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30년을 함께 한 아내 팻 캐바나가 쓰러지고 한 달도 되지 않아 죽는다. 그녀는 문학 에이전트였다. 감정적 지지 뿐만 아니라 줄리언 반스가 글을 쓰는 데에 있어도 동료 이상의 역할을 했음을 짐작케 한다. 그러한 아내에 대한 기억과 그리움의 농도는 다만 우리는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사랑은 그렇게 끝나지 않는다>

 

 

 

 

 

 

 

 

 

 

 

 

 

 

 

 

세상은 슬픔을 견녀낸 사람과 그러지 못한 사람으로 나뉜다. 이런 분류는 절대적인 것이다. 이는 우리가 가로지르는 회귀선이다.-줄리언 반스 <사랑은 그렇게 끝나지 않는다>

 

 

아내의 죽음은 그러나 그가 이미 죽음에 대하여 충분히 이야기하고 난 이후에 들이닥친 것이었다. 그랬다고 해서 그의 예상처럼 더 견딜만한 것이 되지는 않았다. 줄리언 반스의 말이 맞았던 것이다. 웃으면서 죽음을 이야기해도 결국 우리는 울 수밖에 없다.

 

 

 

 

 

 

 

 

 

 

 

 

 

 

 

 

 

나도 당신도 우리 모두가 오십 년 뒤에는 대부분이 죽음을 맞게 된다. 이것은 당연한 명제다. 그러나 이것을 항상 볼테르처럼 의식한다면 분명 지금 이 순간이 가지는 중량감은 커지겠지만 만성적인 우울증과 허무감에 시달리게 된다. 이를테면 어차피 죽을 텐데 오늘 책을 사고 무언가를 주문하고 읽고 미래를 계획하고 약속을 하는 이 사소한 일들이 다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오늘 아침 나와 웃으며 다음 약속을 이야기했던 사람이 오늘 오후에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게 된 경우, 내년까지만 어찌 어찌 지금 하고 싶고 갖고 싶은 것들을 유예하자 했던 사람이 그 내년이 왔을 때에는 그것을 누릴 수 없는 가장 엄중한 죽음의 경고를 맞게 되는 경우가 다 남의 것이자 이야기로만 소화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은 불멸이라 믿으며 오늘을 습관적으로 소비한다.

 

"나는 신을 믿지 않지만 신이 그립다."로 시작하는 이야기는 이러한 '죽음'에 대한 줄리언 반스식의 천착이다. 그의 아버지, 어머니, 프랑스의 작가들, 음악가들, 철학자인 반스의 형과의 '죽음'을 둘러싼 대화와 어우러지는 그의 솔직한 위트와 함께 결국은 삶을 내러티브화하며 허약한 의미를 힘들여 얻어내려 하는 그 무의미한 우리들의 분투와 치기, 모순에 대한 날카로운 해체는 때로 섬뜩하다. 그러나 그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건조하고 걍팍하게 무의미로 수렴되는 것은 아니다. 역자의 말처럼 줄리언 반스는 자기현시적이지 않아 언제라도 어떻게라도 자신에게 본질적으로 내재되어 있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격파해 줄 조언이라면 그것이 진실에 기반하고 있다면 기꺼이 승복할 자세다. 거만한 작가나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한 학자연하는 태도가 아닌 자신이 채집한 수많은 죽음에 관한 예술가들의 실제 사례와 조언, 깨달음 등을 기꺼이 독자와 나누며 결국은 무의미하다고 결론지어진다 하여도 우리의 삶과 우리의 종말이 지나치게 허무하거나 고통스럽지 않기를 희구하는 평범한 소망에 솔직한 자세가 공명한다.

 

'마그니 만찬'은 플로베르, 투르게네프, 공쿠르, 알퐁스 도데, 에밀 졸라가 모여 만든 저녁 식사 모임이었다. 듣기만 해도 화려한 작가 군단이다. 그러나 이들이 그 저녁 식사에서 나눈 대화의 주제는 묘하게도 '죽음'이었다고 반스는 이야기한다. 가장 화려한 시기를 통과하며 가장 나다운 이야기와 나의 성취를 누리던 바로 그 시간을 공유하며 그들은 필멸을 의식하고 두려워했다. 그들이라고 더 나은 죽음에 대한 성찰이나 결론, 실제 그들이 그러한 죽음을 경험한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줄리언 반스는 때때로 의심한다. 죽음에 대하여 더 이야기하고 더 안다고 해서 그것이 과연 더 나은 죽음을 맞이하게 해 주는가? 라고 질문한다면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고 의기소침해한다.

 

죽는다는 사실을 항상 기억하는 것도 또 잊어버리는 것도 불가능하다. 필연적인 무의미와 허무를 떨치기도 힘들다. 막상 그것이 다가왔을 때 얼마나 고통스러울지 상상하는 것도 과연 내가 받아들이지도 않았는데 그것이 다가왔을 때 경험할 공포도 두렵다. 아니, 내가 꼬부랑 할머니가 된다 해도 그것과 화해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다. 그런데 그게 나만 그런것인 줄 알았는데, 그런 건 아니었다, 는 것을 알게 된다 해도 전혀 위안이 안 된다는 게 사실 더 절망적이다. 필연적이었구나. 출구는 없구나, 싶은 답답한 기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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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06-01 16: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평소 화기애애한 만찬 분위기를 유지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죽음’을 주제로 대화를 나누면 분위기가 엄청 이상할 겁니다. 잘 먹던 음식이 입에 안 들어갈 거고요. ㅎㅎㅎ

blanca 2016-06-02 10:12   좋아요 0 | URL
그렇더라고요.^^;; 그래도 마그니 만찬에는 그냥 객원 멤버로 참석만 해도 영광일 듯해요. 고급 레스토랑에서 내로라 하는 일군의 작가들이 모여 정작 죽음에 대하여 고심하고 이야기를 나눴다니 의외기도 하고 역시 그렇구나, 싶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단발머리 2016-06-02 1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항상.... 죽음보다는 죽음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육체와 정신이 겪는 과정이 두려워요.
죽음이 두렵지 않은건 아니지만 그보다는 그 과정이요.
스스로의 삶을 제어하고 통제할 수 없는 어떤 그런 순간이요.
<사랑은 그렇게 끝나지 않는다>에서 큰 감동을 받았는데, <웃으면서 죽음을 이야기하는 방법>도 읽어봐야겠어요.
줄리언 반스니까요.^^

blanca 2016-06-03 11:07   좋아요 0 | URL
오히려 이 책을 읽고 사실 더 불안하고 두려워졌어요. 굉장히 솔직하게 줄리언 반스 자신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듣고 나니 이렇게 많이 읽고 쓰고 깨달은 사람도 이렇다면 `죽음`이란 영원히 화해할 수 없는 종결이구나, 싶어서요. 독특한 반스 식의 글쓰기에 매료 당하는 중입니다. 훌쩍 나이 든 필립 로스도 한번 이런 주제에 대하여 이야기해줬으면 좋겠는데... 글도 안 쓰고 이제 강연도 안 한다니...그답기도 하고 섭섭하네요.
 

작가의 이력에 이끌려 그의 책을 찾아 읽는 건 묘한 경험이다. '그'는 이 책을 아니, 문학을 칠십이 넘어 시작하고 완성했다. 거의 유일한 대표작이 되었고 생전에는 가족의 소중한 추억이 녹아있는 이 이야기의 영화화를 반대하다 유언으로 승낙하게 된다. 그는 45년간 학생들을 가르쳤다.

 

 

 

 

 

 

 

 

 

 

 

 

 

 

 

 

이 영화를 보지 못했어도 그 아름다운 강의 정경과 생소하지만 묘하게 어떤 그리움을 자아내는 플라이 낚시의 풍경은 낯설지 않다. 작가의 가르치는 자로서의 성실함과 시간의 두께는 <스토너>의 남자 주인공과 닮아 있다. 둘 다 화려하진 않지만 설명하기 힘든 비범하고 아름다운 생을 성실하게 살아냈다. 그 둘의 삶은 그 자체로 하나의 서사가 된다.

 

 

 

 

 

 

 

 

 

 

 

 

 

 

 

 

<흐르는 강물처럼>의 언어는 대단히 정묘하고 생생하다. 장로교 목사 아버지와 어딘지 이 세상에 굳건하게 발을 붙이고 살지 못할 것 같은 반항아적 동생과 함께 플라이 낚시를 떠난 '나'의 시선을 통과해 오는 그 모든 순간들은 강과 낚시를 둘러싸고 한 가족의 역사와 사랑과 추억을 아로새겨 놓은 절창이다. 그가 '강'을 앞에 두고 하는 생각들은 '삶'을 숙고하는 자세의 메타포다. 그 '읽기'는 건조하지만 깊고 아름답다. '아름답다'라는 형용사를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아버지는 형제가 읽고 쓰는 일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갑작스런 동생의 죽음은 동생이 '플라이 낚시'에 보이는 재능, 열정이 극대화됨으로써 복선이 되고 또한 아버지와 내가 그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계기가 된다.

 

작가는 자신의 자전적 경험을 바탕으로 한 이 이야기를 구태여 소설로 만들려고 애쓰지 않는다. 때로 불친절하고 거친 듯한 필체는 몰입을 방해하기도 하고 역설적으로 읽는 일을 하찮은 일로 폄하하지 않는다. 그가 하는 모든 이야기를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 이야기를 왜 해야 했는지, 왜 하고 있는지 묘하게 짐작하게 하는 구석이 있다. <브로크백 마운틴>의 애니 프루의 서문은 좋은 지침이 된다. 공항에서 우연히 이 책을 만난 애니 프루는 깊어지는 황혼속 베란다에서 이 책과 완전히 결합하는 환상적인 경험을 통과하고 마침내 서문을 쓰게 된다.

 

"나는 언제나 강물 소리에 사로잡힌다."는 작가의 마지막 말은 "나는 언제나 생에 사로잡힌다."로 바꾸어도 무방하다. 아름답고 독특하고 애조띤 비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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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6-05-29 19: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흐르는 강물처럼을 두 번쯤 본 것 같습니다. 정말 멋진 영화죠. 빵 피트가 신인으로 나왔을 때 제2의 로버트 레드포드라고 난리도 아니었죠. 매디슨 카운트의 다리와 가히 비견될만하지 않을까 합니다.ㅋ

blanca 2016-05-29 12:38   좋아요 0 | URL
아, 저도 매번 티비에서 방영할 때마다 놓쳐서 너무 아쉬워요. 아, 그랬군요! 로버트 레드포드도 참 멋진 배우인데...메디슨카우티의 다리, 저 이 영화 너무 좋아해요...
 
운명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40
임레 케르테스 지음, 유진일 옮김 / 민음사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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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모 레비를 위시하여 많은 사람들이 나치하의 강제수용소에서 살아 돌아와 그곳의 참상을 다양한 형식으로 증언했다. 인간이 강제한 시스템 아래에서 인간 이하의 대우를 받으며 견디어 낸 시간은 삶의 자기회복력의 세례를 받아도 결코 치유될 수 없는 개별적인 트라우마를 남겼다. 견디어내고 살아남았다고 섣불리 마침표를 찍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인간이 인간을 무참히 짓밟을 수 있다,는 것을 보고 듣고 체험한 기억은 그 인간들을 마주보고 살아내야 하는 삶 자체의 의미를 뿌리부터 흔든다.

 

그러나 <운명>은 여타 다른 홀로코스트의 생존자들의 증언의 어조와 달랐다. 무엇보다 주인공은 열네 살 소년이다. 회상의 형식이 아닌 현재 진행형이다. 한창 가족의 따뜻한 보호 아래 공부하고 친구들과 뛰어 놀아야 할 소년은 단지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강제 노역을 다니다 그 출근 버스에서마저 끌려 내려와 가족에게 알리지도 못한 채 아우슈비츠로 끌려간다.

 

"우리는 학교를 위해 공부하지 않고 삶을 위해 공부한다."였다. 그렇다면 교장 선생님의 말씀에 따르면 우리는 아우슈비츠에 대해 반드시 공부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p.124

 

열네 살 소년은 울지 않았다. 건조하고 담담하게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인다. 때로 화가 나기도 하고 무기력해지기도 했지만 그는 아이처럼 징징대지도 포기하지도 않은 채 그저 성실히 하루 하루 수용소 생활을 해나갈 따름이었다. 그의 시선은 수용소에서 일어나는 일들, 그 주변 풍광, 그를 둘러싸고 수용소의 질서를 제대로 작동하게 하는 어른들, 같은 수용소 안의 또래 소년들, 때로 항상 배고픈 그에게 대가 없이 빵을 주고 자포자기하지 말라 격려하는 멘토 같은 사람들을 따라 움직인다. 그의 시선을 통과한 수용소의 풍경은 마치 우리가 가진 삶의 일상처럼 흘러간다. 소년도 때로 그 점에 놀란다. 너무 고통스러워서 다 던져버리고 싶다,는 극단적인 반응이 아니라 그저 주어진 하루 하루를 힘들지만 엮어 나가며 살아나간다,는 것이다. 심지어 그는 지쳐 있는 수용소의 의사에게 "당신의 고통은 별거 아니니 너무 슬퍼하지 말라"고 얘기해 줄까도 생각했다.

 

그는 일년 여의 수용소 생활을 종전으로 마치고 다시 고향으로 귀가하다 대신 전차 요금을 내어 준 어른에게 고국의 부다페스트를 보니 어떤 느낌이 드냐는 질문에 "증오심요."라고 이야기한다. 그는 억압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직 어른도 아닌 아이를 부모에게서 강제로 떼어놓아 수용소에서 노역을 시키고 인간이하의 대우를 일삼는 것을 방조한 자신의 고국에 대하여 아이는 증오를 느낀다. 끔찍한 기억을 다 잊으라는 동네 어른들의 조언에는 반발한다. '내 기억에 대고 명령을 할 수는 없다.'고.

 

소년이 돌아올 곳은 해체되고 없었다. 아버지는 죽고 새어머니는 재혼했다. 그러나 노을지는 저녁 거리에서 생모를 찾아 가며 그가 느낀 것은 절망이 아니었다. 그가 이 시간대를 수용소에서도 가장 좋아했다,고 회고하는 장면은 섬뜩하면서도 장엄하다. 계속 살아갈 수 있기 위해서 계속 삶을 지속해 가겠다는 각오를 지키기 위하여 소년은 나아간다. 어른들의 잔인한 도발로 소년의 삶은 파괴되지 않는다. 소년은 자신의 삶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각오를 다진다.

 

살아 귀환한 자의 생에 대한 강렬한 의지와 성장에 대한 기대가 어쩐지 눈물겨웠다. 작가 임레 케르테스의 자전적 이야기의 회고인 이 이야기가 그가 후에 소년 시절 겪은 수용소의 트라우마로 순탄치 않은 삶을 이어가야 했음을 알고 들을 때 더욱 그러하다. 인간은 어떤 상황에서도 다시 일어나 생을 삶을 이어나갈 수 있음을 그 자신이 삶으로 보여주었지만 그것은 단지 외피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나면 인간이 인간에게 가하는 폭력이 역설적으로 얼마나 타인의 존재와 그에게 주어진 생 전부를 파괴할 수 있는지에 대한 처절한 예시가 된다.

 

이제 우리 과장하지 말자! 내가 지금 이곳에 존재한다는 정말 어려운 문제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p.284

 

언제나 삶에는 짐작하는 것보다 더 크고 깊은 그 무엇이 있다. 그러니 섣불리 과장하지 못하겠다. 느낌도 짐작도 생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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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23 08: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5-23 08: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에이바 2016-05-24 16: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 혹시 영화 사울의 아들 보셨어요? 비르케나우 배경으로 한 영환데 영화 기법(잘은 몰라도)과 더불어 아우슈비츠의 삶을 좀 더 생각하게 되는 그런 작품이었어요. 역사를 기록하는 어떤 방식에 대한 고민거리와 더불어... 굴라그 배경의 문학작품들도 떠올리게 되고요. 다르지만... 아직 운명 초반부밖에 읽지 못했는데 얼른 읽어야겠습니다.

blanca 2016-05-24 20:47   좋아요 0 | URL
에이바님 댓글 보고 찾아보니 아주 평이 좋네요. 아쉽게도 아직 못 봤는데 줄거리 보니 도저히 못 볼 것 같아요. 이제 너무 참혹하거나 슬픈 영화는 차마 볼 수가 없어요. 홀로코스트 관련된 이야기들을 공교롭게 여러번 접하게 되는데 결국은 절망으로 귀결되서 자꾸 가라앉게 되는 것 같아요.
 
종의 기원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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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예술 작품들이 악을 형상화한다. '선'에는 상상력이 개입할 여지가 크게 없다. 경로도 한정되어 있다. 기대치도 있다. 평면적이다. 그러나 악은 바닥도 경계도 없다. 살아 숨쉬는 우리 모두에게는 끝도 없는 상승보다는 미담보다는 무한추락과 비극과 범죄 이야기가 더 가깝다. 그게 엄혹한 현실이다. 사람을 믿는 일은 어쩌면 불가능에 가까운 희망일지도 모른다.

 

정유정의 이야기에는 그렇게 태어난 아들의 이야기다. 아들은 화자가 되어 자신을 설명하지만 그의 악행은 설득력도 이해도 얻기 힘들다. 단지 그렇게 타고 난 사이코패스적인 기질이 근거일 따름이다. 정신병, 반사회적 인격장애가 면죄부라기보다는 그의 범죄를 설명하는 도구로서 기능한다. 최선을 다했지만 양육 과정이 아들의 삶을 통제하고 아들의 꿈을 파기하여 결국 아들의 범죄를 막지 못한 실패로 결론이 난 어머니는 그리고 그들과 같은 여자들은 이 청년의 잔인하고 무감각한 악행의 조준점이 된다.

 

이 불편한 이야기의 경로에는 가파른 호흡을 물고 적확한 언어를 찾아 분투했을 작가의 지난한 시도와 그 시도의 궤적이 있다. 그가 이야기가는 인물들의 개연성, 관계, 매력을 떠나 그들의 어떤 행동도 정유정의 손끝에서 나온다면 살아 움직이는 힘을 얻는다. 소설적 언어의 지루함도 종이의 그 생래적 한계도 그녀 앞에서는 밀려나간다. 읽는 이는 도저히 이해할 수도 사랑할 수도 없는 이 남자의 범죄 현장에 동행하며 어느덧 그의 행동 하나 하나를 바로 손 닿을 만한 거리에서 느끼며 멈칫하게 된다. 그 현장에서 말 없이 그의 행동을 들었다는 이유만으로 어느덧 공범이 된 듯한 죄책감은 인간의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폭력성 때문일까, 아니면 그러한 악행을 적극적으로 말리고 개입할 자신이 없는 비겁함이 들킨 때문일까. 그를 끝까지 말리려 하다 결국 죽게 되는 형을 대신하는 존재였던 친구의 모습에는 우리가 용감한 시민이 되지 못하게 되는 어떤 참조점이 말라붙어 있다.

 

영화 <케빈에 대하여>를 연상시키는 대목이 있다. 어머니와 아들의 이미 한계와 거리를 가지고 시작하는 관계, 형제에 대한 묘한 경쟁심, 그리고 죽음, 일을 저지르고 돌아온 아들에 대한 어머니의 양가적 감정, 이미 그렇게 태어난 아이와 묘한 긴장 관계에서 시작하는 통제권을 가지고 싸우는 과정 들. 그리고 그러한 것들이 닫힌 가정 안에서 일어나다 마침내 밖으로 비어져 나와 애꿎은 희생양을 만드는 비극.

 

이러한 이야기는 이제 이야기에서도 현실에서도 낯익은 것이 되어버렸다. 소시오패스, 사이코패스라는 명칭으로 그들을 한정하는 것은 그러한 악행을 감치고 도저히 이해할 수도 납득할 수도 없는 이야기를 동어반복적으로 완성시키고 끝내버리는 일이 아닌가 싶다. 그냥 그렇게 태어난 거야. 어쩔 수 없어. 이미 그랬다면 우리가 사는 사회에서 당분간 나이가 들 때까지 격리시켜 버리고 우리는 우리대로 사는 거야. 그럼 그런 애가 나의 아이가 된다면? 우리 가족이라면? 여기에서부터 출발한 이야기의 결론은 또 다른 물음표와 말줄임표로 가고 만다. 인간의 악은 그렇게 동어반복적이고 자기복제적으로 끊임없이 순환한다. 이야기는 남의 것으로 소비되고 나의 것이 되어버리면  추방된다.

 

어두운 이야기의 슬픈 결말은 출구가 없어 답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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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레드 다이아몬드의 나와 세계 - 인류의 내일에 관한 중대한 질문
재레드 다이아몬드 지음, 강주헌 옮김 / 김영사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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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 베네수엘라가 3년 새에 열악한 공중보건으로 신생아 사망률이 백프로 증가했다는 외신이 눈에 띄었다. 이 책의 저자 재레드 다이아몬드가 주장했던 정부의 붕괴와 가장 밀접한 관계가 있는 예측 변수가 '높은 유아 사망률'이라는 지적의 예증 같다. 이는 저자의 말처럼 높은 유아 사망률이 정부가 허약하고 비효율적이라는 얘기라는 것과 통한다. 지금 베네수엘라는 국가의 역할이 거의 마비되다시피 한 상황이라고 한다. 재레드 다이아몬드가 유독 이 책에서 열대국가들의 문제를 공중 보건 정책의 관점에서 조명한 것은 상당히 설득력이 있는 얘기인 셈이다.

 

<총,균.쇠>의 저자로 각광받은 저자는 언뜻 일반인들이 접근하기 힘든 어려운 얘기를 하는 석학으로 비쳤다. 아직 그 책을 읽어보지 못한 나로서는 이 책이 그러한 선입견을 깨는 데에 큰 역할을 했다. 여기에는 지리적으로도 시간적으로도 대단히 광활한 이야기가 흥미롭게 펼쳐진다. 노교수의 육성이 들리는 듯할 정도로 생생하고 쉽고 지루하지도 않다. 세계적으로 불평등과 테러와 환경 오염이 심화되는 상황에 대한 진단과 그것을 어떻게 해결해 나가야 할지에 대한 역사적이고 지리학적인 저자의 식견에 근거한 해법은 사변적이지 않으면서 진지하고 통찰적이다. 저자가 지리학 교수인 만큼 지리학적 위치가 어떻게 그 나라의 경제와 제도 발전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으며 결론적으로 부의 불균형을 낳았는지에 대한 이야기도 흥미롭다. 중국과 유럽의 원정대를 비교하며 결국 중국이 세계의 선두적 위치를 차지했을 수도 있었을 과거의 기회를 어떻게 잃어버렸는지에 역사적 분석도 인상적이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는 속담은 오히려 여기에서 '사공이 많아 배는 계속 나갈 수 있었다'로 치환되어도 무방할 듯하다. 정화의 원정대는 황제가 함대의 파견을 중단하는 것으로 막을 내릴 수밖에 없었던 반면에 유럽의 원정대는 여러 통치권자들의 지원을 선택적으로 받을 수 있어 계속 이어져서 세계 정복의 동인을 얻게 된다는 이야기다. 한편 현대의 중국의 영향력과 미래 전망에 대한 모호하고 상대적으로 짧은 언급이 아쉬웠다.

 

'건설적 편집증'이라는 저자의 용어는 꼭 국가까지 나가지 않더라도 충분히 개인의 삶에 적용할 만한 지침이 된다. 현대인들은 테러, 전쟁 같은 통제할 수 없는 위험은 과대평가하고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위험-음주, 흡연, 낙상 같은-은 과소평가하는 실수를 범하고 있다는 지적은 개인 생활에서의 위기 관리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좋은 조언이 된다.

 

현대의 각종 테러, 난민 문제를 세계적인 경제적 불평등 문제로만 단순화하여 선진국의 경제 원조와 지원의 해법을 제시한 것은 문제를 평면적으로만 본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남는다. 물론 당연히 경제적으로 기본적인 의식주조차 보장받지 못하는 나라에서 태어나 살다 보니 다른 안전하고 풍족한 국가를 공격하거나 그곳으로 이주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생겨날 수는 있지만 반드시 그것 때문에 난민이 되고 테러를 가한다,는 식으로 판단하는 것 또한 경제적으로 어려운 국가의 국민들을 잠재적 난민과 테러분자로 낙인 찍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가 든다.

 

개인이 살면서 맞닥뜨리는 문제들보다 세계가 당면한 문제를 다루는 것이 반드시 무겁고 어렵게 이야기되지 않아도 된다,는 전범을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보여준다. 또한 그러한 위기 문제의 해결이 개인의 삶에서의 위기 상황 타개에서 서로 주고 받을 수 있는 부분을 여러 예시와 접목시켜 보여주는 대목은 개인의 사적인 삶과 공적인 영역에서의 문제 해결과 역사의 과정이 분리될 수 없고 결국 문제를 해결하고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을 기대하는 방식에 어떤 노력과 시도가 효과를 발휘할 수 있는지 돌아보게 만드는 지점은 결국 닮아 있다,고 느끼게 한다.

 

'일인당 평균 인간영향'이라는 용어는 한 사람이 소비하는 평균 자원량과 생산하는 평균 폐기물량을 뜻한다고 한다. 이것이 꾸준히 증가하고 있고 화석연료 소비와 비례하므로 결국 지구온난화를 부추기게 된다,고 저자는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결국 내가 살면서 소비하고 쏟아내는 모든 것이 지구를 황폐화하는 데에 일조를 담당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매주 분리수거를 할 때마다 한 가족이 살면서 얼마나 많은 쓰레기가 나오는 지 놀라게 된다. 내가 지구를 차지하면서 어떻게 하면 조금 더 적게 소비하고 적게 오염시킬 수 있을까를 고민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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