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센트 반 고흐에게는 네 살 어린 테오라는 남동생이 있었다. 가난하고 불우했던 형제는 서로에게 무척이나 각별했다. 둘에게서 오고 간 편지는 668통이나 되고 고흐는 죽어갈 때에도 동생의 품 안에 있었고, 형이 죽고 육개월 뒤 테오도 형 옆에 묻히게 된다. 고흐는 생전에 그 위대함을 인정받지 못했고 경제적인 능력도 전무하다시피 했다. 그가 절망하지 않고 계속 그림을 그릴 수 있었던 데에는 동생 테오의 지지, 경제적 지원이 있었다. 두 형제가 사랑과 신뢰로 현실을 이겨나가는 그 처절함과 절절함이 녹아 있는 편지는 시간의 풍화에도 눈이 부실 만큼 아름답고 서글프다. 간질성 발작을 일으키고 끊임없이 물감값을 요구하는 형, 그림 한 점 팔리지 않는 사회적으로는 실패한 형에게 아낌없는 신뢰와 존중, 존경을 보내는 테오의 모습은 오늘날 남아 있는 고흐의 위대한 작품들 못지 않게 그 어떤 현실을 뛰어넘는 장대한 미덕이 있다. 그것은 위대한 예술 못지 않은 과업이다.

 

 

 

고흐의 삶은 신산 그 자체였지만 그에게는 이런 보물 같은 동생이 항상 곁에 있었으니 따사롭다. 형의 강직함을 선망해 자신의 아들에 그 이름을 붙여준 동생에게 형은 자신이 줄 수 있는 최선의 것, 조카를 위해 그림을 그린다. 현실로 돌아와서 가난하고 무능력하고 정신병에 때로 충동적인 언사를 내뱉는 형에게 자신에게는 부양해야 할 가족이 있는 동생이 한결같이 지지와 지원을 보낼 수 있을까. 분명 쉽지 않은 일이다. 자신 없는 일이다. 이 지점에 또 하나의 비슷한 상황, 이야기, 그러나 그러지 않았던 동생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카미유 클로델은 위대한 조각가 로댕의 뒤안길에 가려져 있던 모델이자 연인, 조각가였다. 그녀는 천재였다. 점토로 이런 저런 형상을 빚던 여섯 살부터 그녀의 영감, 열정, 재기가 번득였던 시기는 찰나였다. 그녀는 후에 잘 나가는 외교관에 시인, 극작가로 노벨상 후보에도 회자되었던 폴 클로델의 누나이기도 했다. 남매 역시 젊고 각자의 열정이 살아 있던 시절에는 서로에게 각별했다. 함께 시인 말라르메의 화요 모임에서 각 분야의 저명한 예술가들과 즐거운 한때를 보내기도 했고 카미유의 조각과 폴의 시는 서로를 독려하고 위로하고 지지했다. 하지만 그녀가 스물네 살이나 많은 이미 위대해질 때로 위대해지고 유명해질 대로 유명해진 조각가 로댕과 사랑에 빠지고 그의 뒤에서 그림자처럼 숨어 내조하고 그의 아이를 낳아 길렀던 로즈 뵈레를 떠나지 못하는 모습에 카미유가 이별을 결심하고 점차 파멸해 가는 모습 앞에서 폴은 자신의 꿈이었던 세상을 누비는 자유를 누리는 대사관 영사직으로 부임하고 누나를 정신병원에 보내는 데 일종의 방관, 동의를 보냄으로써 남매는 예전의 결속에서 풀려나게 된다. 누이는 유배되고 남동생은 세계 곳곳을 누비며 자신의 역량을 발휘하고 사랑에도 빠지며 대조되는 삶을 살게 된다. 카미유는 사랑했던  남동생을 잊지 못한다. 그로 말할 것 같으면 점점 더 세속적인 성공과 출세, 사회적 명망을 얻게 됨으로써 또한 자신만의 어떤 편견, 아집으로 덧쒸워진 종교에 탐닉함으로써 누이에 대해 더욱 더 비관용적인 태도를 가지게 된다. 그렇게나 집에 돌아오고 싶어했던 누이는 병세가 호전되어도 가족 중 누구 하나 그녀를 잠시라도 외출시키는 데에 도움을 주려 하지 않고 외면한다. 그녀는 삼십 년간 갇혔고 삼십 년간 흙에 손도 대지 않고 아무도 지켜보지 않는 가운데 죽음에 이르고 무연고 무덤에 안장된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한 말은 남동생의 이름이었다.

 

 

 

전기작가 도미니크 보다는 폴 클로델이 말년에 한 인터뷰에 분개하고 중립성을 버린다. 카미유와 폴의 교차하는 삶을 충실히 그려내었던 이 섬세한 작가는 폴이 자신의 삶을 충실한 것으로 누이의 그것을 완전히 아무것도 아닌 실패한 것으로 규정짓는 데에서 그가 노년을 통해 이루어낸 생의 과업들이 보이는 측면에서는 다복한 가정, 정치적 외교적 입지 구축, 작품들의 평가 등으로 장식되었을 지 모르지만 어떤 독선, 아집, 냉정함 등으로 사실 오만한 편견으로 얼룩졌음을 간파한다. 그의 마침표는 누이에게서 멀어져 갔다. 누이가 끝까지 동생을 찾으며 그리워했던 모습은 비록 폴이 유일하게 누이를 가끔이나마 찾아갔던 가족으로 남았던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 이상은 아니었던 것과 슬픈 대조를 이룬다.

 

하지만 이 어두움에 묻혀 있었던 한 위대한 예술가의 사장을 방지하는 데에는 아이러니하게도 폴의 자손들이 손을 보태게 된다. "시간이 모든 것을 제자리로 돌려놓을 것입니다."라고 예언했던 카미유의 후원자 외젠 블로의 이야기는 맞았다. 그녀는 어둠의 장막을 걷고 걸어 나온다. 어느 순간 그녀의 모든 상실, 체념, 분노, 원망의 집약체였던 로댕은 늙어가면서도 그녀를 잊지 않았다. 그녀의 작품의 전시 공간을 부탁했다. 생전 외면되었던 카미유의 작품들은 이제 자신들이 있을 곳을 천천히 찾아 간다.

 

고흐, 테오, 카미유, 폴은 누구라도 처할 좌표이자 상황이다. 또 어떤 지점에 서도 필연적으로 상황이 가지는 속박의 힘은 대단할 것이다. 누군들 폴처럼 하지 않을 자신이 있을까, 테오처럼 할 자신이 있을까, 카미유처럼 자신의 열정, 일을 놓아버릴 위기 앞에 담대할 수 있을까. 이 넷이 그리는 삶의 궤적은 좀더 극단으로 치우쳤을 뿐 현실의 그것과 멀지 않다. 고흐와 테오가 저 머나먼 곳의 별을 향한 시선을 공유했듯, 카미유과 폴이 함께 바라봤던 별이 스쳐 지나간 지점에서 멀어져 버린 피붙이들의 모습은 또 우리의 삶이 교차하는 그것과도 닮아 있다. 더 위대한 더 아름다운 그 무엇보다 더 실하고 그럴듯해 보이는 눈앞의 그것들에 침잠할 때 삶은 조금 더 편해지겠지만 조금 더 역겨워진다. 나는 그래도 아직 고흐와 테오의 모습이 더 아름답고 더 위대해 보인다. 어떤 특수성의 한계로 폴의 선택을 합리화한다고 해도 지금은 역겹고 실망스럽게 느끼는 대로 놓아두려 한다. 그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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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4-12-18 19: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느 델베가 쓴 카미유 평전이나 카미유의 편지글을 모은 <카미유 클로델>도 읽어보면 좋습니다. 만약에 카미유가 여자로 태어나지 않았다면 로댕의 실력을 능가하는 조각가가 되었을지도 몰라요. 카미유의 삶을 그린 오래된 영화도 보고 싶군요.

blanca 2014-12-19 13:57   좋아요 0 | URL
cyrus님, 언급하신 책 미처 몰랐어요. 추천해 주셔서 감사해요. 이자벨 아자니가 나왔던 영화 어렸을 때 봤던 기억이 어렴풋이 남아 있어요. 그 영화가 카미유를 세상 밖으로 내어 놓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것이 이 책에도 나오더라고요. 기회가 되면 다시 한번 제대로 봐야겠어요.

qualia 2014-12-19 0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blanca 님 윗글 읽고 뭉클했네요.

blanca 2014-12-19 13:59   좋아요 0 | URL
저는 고흐가 그림 못지 않게 읽기와 쓰기에 보인 열정, 깊이가 참 놀라웠어요. 동생과 주고받은 편지를 읽는 것만으로도 눈시울이 뜨거워지더라고요. 남동생을 임종 직전까지 찾았다는 카미유의 이야기도 너무 가슴 아팠어요. 요새는 참 인간으로 태어나 산다는 게 꼭 필멸을 전제로 하지 않아도 어느 정도는 다 비참한 일면을 띠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나이가 들어가는 탓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