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한성에 관한 사유들
빅터 브롬버트 지음, 이민주 옮김 / 사람의무늬 / 2015년 2월
평점 :
절판


요즘 책을 소장하는 데에 약간 생각이 달라졌다. 내가 살아 온 시간 만큼만 더 살면 어쩌면 나는 너무 노쇠해서 그 책들을 다읽지 못할 수도 있고, 이런 상상은 지극히 슬프지만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경우 처분에 대한 번거로움이 고스란히 남은 사람들에게 남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는 막무가내로 욕망하고 쌓을 나이의 능선은 이미 넘어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은 '내가 죽는다','나의 삶이 유한하다'는 명제를  도저히 피할 수 없다고 느낀 데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다.

 

그래서 계절의 변화도 좀 더 각별하게 느껴진다. 나는 영원히 이 계절의 순환을 볼 수 없다. 겨울이 가고 봄이 오는 냄새는 때로 가슴에 아린다. 그럴 때 듣는 이러한 얘기는 좀 더 경청할 수 있다. '유한성에 관한 사유들'은 과분한 것이 아니다.

 

미국의 명문대의 비교문학과 석좌교수. 그는 두 세계대전 사이에 태어나 실제 전쟁에 참전했고 함께 살아 남았던 동료들이 그를 제외하고 다 죽어버릴 만큼 나이가 들었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삶의 유한성'을 의식했고 최근에는 자신이 살아온 세월 만큼 더 강렬하게 의식하고 있다. 게다가 앙드레 말로의 표현을 빌어 "우리의 무존재를 거부할 수 있게 해 주는" 예술 중 특히 문학을 연구하고 강연한 세월이 사십 년에 이른다. 저자 빅터 브롬버트는 19,20세기의 위대한 소설가 여덟 명의 작품들을 원어로 읽고 그들이 천착했던 삶의 유한성을 그들의 개인 이력과 그들의 언어와 조우하는 지점에 중개자로 선다. 대단히 신중해서 자신에 대한 이야기는 보물찾기할 때 아주 꽁꽁 숨겨 둔 보물 만큼이나 쉽게 찾을 수 없다.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처럼 그도 1인칭이 아닌 3인칭의 서술 시점에 서 있음으로써 이야기의 일반화에 성공했다. 누구나 이 책을 읽으면 다 자신의 이야기인 것처럼 느끼고 몰입할 수밖에 없는 미덕이다.

 

톨스토이, 카프카, 카뮈, 버지니아 울프,  조르지오 바사니, 쿳시, 프리모 레비. 구태여 그들을 다 알지 못해도 그들의 작품을 읽지 않았어도 친절한 노교수의 강의는 가슴을 파고든다. 읽었다면 혹시 읽고 있다면 가슴이 먹먹해지는 대목이 군데군데 있다. 왜냐하면 독서는 기본적으로 고독한 일인데 친절한 안내자가 내가 헤매거나 의아해하는 대목, 한 조각 꺼내어 주머니에 넣어 버리고 싶은 부분들을 절묘하게 포착해 내어 언어로 풀어주는 가르침이 있기 때문이다.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에 대한 고찰을 죽음에 대한 묵상이나 암흑의 세계에 대한 집착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에 맞닥뜨린다는 건 모순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여전히 살아있음을 의미한다. 나아가 인간의 유한한 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의문을 갖게 하고 도덕적인 고민을 한다는 뜻이다.

-에필로그 중

 

저자가 매료되어 있는 몽테뉴의 관심사는 본질이나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이행'이었다는 것, 스스로를 "나는 지나감을 그리는 사람이다."라고 했던 것은 저자가 여덟 작가들의 작품과 삶을 통해 궁극적으로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과 만난다. 결론, 본질, 이데올로기, 관념이 해체되고 남은 모순, 흔들림, 스러짐에 대한 천착이 눈부시다. 누구도 여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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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5-02-17 16: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시간과 관련된 문화사나 과학 분야 도서를 읽는 중인데 우리에게 딱 주어진 시간이 정말 소중하다는 걸 깨달았어요. 비록 유한성의 한계가 있더라도 앞으로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고민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blanca 2015-02-18 09:17   좋아요 0 | URL
사이러스님, 님은 충분히 젊고 또 제가 그 나이 때 낭비한 시간들을 생각하면(당시에는 최선이라고 생각했겠지만) 님의 독서의 깊이와 넓이가 참 부러워요. 저도 `시간`에 관련된 책 참 좋아해요.

2015-02-17 21: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2-18 09: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라로 2015-02-18 0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은 글도 잘 쓰시지만 제가 느끼는(블랑카님의) 장점중 하나가 성실하시다는 거에요!!!
이 책 읽으시고 계시다고 북플에 올라온 것 봤는데 벌써 읽으시고 이렇게 멋진 리뷰도 쓰시고!!^^

blanca 2015-02-18 09:18   좋아요 0 | URL
비비아롬나비모리님, 흑, 제가 추구하는 덕목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 오늘 아홉 시에 일어나버리고 말았어요. 지금은 망연자실, 황당 모드랍니다.--;;

세실 2015-02-18 08: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권의 책을 읽기전 또는 읽고 난후, 친절한 안내자의 설명을 읽어보면 공감하는 부분이 참 좋더라구요~~

유한한 생!
요즘은 그저 아이들이 잘 커주었으면 하는 생각뿐이네요. 제 삶보다는....

blanca 2015-02-18 09:21   좋아요 1 | URL
아이들 잘 커 주는 게 이게 참 너무 많은 변수와, 나의 희생과, 각종 주변 여건의 도움이 필요한 거더라고요.
아직 아기인데도 가만히 아이의 얼굴을 들여다보면 예쁘기도 하지만 어깨가 무겁습니다.

[그장소] 2015-03-29 0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겨울나기전..책을 근근히 사 정말 볼정도만 사보던 제가있고..겨울나고선..
책에대해선 생각..아..이책들을 다봐야 죽을 수 있을 거같아..랄까요.
그 전엔 당장이라도 정리될 수있게 최소한의 ..살림늘리기를 주저한 반면..지금은 변했죠.남겨줄게..책밖에 없어도..그러면 놓겠다고.그럼 어떻겠냐고..

blanca 2015-03-30 10:16   좋아요 1 | URL
저도 또 읽고 싶은 책 목록이 마구 늘어나며 절제하려던 다짐이 무너지는 중이랍니다.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