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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윽고 슬픈 외국어 - 무라카미 하루키 에세이, 개정판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김진욱 옮김, 안자이 미즈마루 그림 / 문학사상사 / 2013년 8월
평점 :
하루키의 소설보다는 에세이가 좋다. 그 자신의 고백처럼 그의 에세이는 그가 글을 쓰는 과정에서 사물이나 현상에 대하여 진지하게 성찰하고 느끼고 깨달았음을 보여주기 때문에 그의 에세이를 읽고 나면 나는 무언가 조금 더 진지해지고 사려깊어지고 달라진 느낌이 좋다. 이미 가져버리고 느껴버리고 고착화되어버린 것들이 아닌 형성되어가고 유연하고 성장해 가는 과정에 있는 글을 읽는 느낌.
<이윽고 슬픈 외국어>에는 이미 늙어버린 하루키가 아니라 중년기에 접어든, 그래서 자기 앞에 남은 유효한 시간을 헤아리게 되고 자기의 이상과 가치관에 그리고 주어지는 것들에 회의하고 반문하는 그가 있다. 스무 살에 <노르웨이의 숲>을 읽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은 아직 사십 대가 되지 않은 이 시점에 이미 사십 대 중반이 되어 저만치 걸어가 있는 하루키의 미국 체류기를 읽는 경험이 나쁘지 않게 느껴진다.
피츠제럴드의 모교라는 이유만으로 하루키는 프린스턴에 가게 된다. 이 인연은 여차저차하여 지적 스노비즘을 벗어버리지 못한 그래서 버드 드라이를 마시는 하루키를 이해하지 못하는 조금은 고리타분하고 점잖은 그들을 호기심을 가지고 관찰하게 되고 거기에서 오는 어떤 편안함(일단 그 개념, 그 틀만 유지하면 그들은 반문하지 않는다.)도 깨닫게 되는 과정. 리무진의 흑인 운전 기사와 재즈의 역사에 대하여 흥겹게 토론하고 피츠제럴드의 손녀의 깔끔한 길 안내에 경탄하기도 하고 폴 오스터의 문체에 대하여 진지한 감상을 전달하기도 하는 에피소드들이 단편 소설들처럼 생생하고 깔끔하게 펼쳐진다. 평범한 사람들이라면 무심히 흘려 보내기 쉬운 느낌, 깨달음 들이 역시 쿨한 작가의 날카로운 시선에 포착되니 적확하고 유머러스한 언어 안에서 유쾌하게 춤을 춘다. 미국에 무조건 경탄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비판의 날을 세우는 것만도 아닌, 이방인 작가의 관찰기가 흥미롭다. 기회가 된다면 하루키의 감상, 느낌이 나의 그것과는 어떻게 만나고 반목할 지 직접 체험해 보고도 싶다.
여러 영어 소설을 일본어로 번역한 그가 사실 영어 회화에 있어서는 큰 자신감도 확신도 없다는 고백이 의외였다. 그리고 이제는 거기에 노력을 경주할 만큼 시간도 정열도 없다는 덧붙임. '이윽고 슬픈 외국어'가 그러한 상황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그가 외국에 이방인으로 체류하며 느끼는 어떤 '자명함에 대한 회의'가 주는 근원적 애조 같은 것에 대한 이야기다. 우리는 다 어느 곳, 어느 때에도 다 얼마간은 소외감과 외로움을 느낀다. 분명한 것도 확실한 것들도 삶의 전반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다. 그 어떤 불확실함, 회의, 모호함 속에 발을 딛고 때로 슬퍼하는 것이 나날들이다. 하루키의 시선은 바로 이 지점에 닿아 있는 것이다. 꼭 외국에 잠시 체류하지 않더라도 삶의 유한함이 존재의 소멸을 아우를 때 우리는 근본적으로 이 세상에 확실하고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에 슬프다. 하루키의 회의와 하루키의 반문들이 설득력을 띠는 이유다.
그러고 보면 그는 그러한 모호한 아련한 것들을 기가 막히게 자기화해서 표현하는 재주가 있다. 언어가 모호함을 아우르려는 시도는 언제나 실패하지만 언제나 무언가를 남긴다는 사실. 그것을 항상 의식하는 게 하루키다운 하루키스러운 글들의 색채일런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