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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스트 Axt 2016.9.10 - no.008 ㅣ 악스트 Axt
악스트 편집부 엮음 / 은행나무 / 2016년 9월
평점 :
품절
레몬옐로색 표지에 뭔가를 올려다보는 듯한 김연수는 슬레이트 지붕 아래 종일 매시간 시를 써냈던 <청춘의 문장들>을 썼던 이십 대는 애저녁에 떠나 보내고 그러한 시간들을 반추하는 <청춘의 문장들+>을 쓰고도 이 년을 훌쩍 통과해 버린 중년으로 돌아왔다. 김연수가 걸어온 길을 묘사하는 이야기는 그의 소설보다 더 핍진성이 있다. 그가 이야기하는 시간들은 설득력이 있다. 지나고 보면 많이 맞다. 번역가 노승영이 인터뷰했고 백다흠이 사진을 찍었고(항상 소설가 백가흠과 형제인가? 혼자 궁금해 한다.) 배수아와 정용준도 합석해서 가끔 이야기에 등장한다. 죽마고우 김중혁과 음악을 공유했던 시간, 내용 없이 에너지만으로 소설가가 되었던 시간, 기본적으로 이야기가 가지는 내러티브로서의 힘에 대하여 그의 문장만큼 유려하고 진지하고 사려 깊게 이야기한다. 그의 소설에서 내용보다 형식에 무게가 실리는 건 결과론적인 것이 아니라 그의 의도였다는 것을 짐작케 하는 대목. '내용은 없다'라는 그의 주장에 백퍼센트 공감하지는 않지만 그래서 그랬구나,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힘. 소설적 화자와 실제 삶에서의 자신과 거리와 낙차를 두려는 조심스러운 몸짓은 오히려 그를 더욱 소설적 화자에 가깝게 느끼게 한다. 이런 사람이라면 크게 다르진 않을 것 같다. 소설적 서사에 더 무게를 실은 듯한 느낌이 드는 정유정 작가와는 흥미로운 거리감이 느껴지지만 기본적으로 이야기를 대하고 만들어 내는 자세의 진중함과 그것을 대하는 겸손한 자세에서는 만난다. 여하튼 언제나 작가적 화자를 충실하게 뽑아 내려고 애쓰는 그 노력이 시들지 않는 인터뷰어와 <Axt>의 가장 장기가 발휘되는 코너가 아닌가 싶다.
최민우라는 소설가를 잘 모르지만 그를 분할해서 또 따른 그, 잔루이치 보누치라는 남자를 가상으로 만들어 내어 이야기를 끌어간 소설가 최정화의 최민우에 대한 이야기도 울림이 있었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직접 듣고 그것을 가감없이 기술하는 작업 못지않게 그에게 어울리는 이야기의 틀 안에서 그의 인격, 성격을 소비하는 과정도 흥미로운 이야기가 된다는 것을 보여준 셈이다. 누구나 얼마 만큼 자신만의 서사를 만들어 가는 게 삶이라는 것을 기억한다면 그 안에 담긴 수 많은 인격들 중 하나를 형상화해서 그를 보여주려는 시도는 무용하지 않을 것이다.
권여선의 <봄밤>을 다룬 황현산의 서평은 서평의 경계를 확장시켜 풍요로웠다. 단 하나의 작가의 작품 이야기가 중심이 아니라 그것으로 나아가기 위해 동원한 모파상과 랭보는 황현산이 이야기하는 '현실'의 체적을 한층 두텁게 했다.
곽한영의 <작은 아씨들>의 작가 루이자 메이 올컷의 실제 그 가족적 서사에 희생당한 삶을 묘사한 이야기는 놀라웠다. 실제 부정이라는 미명 아래 아버지의 조수이자 거의 하인 역할을 담당했던 작가가 만들어 낸 행복한 가족적 서사는 일견 하나의 허상이자 기만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작품 그 자체보다 그것을 낳은 작가의 사적 삶의 그 모순적 측면을 가감없이 전달한 측면이 흥미로웠다.
편집위원들의 '이런 어리석은 노력은 의미가 있다'는 자평에 손을 잡아 주고 싶었다. 어젯밤 내가 스마트 폰을 보며 잠들지 않게 한 힘을 가졌던 이런 종이 위의 활자들이 다행스럽게 느껴진다. 그 어떤 노력과 그 어떤 에너지가 들어가는 향유에는 나를 지금 여기에서보다 더 한층 나은 것으로 느끼게 하는 환각의 힘이 있다. 그것을 잡아주어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