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거서 크리스티는 나이들수록 점점 자기다워지기 마련이고 이것이 다행이라고 얘기했지만 점점 더 타인의 의견에 귀 기울이기 힘들어지고 독선적으로 흐를 가능성이 농후해지는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나이듦의 징후가 아닐런지. 나도 자유로울 수 없다. 보수를 옹호하며 핏대를 올리는 노인과 싸우는 일은 어쩌면 당신들의 삶과 노고에 대해 제발 존중해 달라고 나를 좀 사랑해 달라고 애타게 부르짖는 나이듦에 대한 오독과 겹치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정작 이야기 되어야 할 지점은 언제나 빗겨가고 싸움의 잔해는 소통하지 못했음에 대한 적나라한 증거물들이다.
일본 나가사키에서 태어나 영국에서 자라 난 작가 가즈오 이시구로는 이 지점을 정확하게 포착했다. 아무래도 그 자신은 동양인이지만 영국에서 삶의 대부분을 보내게 된 터라 좀더 물러나 자신의 부모들의 삶을 감정적으로 흔들리지 않고 관조할 수 있는 유리한 입장이었을 것도 같다. <남아 있는 나날>에서 나치에게 협조한 주인에게 거의 평생을 바치다시피 한 집사의 내면에 들어가 어떤 하나의 신념 아래 삶에 성실하게 복무한 노인의 이야기를 풀어 낸 그 섬세한 결들은 우리가 현실에서 그런 사람을 사랑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존중하고 이해할 수는 있겠다, 싶은 마음을 들게 하는 것도 작가의 저력이다. 당연히 이해할 수 있고 동조할 수 있는 것들에게 물러나 그렇지 않은 것들을 건조하게 변호하는 문장들은 생소하지만 문학의 또다른 역할일 수도 있겠다 싶다.
원자폭탄이 투하된 나가사키에서의 신혼 시절을 회상하는 미망인의 담담한 회고담은 그녀 자신의 삶보다 사실 그녀를 둘러 싼 주변인들의 삶의 경관을 읽는 이들에게 보여주고 이해시키는 과정이다. 무엇보다 며느리 눈에 비친 시아버지 오가타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그는 일본의 군국주의에 그리고 전쟁에 반기를 들지 않았고 하물며 거기에 따른 자신의 신념을 의심하지도 않았다. 가정에서는 성실한 가장이었고 자애로운 아버지였다. 이제 와서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하고 비판하는 아들 친구의 글은 그를 충분히 아프게 하는 것이었다. 임신한 며느리와 함께 그 아들의 친구를 찾아 나서고 그를 거리에서 우연히 만나 논쟁을 벌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격하지 않고 어떤 합의나 절충을 위한 것도 아니다. 그리고 그들은 영원히 어긋난다. 노인이 아들의 친구를 지목하기는 했지만 결국 그의 항변과 분노는 정작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는 자신의 아들에 대한 원망, 아쉬움과 사랑받고 존중받고 싶은 그래서 적어도 어떤 면에서는 잘 살아왔다,는 노인의 삶에 대한 평가 아닌 평가를 희구하는 것과 크게 떨어져 있지 않다.
소위 보수를 표방하는 정권의 엄연한 실책까지 아들, 딸, 며느리, 젊은이들과 논쟁거리로 삼지 않았으면 좋겠다. '잘못한 것은 잘못한 것'이라고 담백하게 이야기하는 것이 논쟁의 패배라고 오인되지 않는 풍경이 그립다. 더해서 그것을 격하게 지적하며 아버지의 생각, 삶 전체를 부정하지도 말았으면 좋겠다. 보수와 진보는 한 집단이 전체를 대변하고 담아낼 수 있는 그릇도 아니요, 상식과 최소한의 도덕적 원칙을 자의적으로 폐기할 수 있는 방패가 되어서도 안 된다. 이 기본 원칙에 대한 상기만으로도 나이듦과 젊음은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