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사 연구자이며 전 독립기념관장을 지낸 김상웅이 쓴 < 이회영 평전>
이 평전을 서술하면서 저자가 가장 강조한 이회영의 모습은 '노블레스 오블리주'
저자는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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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와 정부가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지, 지도층의 의식과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온몸으로 보여준 이회영은 '살아있는 교과서'이자 '지나간 미래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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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블레스 오블리주' noblesse oblige란?
사회 고위층 인사(높은 사회적 신분,고귀한신분)에게 요구되는 높은 수준의 도덕적 의무를 말한다.... 프랑스어로 정당하게 대접받기 위해서는 명예만큼 의무를 다해야 한다는 뜻이다.
기부활동과 특히 전쟁과 같은 국난에 기득권층의 솔선 자세가 더욱 필요한....그런 세상에서
투철하고 솔선수범하는 자세의 삶.......의무에 충실한...그런 의식있는 삶.....이것이 진정한 명예렷다..!!
대한민국에서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보여준 이들은 누가 있을까?
정직하게 벌어 바르게 쓴 유한양행, 유한양행을 설립하여 민족자본 형성에 기여한 기업인 유일한 柳一韓 1894~1971, 그는 손에 꼽히는 부자였음에도 보통인보다 소박한 생활을 한것으로알려져 있다. 우리나라 최초로 종업원 지주제를 실천하고, 물론 회사도 자식에게 물려주지 않고, 경영전문가에게 맡겼으며(전문경영인 등장의 길을 여는 선구자적 역할) 재산도 모두 사회사업에 내놓았다. 이렇듯 기업 경영으로 민족자본형성에 기여한 사업가이며 , 독립운동가인 유일한...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
유통업으로 벌어들인 전 재산을 기부해 기근에 시달리는 제주도민을 살려던 김만덕 1739~1812, 이가환이 시를 지어 헌정하고, 영의정 채제공이 <만덕전>이라는 전기를 써서 바쳤던 시대를 뛰어넘은 창의적인 자선사업가,여성기업인이다. 현재 '김만덕 나눔 쌀 만섬 쌓기 운동이 추진되어 그 정신,뜻을 기리며 이어가도록 한 나눔과 봉사의 표상 김만덕...
400년 동안 9대 진사와 12대 만석꾼을 배출(1대 최진립1568~1636부터 12대 최준1884~1970까지)한 경주 최부자집(경주최진사집), 나라에 흉년이 들면 집앞마당에 100일동안 대형 가마솥을 걸었고, 나라를 빼앗겼을땐 독립운동자금을 대다가 재산을 압류당하고, 광복후에는 모든 재산을 학교에기부했다. 가훈도 사회환원과 인간에 베푸는 삶을 살도록 정하여 원칙을 지켰다.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은 하지마라, 만석이상의 재산은 사회에 환원하라,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흉년기에는 재산을 늘리지 마라, 시집온 며느리들은 3년간 무명옷을 입게하라, 사방 백리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이다. 부와 권력의 유착을 경계했고, 욕심부리지말고 사회환원을 말하며,신분의 귀천을 따지지 말고 사람을 아끼고 사랑하고,검소하게 절약하는 교육을 며느리에게 하며, 상부상조를 가르쳤던 것이다. 이 신념으로 사회복지에 힘쓴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우당 이회영의 삶을 살펴보자.
우당 이회영을 알게 된 건 <조용헌의 명문가>에서 처음으로... 그 다음 더 자세함을 원해 <이덕일의 이회영과 젊은 그들>을 읽으면서 였다.



우당 右堂 이회영 李會榮 1867~1932
백사 이항복李恒福 의 11대 후손이며 백사 이항복이래 8대를 이어 판10명의 재상을 배출한 명문가 집안의 6형제중 넷째아들이시다.
위로 형 이건영, 이석영, 이철영 아래로 동생 이시영과 이호영이 있었다
동생 이시영은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이다.
이회영은 형제 넷은 독립투쟁으로 잃었고, 자신도 고문끝에 순국했다. (동생 이시영만 홀로 남아 초대부통령을 지냄)
백사 이항복을 먼저 살펴보자.
백사 이항복李恒福 1556~1618, 한음 이덕형과의 돈독한 우정으로 그 들의 일화는 한번은 다 들어봤을만큼 유명하다. 임진왜란때 선조를 보필했으며, 전란후 병조판서로서 나라수습에 힘썼다.이후 좌의정, 영의정이 되었으며, 광해군 즉위후에도 정승에 자리에 있었으나, 폐모론에 반대입장에 서며 삭탈관직되어 북청에 유배되었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관직수행능력, 청렴,근검, 도덕,경효,인의등의 덕목을 겸비한 조선시대 이상적인 관직자에게 주어지는 청백리의 대표적인 인물이다.(총217명배출)
경주 이씨 백사공파의 일원인 이회영,,
1910년 강제로 한일합병조약이 체결되어 나라를 일제에 빼앗기자 신민회를 결성하고, 독립운동을 위해 이회영은 형제들에게 전 가족이 만주로 이주해 일제와 싸우자고 하며 “이것이 대한 민족된 신분이요, 또 왜적과 혈투하시던 백사白沙(이항복) 공의 후손된 도리라고 생각한다. 여러 형님들과 아우님들은 나의 뜻을 따라주시기를 바라노라”고 설득했다.
여섯 형제의 전 재산을 팔아 마련한 돈 약 40만원(현재화폐가치로 600억원정도, 당시 쌀 한섬이 3원이었다)을 갖고 여섯 형제 일가를 모두 이끌고 만주로 가서 독립운동에 전념한다 .
경학사, 그리고 신흥무관학교..... (설립당시 신흥강습소라는 명칭)설립
신흥무관학교는 우당 이회영과 그의 형제들 그리고 신민회 동지들이 모든 걸 다 걸고 설립, 운영한 독립군 사관학교, 대한 독립군의 요람이다.
물론 설립자금은 이회영 형제일가의 전 재산을 처분하여 마련한 40만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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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대한민족 된 신분이요, 왜적과 싸운 백사 이항복 공의 후손 된 도리다' 라며
온갖 고난과 가난한 삶속에서도 평생 포기하지 않은 독립운동
우당 이회영
그가 죽음으로 실천한 것은 사회 지도층의 높은 도덕적 의무였습니다.
-KBS 한국의 유산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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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6월 10일은 신흥무관학교 설립 100주년이 되는 날이다. 신흥무관학교는 일제강점기 항일무장투쟁의 상징이자 요람이었다. 전략전술, 검술등을 교육, 무장독립투쟁사에 찬란하게 빛나는 청산리대첩·봉오동 대첩의 주역(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은 북로군정서, 대한독립군과 함께 청산리 대첩에 참여, 일본군 1만 2000여명을 사살)들도 대부분 신흥무관학교가 길러낸 독립전사들이었다. 1911년 설립하여 1920년 폐교하기까지 10년 동안 항일전사 3500여 명을 길러냈으니 가히 ‘독립군 사관학교’였다
이철영, 이동녕, 이상룡, 여준, 이광 등이 교장을 역임한 신흥무관학교는 1911년 12월 김연, 변영태, 이규봉, 성주식 등 40여 명의 청년들을 특기생으로 배출한 것을 비롯해 1919년 11월 안도현 삼림지역으로 이동할 때까지 약 3,500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졸업한 생도들은 청년 독립운동을 펼쳐 행동조직을 조직(의열단,다물단)하고, 일본밀정을 암살하는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이렇듯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은 중국은 물론 국내에서 벌어진 수많은 항일무장투쟁의 현장에서 주축으로 활약했다.
또한 조선의 국권상실후 국권회복을 위한 방법으로
네덜란드에서 열리는 제2차 만국평화회의 헤이그 밀사파견을 주도하며, 가장 절친이자 동지 이상설을 대표로 보낸다.
그리고 고종의 급서로 물거품 된 계획 고종의 국외 망명을 추진한 계획 등이있다.!
명문가의 자손,,,그는 왜 인간의 절대자유, 절대평등을 주장하는 아나키즘을 받아들이고, 목숨을 바치며 독립운동을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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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아나키즘은 독립운동의 한 형태로 수용되었다. 귀족 출신의 이회영이 아나키스트가 된 것은 개인적 성향 외에도 아나키즘이 독립운동 이론으로나 해방 후의 정부 수립 이론으로 적합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회영의 아나키즘 이론은 ‘만인이 평등하다’는 원리를 실천해나가면서도 공산주의처럼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빠지지 않고 개인과 사회의 자유를 확장할 수 있는 현실적 방책이었다. 이회영이 아나키즘을 자신의 사상으로 확정지은 때는 1923년 9월로, 이회영은 이미 57세로 환갑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회영은 여러 청년들과 교류하며 아나키즘이란 사상이 자신의 평소 지론과 맞다고 생각을 굳힌 뒤 아나키스트를 자처한 것이다. 이회영은 천진에서 살던 1927년 김종진이 방문하자 토론 끝에 그를 아나키스트로 전향시킬 정도로 단단한 이론적 토대를 갖추고 있었다. 이회영이 아나키스트가 된 것은 젊은 아나키스트들에게 큰 힘이 되었다. 이회영과 북경의 한인 아나키스트들은 조직적 운동을 전개할 때가 되었다고 판단하고, 1924년 4월 말 북경에서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무련)을 조직했다. 그들은「정의공보」를 발행해 자신들의 운동노선을 천명했는데, 이회영이 극도의 궁핍 속에서도 그 발행자금을 부담했다. 후일 이회영과 젊은 아나키스트들은 남화한인청년연맹(남화연맹)이라는 아나키즘 조직을 건설해 상해의 일인들과 친일 주구들을 공포에 몰아넣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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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중국 망명후 상해, 천진을 오가며 독립운동에 매진하던 이회영은
상해를 점령한 일본군때문에 독립운동가들의 활동공간은 점점 좁아지므로 상해를 떠나 만주를 새로운 독립운동무대로 삼으려 했다. 새로운 독립운동의 전기를 마련하려는 과정에서 이회영은 일본 밀정의 밀고로 체포, 여순감옥에서 혹독한 고문을 받고 1932년 11월 17일 순국했다. <이회영과 젊은 그들>에서 보면 고문사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일제는 이회영의 시신을 서둘러 화장했다고 한다. 죽음을 각오한 항거이며, 젊은 동지들을 지키기 위한 칠순 노인의 외로운 투쟁이었다.
삼한 갑족의 후예로 태어나 전 재산, 일생, 목숨까지 나라에 바친 이회영....
<------ 이런 망할 넘이 골백번 죽었다 깨어나도 감히 쳐다볼수 없는 분이시다....우씨~눈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