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영상에서 죽음이 별로 두렵지 않다는 젊은 시인의 얘기에 나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네가 죽음을 알 나이가 아니니까."


그 시인의 다감한 인상에 나는 어떤 냉소를 가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고명재 시인을 잘 몰랐다. 지금도 잘 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적어도 그 시인이 얘기하는 죽음이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진지하고 짙었다는 것에 부끄러움을 느낀다고 고백할 수 있다. 자신을 키웠다는 비구니의 이야기에 무심결 집어 든 그의 책은 나를 많이 울렸다. 



나이듦은 무조건적 사랑에 대한 기대를 내려놓게 되는 일과 가깝다. 어떤 선의에 의도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은 지혜도 경험지도 아니다. 내가 있는 그대로 사랑받을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옅어지는 일은 서글프다. 그러나 나는 이미 받은 무한사랑의 기억을 잊고 있었다. 고명재 시인이 이 책을 헌사한 비구니가 그에게 베풀어 준 사랑의 시어들을 읽으며 나는 잊었던 그 사랑들을 기억해 냈고 그 기억의 복원에 압도됐다. 지금의 나에게도 어린 시절 그런 사랑을 퍼부어 준 사람이 있었다. 무조건적인 사랑. 나는 죽는 순간까지도 그 사랑으로 견딜 것이다.


반드시 요동치고 심장 뛰고 들썩여야만 사랑인 것은 아니다. 마음과 존재를 아래에서부터 떠받친 채로 기둥처럼 지속되는 사랑도 있다. 사시사철 최선을 다해 존재하는 것. 은은한 지속. 그 기쁨, 놀라운 세계. 창호 너머로 천천히 고개를 돌리면 만물이 견고하게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네가 바로 거기 있구나. 

-<너무 보고플 때 눈이 온다> 고명재


너무너무 가난해서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고 동생과 할머니에게 맡겨진 시인이 또 어느 한 시기 절의 비구니와 함께 한 유년은 눈물겹도록 애잔하고 아름답다. 작디작은 비구니는 시인에게 무한정의 사랑과 무소유의 고결한 삶과 그것의 존엄한 마지막을 보여준다. 무엇보다 시인이 시인이 되게 한다. 그러니 이 시인이 죽음에 대하여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었구나. 숨을 멈추고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이런 사랑이 있구나. 한 어린 아이를, 부모와도 헤어져 자라야 했던 그 가난하고 작은 아이에게 무한의 사랑과 미래에 대한 믿음을 줄 수 있는 사랑이 있구나. 세상에 대한 냉소로 온마음을 꽉꽉 채울 수도 있었을 아이가 자라 사랑을 노래하는 좋은 시인이 될 수 있게 하는 그런 빛나는 사랑이 있었구나.
















슈테판 츠바이크의 슬픈 최후를 우리는 안다.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런 그의 마지막 이야기들은 그러니 절망과 체념과 세상에 대한 비관으로 가득 차 있었을까? 오히려 반대다. 그는 여전히 사랑과 인간에 대한 믿음과 연민을 노래한다. 짙은 어둠 속에서도 그가 포기하지 않은 인간에 대한 믿음들이 빛난다. 어떤 사람이 위대해지는 것은 그 사람이 많은 것을 가지거나 이룩해서라기보다는 모든 것을 빼앗기는 그 지점에서도 절망하지 않는 그 불굴의 희망 때문일지도 모른다. 나는 여전히 낭만을 포기하지 않는 인간의 그 여린 구석이야말로 가장 짓밟기 힘든 인간의 고결한 실재가 아닐까 한다. 


<걱정 없이 사는 기술>에서 돈이 없이 그저 자신이 가진 기술과 도움을 타인들에게 나누어줌으로써 살아가는 청년에 대한 이야기, 최악의 인플레에서도 여전히 일상을 영위하고 서로 돕고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묘사되는 <나에게 돈이란>, 혁명이 지척에서 일어나는데도 무감하게 낚시를 하는 방관자의 역사가 사실은 우리들의 지금의 모습 그 자체라는 통찰이 인상적인 <센강의 낚시꾼>, 젊은 시절 우연히 방문하게 된 로댕의 작업실에서 배운 무아지경의 몰입의 순간에 대한 교훈을 얻은 <영원한 교훈> 등 짤막한 이야기 하나하나하가 가지는 심오한 메시지에 절로 공명하게 됐다. 짧아서 아쉽고 또 그만큼 농밀하게 압축된 이야기들이 주는 감동의 여운이 길다. 


그러니까 우리의 두려움에 이기는 건 여전히 진부한 사랑이다. 그런 걸 믿지 않는다고 말하기는 쉽고 내 존재 자체가 그 사랑으로 이루어졌다고 고백하는 건 어려운 용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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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은 악마의 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51
에드나 오브라이언 지음, 임슬애 옮김 / 민음사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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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살 아이를 두고 이혼한 이십대 아일랜드 여자가 8월에 휴가를 떠난 이야기라 하면, 흔히 떠오르는 모든 것들을 전복시키는 이야기. 감각적이고 도발적인데 헛헛한 아름다움의 마침표를 찍는 이야기. 에드나 오브라이언이라는 작가에 완전히 반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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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비 2024-10-26 07: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이 이런 내용이었군요…왠지 책 내용을 엄청 기대하게 하는 리뷰네요.

blanca 2024-10-26 08:52   좋아요 1 | URL
분량도 많지 않은데 깊이와 재미를 다 잡은 작품 같아요. 일단 아주 재미있어요.
 
망고와 수류탄 - 생활사 이론
기시 마사히코 지음, 정세경 옮김 / 두번째테제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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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사회학자 기시 마사히코가 오키나와 거주민들의 이야기를 청취하여 오키나와의 '역사와 구조'에 연결한 보고서다. 이렇게 요약하면 딱딱한 이론서처럼 들리지만, '약속으로서의 실재론'인 조사자와 구술자의 대화는 참혹한 역사적 관계에 우연히 엮여 들어간 평범한 인간 군상의 묘사로 감동적인 이야기들의 태피스트리다. 


표제작인 <망고와 수류탄>은 패전 후 일본군이 오키나와 민간인들에게 수류탄을 지급하고 자결을 명령한 역사적 비극을 기억하는 할머니의 구술 이야기다. 당시 소녀는 엄마의 용기와 기지로 거기에서 탈출하지만, 미군이 쏜 박격포에 바로 옆에서 아버지의 죽음을 겪는다. 오십 년이 지나서야 소녀가 그날 뒤집어 쓴 게 아버지의 피였다는 것을 깨닫게 된 할머니의 이야기는 마지막에 손수 얼려서 이고 지고 온 망고를 이 연구에 참가한 젊은 학생들에게 나누어주는 것으로 끝난다. 훈훈한 결말을 품은 이야기 중에 이렇게 슬픈 사연을 지닌 것을 들어본 적이 별로 없는 것 같다. 사회학자에게 소녀 시절 겪은 역사적 참상을 담담히 이야기하고 그 후에 깨달은 비극적인 진실까지 덧붙인 노인은 인간에 대한 불신과 삶의 잔인함, 비관을 한탄하는 대신 다음 세대에 대한 사랑의 마침표를 찍는다. 


1945년 저 섬에서 그녀는 일본군에게 두 개의 수류탄을 건네받았다. 그리고 2015년 이 공민관에서 수류탄 대신 그녀가 우리에게 건네준 것은 몇 개의 다디단 망고였다.



저자는 본인이 택한 생활사 이론의 질적 연구에서 조사자의 경계짓기, 범주화를 통한 이해에 어떤 편견과 폭력이 게재되거나 연구 대상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과정에서 거짓과 모순이 드러날 수 있음을 인정하지만, 이 한계조차도 연구의 실재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연구를 완성하는 하나의 조각이 될 수 있음을 역설한다. 즉 그 불완전함, 그 한계가 인간이 인간을 사회적, 역사적 맥락에서 읽어내는 것의 실체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누군가가 자신의 생애를 구술하면서 잘못된 기억을 이야기한다고 해서 그 사람의 진심 전체가 호도되고 그것을 들은 사람의 시간이 낭비되는 것은 아니다. 이야기를 하는 행위 그 자체에 어떤 진실의 핵이 있음을 저자는 이야기한다.


말하고 듣는다,는 것에는 어마어마한 에너지와 감정의 상호교환이 있고 이것은 수치로 계량화할 수 없기에 특유의 가치를 지닌다. 누군가의 아픈 생애를 그 우연적인 역사의 폭력에 다친 한 사람의 특별한 이야기를 듣는 일은 그 자체로 한 사람에게 다가가는 일이기도 하다. 



기본적으로 이 세계에 의미란 없다. 우리가 어떤 전쟁에 휘말려들게 되는 것에도, 어떤 계층의 집에 태어나는 것에도, 혹은 '남자'나 '여자'인 것 그 어느 것에도 의미는 없다. 우리들은 절대적인 외부에 연쇄하고 있는 무한한 인과관계의 흐름 안에 갑자기 던져졌고, 거기서 살아가야 한다.



사회학자인 저자의 연구 방법론에 대한 책에서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사적으로 살아내는 인간 군상의 모습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여러 명의 주인공들의 순간을 담은 아름답고 슬픈 단편집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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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4-10-25 12:3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 저도 이 책 사두었는데 블랑카 님의 리뷰를 읽으니 얼른 이 책을 읽고 싶어집니다. 망고와 수류탄 이라는 제목부터가 참 서로 어울리지 않는 것 같잖아요? 그것들이 이야기 속에서 어떤 조화를 이뤄낼지, 이 리뷰를 통해 엿본 느낌입니다. 리뷰 잘 읽었습니다.

blanca 2024-10-25 14:19   좋아요 1 | URL
저 이 책 망설이다 다락방님도 사셨다길래 산 거예요. 중간 방법론은 좀 지루한 대목들이 있긴 한데 전반적으로 정말 좋았어요. 땡스투를 사고 나서 해서 다락방님한테 제대로 갔을지 모르겠네요.
 

주말에 아이와 교보문고에 갔다. 모두가 아는 바로 그 이유로 사람들이 평소보다 적어도 두 배는 많았다. 내가 주인인 것처럼 으쓱했다. 새로운 알바생도 대거 투입된 것처럼 보였다. 뭔가 흥성거리는 이 축제의 느낌이 신 났다. 고른 책을 결제하려다 젊은 알바생에게 십 프로 쿠폰이 계정에 있냐 물었는데 없단다. 그 앞에서 모바일로 영업점 체크인을 하고 쿠폰을 바로 받으려고 하니 바로 눈에 안 띄어 당황했다. 나는 이제 이런 모습을 들키는 게 신경 쓰이는 나이가 됐다. 그래서 침착을 가장한 채 다시 오겠다고 하고 교보문고 한강 작가 책이 품절됐다는 안내가 있는 매대에서 열심히 영업점 체크인 쿠폰을 찾아 헤맸다. 한참이나... 정말 너무 오래여서 내 자신이 싫어지려 했다. 드디어 찾았을 때 이 모습을 누군가가 봤을까 봐 부끄러워 다른 직원에게 가려 했으나 하필 그 아르바이트생과 눈이 바로 마주쳤다. 나는 짐짓 처음인 듯 이 책을 내밀었다. 


"이 쿠폰을 찾으시려고 그러셨군요." ㅋㅋㅋ

아르바이트생이 굳이 아는 체 해준다. 그래 노화란 그런 거다. 







내가 십 프로 쿠폰을 힘들게 찾아 결제한 책은 바로 이 책이다. 왜 하필 또 이 책인가. 칠십 대의 노벨화학상 수상자인 저자가 우리 몸에서 일어나는 노화 과정을 세포에서 일어나는 단백질 대사 기전으로 알기 쉽게 설명하고 더 나아가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항노화산업붐에 윤리적 질문을 던지는 책이다. 과학책일 수도 있고 철학책일 수도 있다. 잘 읽히고 매력적이고 심오하다. 


"할 수 있다고 반드시 해야 할까?" 이 도발적인 질문은 작금의 수명 연장 기술과 각종 항노화 산업에 대한 근본적 성찰이다. 우리가 "삶이라는 축제의 현장"에서 홀로 떠나야 하는 그 필연성을 부인하는 것이 과연 잘 사는 삶에 도움이 될수 있을런지에 대한 도발적 반문이다. 의료 기술, 과학의 발전으로 우리가 우리의 노화를 뒤로 미루고 삶을 연장하는 것이 그리고 그럴 수 있다는 환각을 주는 것이 가지는 궁극적 의미란 무엇인가?


나는 우리가 훨씬 오래 산다고 해서 훨씬 만족스러운 삶을 살리라 확신할 수 없다. 지금 우리는 1세기 전보다 수명이 두 배 늘었지만 여전히 만족스럽게 살지 못한다. 오히려 죽음에 더 집착하는 것 같다. 120살이나 150살까지 산다면, 그때는 왜 300살을 살지 못하느냐고 불평을 늘어놓지 않을까? 수명 연장을 추구하는 것은 신기루를 좇는 것과 같다. 진정한 영생에 도달하지 못한다면 어떤 것도 충분치 않다.

-pp.330


노화가 불쾌한 것은 그것이 마치 다가올 죽음의 전조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내 인지능력이 퇴화하고 얼굴에 주름이 생기는 건 그 자체로 받아들이기보다 하나의 불길한 해석이 된다. 인생의 유한성이 그것이다. 실리콘밸리의 소프트웨어 산업의 백만장자들이 그토록 항노화 사업에 매달리거나 참여하는 기저에는 내가 이생에서 성취하여 가진 그 모든 것을 두고 가야 한다는 엄연한 현실을 직시하기 힘든 두려움이 있다. 그러나 그런 두려움을 회피하는 방법이 절대로 인간의 과학기술일 수는 없다는 게 과학자이자 노인인 저자의 제언이다. 그의 어조는 냉철하고 냉정하다. 지금으로서는 노화를 막는 방법도 죽음을 무한정 늦추는 방법도 없다고. 받아들이고 쿨하게 떠나라고. 말은 쉽지만. 글쎄다. 내가 나의 어리버리함을 타인에게 들키기 싫어하는 마음의 기저에도 그런 두려움이 깔려 있을지 모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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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빛 2024-10-21 22: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이 책 저도 읽어봐야겠어요.
나이가 들면서 조금씩 불편한 것들이 생기는데, 그것이 점점 더 심해지는 것 같아서 조금 두려워요.
가장 두려운 것은 늙는다는 것 자체보다 늙어서 아픈 것이죠.
아프면 돈이 들텐데, 늙고 아프면 돈을 벌 수 없고,
그러면 다른 누군가에게 의지해야 하니, 그점이 제일 싫고 두려워요.

늙어도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지내다 딱 적절한 시점에 죽을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blanca 2024-10-22 11:17   좋아요 0 | URL
나이듦이라는 건 아무리 이론적으로 들어도 내 몸에 나타나야 비로소 실감 나는 것 같아요. 제가 기대하는 노년과 죽음이 가능할까 가끔 너무 두렵기도 합니다.
 
고요한 읽기
이승우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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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스무 살 때 이걸 알았더라면…

영원한 사랑은 없다. 영원한 것은 이미 사랑이 아니기 때문이다. ‘잃어버릴 두려움 없이’ 사랑할 수 없다. 잃어버릴 두려움이 사랑이기 때문이다. - P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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