다. 이회영이 아나키스트가 된 것은 젊은 아나키스트들에게 큰 힘이 되었다. 이회영과 북경의 한인 아나키스트들은 조직적 운동을 전개할 때가 되었다고 판단하고, 1924년 4월 말 북경에서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무련)을 조직했다. 그들은「정의공보」를 발행해 자신들의 운동노선을 천명했는데, 이회영이 극도의 궁핍 속에서도 그 발행자금을 부담했다. 후일 이회영과 젊은 아나키스트들은 남화한인청년연맹(남화연맹)이라는 아나키즘 조직을 건설해 상해의 일인들과 친일 주구들을 공포에 몰아넣는다.  
   

이렇게 중국 망명후 상해, 천진을 오가며 독립운동에 매진하던 이회영은 

상해를 점령한 일본군때문에 독립운동가들의 활동공간은 점점 좁아지므로 상해를 떠나 만주를 새로운 독립운동무대로 삼으려 했다. 새로운 독립운동의 전기를 마련하려는 과정에서 이회영은 일본 밀정의 밀고로 체포, 여순감옥에서 혹독한 고문을 받고 1932년 11월 17일 순국했다. <이회영과 젊은 그들>에서 보면 고문사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일제는 이회영의 시신을 서둘러 화장했다고 한다. 죽음을 각오한 항거이며, 젊은 동지들을 지키기 위한 칠순 노인의 외로운 투쟁이었다. 

삼한 갑족의 후예로 태어나 전 재산, 일생, 목숨까지 나라에 바친 이회영....  


 <------  이런 망할 넘이 골백번 죽었다 깨어나도 감히 쳐다볼수 없는 분이시다....우씨~눈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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