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반에 육십삼 명이 이부제 수업을 하던 시절이었다. 오후반이 되면 커다란 운동장 뒤켠의 벤치에 가방을 내려놓고 줄을 서서 기다려야 했다. 엄마는 동생을 가져 배가 남산만했다. 나의 1학년은 너무 춥고 슬프고 두려운 기억들. 아직은 엄마의 손길이 필요한 아이들을 육십 명 넘게 거느려야 했던 선생님은 이상적인 스승 이전에 이미 너무나 지친 그런 사람이었다. 그러니 그녀의 체벌은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도 가슴에 자욱이 남았지만 이제는 이해의 덮개로 슬몃 지워보고 싶다. 사람이 아니라 상황이 있다는 말. 누구든 훌륭해지기는 쉽지 않은 그런 상황.
학부모가 되었다. 아이는 또 나만큼이나 작다. 유치원과는 갑자기 달라진 분위기. 끝이 올라가는 상냥한 목소리의 선생님이 모든 것을 들어주고 도와주던 시대는 마감했다. 형형색깔의 아기자기한 주변환경도 조금 살풍경한 것으로 바뀌었다. 이제 규칙과 통제를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나 아이 반 학생은 다해서 스물다섯 명. 오십 명을 넘어가는 아이를 통제해야 했던 피곤함은 다행히 없다. 아, 그런데 엄마는 아기를 안고 업고 있다. 아이를 밀착해서 도와줄 수는 없는 여건. 게다가 동생은 이제 엄마를 안다. 제3자에게 맡길 수 없는 한계. 학교에서는 아직 엄마의 손을 필요로 한다. 엄마의 딸이었던 나의 1학년과 나의 딸의 1학년은 묘하게 닮은 구석이 있다. 그러고 보면 나는 아직도 그 추웠던 1학년에서 저만치 물러나지 못했다. 자꾸 돌아오고야 마는 것들. 나는 성장하고 있다고 믿고 있는데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다.
힘들지만 그래서 읽고 쓸 시간이 없지만 아니, 읽기만 하고 정리를 할 시간은 없지만 무언가를 끄적거릴 여유는 없지만 그래도 꾸준히 읽으려 한다. 말대꾸를 시작한 아이가 사실은 나에게 처음으로 도전장을 내미는 것이 아니라 전체적인 맥락에서 상황을 이해할 수 없는 아직은 미성숙한 단계에 있기 때문이라는 깨달음도 결국은 책으로 얻어낸 것이다. 나 혼자서는 알아낼 도리가 없다.
벌써 나는 내가 어렸을 때 느꼈던 많은 것들의 정서를 잃어 버렸다. 이제 눈높이를 조금 낮추어도 될 텐데. 처음부터 어른으로 태어났던 것처럼 아이 앞에서 잘난 척을 한다. 중학교 때 가요 순위 프로그램들에 흠뻑 빠져 티비 앞에서 심드렁한 엄마의 모습에 의구심을 가진 적이 있다. 이렇게도 가슴 떨리는데 나도 엄마 나이가 되면 스타가 더이상 멋있게 느껴지지 않을까?, 하는. 엄마의 나이가 되면 더이상 가슴 터지도록 눈부시거나 아름답거나 재미있는 것은 없어지는 것이 아닐까?
소심하고 겁이 많은 이 그레그라는 아이의 눈높이는 작가의 작위적인 것이 아니다. 사실 별 기대 없이 시작한 책인데 내가 잊어버렸던 많은 것들이 그리고 내가 지나쳤던 많은 것들이 이 책을 통하여 걸어들어왔다. 웃기기만 한 가벼운 책은 아니다. 아이의 눈높이에서 느끼는 왕따 문제, 형제 간의 소외감, 어른들의 편견, 성적, 숙제의 중압감 등이 그레그를 둘러싼 코믹한 일화들을 통하여 묘사된다. 구태여 머리로 이해하지 않고 천천히 마음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된다. 초특급 엄친아가 아니라면 누구에게나 그레그와 같은 구석은 있다. 초등학교 3학년 이상 정도 된 아이와 함께 읽으면 좋을 것같다. 일부러 어떤 화제나 공감대를 찾아내지 않고 그냥 이 책의 즐거움을 함께 나누는 시간만으로도 아이와의 교감, 공감이 가능할 듯하다. 귀엽고 사랑스러운 이야기.
버지니아 울프의 '의식의 흐름' 기법으로 씌어져 읽기 어렵다는 얘기를 어디에선가 읽은 기억. 솔직히 막 책장이 넘어갈 정도로 서사가 긴박하지는 않다. 그러나 분량 자체가 많지 않고 자식을 여덟이나 둔 중년의 램지 부인과 시대의 인습과 편견에 저항하는 그림 그리는 여자 릴리 브리스코에 투영된 버지니아 울프 자신의 모습을 짐작해 보는 일은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일 것이다. 어느 순간 램지 부인은 죽고 그녀의 집은 쇠락하고 릴리 브리스코는 늙어 다시 램지 부인의 집으로 돌아오고 마침내 램지 부인의 아이들은 반항과 살의의 대상인 아버지 램지와 함께 등대로 향한다. 이 모든 것을 상징과 은유로 읽는다면 <등대로>는 너무나 사변적이고 어려운 추상화가 되어 버린다. 그저 '삶' 앞에서 때로 무력하지만 어떤 지향과 영원히 남을 불멸의 것을 추구하며 '꿈'을 꾸는 인간 본연의 모습을 차분하게 그려 낸 하나의 그림으로 감상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자식들 때문에 최고의 것을 향한 지향의 노정에서 넘어져 버렸다고 생각하는 아버지의 좌절된 꿈을 그린 것은 버지니아 울프의 아버지에 대한 하나의 헌정된 이해와 경의일런지도 모르겠다. 릴리는 홀아비가 된 램지에게 그가 바란 '공감'을 의도적으로 주지 않으려 하지만 그의 등대에의 상륙을 예감하며 동시에 끊임없이 완성하려 했던 그림을 마침내 마친다.
앨리스 먼로는 현대 단편 소설의 쇠락에 단연코 다시 한번!을 외칠 수 있는 작가라고 생각된다. 노벨 문학상을 받은 작가의 작품은 언제나 이 상이 가지는 무게와 의미가 무엇인가, 조금은 갸우뚱 하게 만드는 지점이 있다면 그녀의 <행복한 그림자의 춤>은 노벨 문학상은 이런 작품을 쓸 수 있어야 받을 수 있구나, 싶은 수긍을 가능하게 하였다. 이 작품은 그녀가 절필을 선언하기 직전에 낸 것이라 하니 여든이 넘은 이 작가의 가장 최근의 성취를 목도하게 한다. 자신의 아이가 아닌 다른 남자에 탐닉하며 죄책감을 느끼는 여자의 모습을 그린<일본에 가 닿기를>, 사랑에 빠진 남자에게 버림받고 나중에 우연히 조우하는 그 광경이 너무나 자연스럽고 눈부셔서 눈물이 날 것 같은 <아문센>, 장애가 있는 부유한 여자와의 긴 외도로 뜯어낸 돈으로 자신의 안온한 가정생활을 유지했던 남자에 대한 깨달음이 반전인 <코리>, "어디에서나 이것이 삶이라고 외쳐댔다. 우리에게는 그것이 필요하다는 듯이. 더 겪어봐야 한다는 듯이." 같은 문장을 얻게 하는 <돌리>.
그리고 앨리스 먼로의 <디어 라이프>. 여든이 넘어서도 노벨 문학상을 받을 수 있는 여자의 어린 시절은 아버지의 망한 사업, 어머니의 병("그것은 너무 일찍 발병한 파킨슨병이었고, 그때 어머니는 사십대였다."),아버지의 구타. 그럼에도 그녀는 그 시절을 불행한 것으로 추억하지 않는다. 설거지가 끝나면 문짝이 떨어진 따뜻한 오븐에 발을 넣고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들을 읽는 모습. 혀가 굳어버린 어머니의 말을 대신 통역하는 그녀. 아이 맡길 사람과 차비가 없어 어머니의 장례식에 가지 못한 일을 용서받을 수 없지만 용서하며 사는 삶으로 수긍해버리는 마지막 문장. 이러한 것들이 어떠한 것을 쓸 수 있는 것에 대한 대가라면 그러지 않는 편이 더 낫겠다,는 생각은 비겁한 것일까.
앨리스 먼로는 평생 같은 주제에 대한 변주라는 비난을 받았던 적이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김주영 작가의 어린 시절의 변주는... <홍어>에서도 <잘 가요 엄마>에서도 또 여기에서도 항상 배고픈 소년과 집을 나가버린 아버지를 대신해 날품을 팔아 하루 하루를 연명하며 자식을 키우는 홀어머니에 대한 애달픈 묘사는 각도와 결과 요철을 달리해서 변주된다. 그러나 그 변주는 지루하고 구태의연한 것이 아니라 읽는 이로 하여금 작가의 아픎을 더 세밀하고 절절한 것으로 공감하고 이해하게 하는 마력이 있다. 그리고 그의 섬세하고 생생하고 형형한 문장들 속에서 이야기는 이야기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또 하나의 대체된 삶으로 가능하다는 힘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 세 살 터울의 굶주림으로 마른 버짐이 핀 아우가 아직도 어미에게 업혀야 하는 나이임에도 형과 품팔이를 나간 어머니를 먼 발치에서라도 보려 따라 나섰다 주인집 아이를 대신 업고 있는 엄마의모습에서 뒤돌아서는 장면은 "세상은 아무리 비열한 배반도 능히 저지를 수 있었다."는 버지니아 울프의 이야기를 전혀 과장된 것이 아니라고 느끼게 한다. 여기에는 너무나 처절하고 너무나 빈한하고 너무나 슬프고 그럼에도 아이들의 그 속절없는 기대와 믿음과 희망의 부스러기를 하나 하나 짚어가는 아름다운 눈길이 있다. 가난이 훑고 간 그 너절한 뒤켠에서도 고고함과 꿈을 지키려 하는 모자의 모습은 한 작가를 태동시킨 저력이 어떤 것이었는 지에 대한 곁눈질을 가능하게 한다.
책을 읽고 글을 쓸 때는 조금 덜 치사하고 조금 덜 한심한 사람이 되는 것 같아 기분이 좋다. 잠깐 청명했던 하늘은 다시 찌푸리고 울고 다닐 줄 알았던 아이는 웃으며 교문을 나오고 설마, 하며 다시 친정 엄마에게 시도했던 육개월 아기의 엄마 인식은 사실이었던 것으로 판명되고(대성통곡) 나는 이제 마흔이라는 나이를 향해 걸어가고. 모든 불가능할 것 같았던 일이 가능해지고 당연할 것으로 알았던 일들이 저만치 물러나고. 그렇게 '절대'라는 말과 절대 멀어지는 게 삶인 것 같다. 봄이 오는 것을 보면. 그럴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