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베개 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3
나쓰메 소세키 지음, 송태욱 옮김 / 현암사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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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 살게 된 지 20년이 되어서야 이 세상이 살 만한 가치가 있는 세상임을 알았다. 25년이 되어서야 명암이 표리인 것처럼 해가 드는 곳에는 반드시 그림자가 생긴다는 것을 깨달았다. 서른이 된 오늘날에는 이렇게 생각한다. 기쁨이 깊을 때 근심 또한 깊고, 즐거움이 클수록 괴로움도 크다.-p.16

 

이런 이야기가 서두에 있었다. 줄을 긋는다. 그러고 보면 이러한 깨달음은 반드시 시간과 함께 숙성되는 성질의 것인 것 같다. 스무 살 젊은 아이를 앞에 두고 이러한 이야기를 한들 가슴으로 받아들일 일이 없다. 설사 그렇다고 한다면 그것은 그 아이의 생동하는 나날에 그림자를 드리울 일이다. 감정의 격랑 속에서 애늙은이처럼 내일을 걱정한다면 결코 청춘이 아니다.

 

역시 '나쓰메 소세키다!'라고 무릎을 칠 만한 이야기다. 언제나 그의 작품이 그렇듯 별 사건도 별 구실도 없는데 전체를 놓고 보면 하나의 영롱한 구슬 같다. 온천장에 그림을 그리러 온 화공. 결국 그림은 한 장도 그리지 못하고 하이쿠만 잔뜩 읊다 가는 그 화공의 눈앞에 그려진 봄날의 숲, 바다, 이혼하고 친정으로 돌아온 여인, 동자승, 러일전쟁 출정을 앞둔 젊은이. 그 화공의 시선은 거만하기도 하고 옹졸하기도 하고 편견 안에 갇히기도 하고 한없이 배회하기도 하고 몽환적이기도 하고 지극히 현실적이기도 하다. 그러하기에 그의 언어에는 어떻게도 건드릴 수 없는 울림이 있다. 화공의 입 안에서 나오는 이야기들은 그의 붓을 빌리지 않아도 이미 한장의 화첩을 적신다.

 

미지근한 해변에서 소금기가 있는 봄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와 이발소의 포렴을 졸린 듯이 펄럭인다. 몸을 비스듬히 하고 그 밑을 빠져나가는 제비의 모습이 날쌔게 거울 속으로 떨어진다. 건너편 집에서는 예순 살쯤 되어 보이는 할아범이 처마 밑에 쭈그리고 앉아 잠자코 조개를 까고 있다. 짤가닥 하고 작은 칼이 닿을 때마다 붉은 조갯살이 소쿠리 안으로 숨는다. 껍데기는 반짝하고 빛을 내며 60센티미터 남짓 되는 아지랑이를 가로질러 날아간다.-p.80

 

이러한 묘사는 이발소 주인과 '내'가 나누는 해학이 깃든 대화의 말미에 나온 것이다. 나쓰메 소세키의 재미는 이러한 명징하고 투명한 묘사에도 있지만 그 틈새마다 비어져 나오는 현실적인 즐거움에도 있다. 그러니 그의 이야기는 언제나 재미있다. 머리를 감겨주는 대신 비듬을 격력하게 털어주는, 소세키의 문장을 빌리자면, "지극히 값싼 기염을 토하는 이 주인"과의 이발소 풍경에는 생동하는 유머가 있다. 마침내 이러한 주인까지 즐거운 봄빛 속의 구성 요소로 끼워넣는 능력은 분명 나쓰메 소세키적인 것이다. 그이기에 가능한.

 

서양문명, 중국문명, 일본문명에 대한 그의 비판적인 시각이 중립적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니 그의 문명관에는 구구한 해석이 따른다고 한다. 결국 그가 지향했던 곳에는 자연과 예술, 심지어 인간까지도 그 자체의 날것으로 완상하려는 시도와 노력이 있었다고 생각된다. 동백꽃이 하나씩 연못에 떨어지는 모습을 묘사한 부분은 그의 시선과 언어가 얼마나 철저하게 그러한 시도를 하고 있는 지를 보여준다. "또 뚝 떨어진다."이러한 문장의 반복은 마치 그 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듯, 그 풍경 앞에 서 있는 듯한 착각을 자아내게 할 정도로 정밀하고 생생한 묘파의 일환이다.

 

내세에 환생하면 명자나무가 되고 싶다는 화공의 목소리는 사실 나쓰메 소세키 자신의 것같다. 온천장에 와서 한 장의 그림도 못 그려낸 화공. 그가 그리고자 한 것은 반드시 그림이 아닐 것이다. 생의 한 단면, 사계절의 하나, 결혼에 실패한 여인, 이렇게 단편으로 전체를 조감할 수 있게 하는 능력. 그것의 집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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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4-01-17 19: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이야기가 서두에 있었다. 줄을 긋는다. 그러고 보면 이러한 깨달음은 반드시 시간과 함께 숙성되는 성질의 것인 것 같다. 스무 살 젊은 아이를 앞에 두고 이러한 이야기를 한들 가슴으로 받아들일 일이 없다. 설사 그렇다고 한다면 그것은 그 아이의 생동하는 나날에 그림자를 드리울 일이다. 감정의 격랑 속에서 애늙은이처럼 내일을 걱정한다면 결코 청춘이 아니다"


이 이야기에 급 동감하면서도 .. 그런 청춘들이 간혹, 그러니까 제게는 천재들 같은 이들이 있더라구요.
세월의 배움이 가르쳐 주기 전에 간파해버리는 청춘들..

blanca님의 비유법에 읽어보지 않은 글이 손에 잡힐 듯 그려집니다.. ~~

blanca 2014-01-18 12:31   좋아요 0 | URL
어쩌면 제가 그렇게 현명하게 젊음을 다시 한번 살아보고 싶은 마음 때문에 이렇게 표현한 것도 같아요. 정말 그런 현명한 청춘들을 만나보셨다니 그 아해들도^^;; 새벽숲길님도 부러워집니다.

다크아이즈 2014-01-18 09: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스메 소세키처럼 묘사법을 구사할 수 있다면...
전 꿈에도 그리할 것 같지 않아 자꾸만 그의 문장 하나하나를 들여다보게 됩니다.
구시대? 사람이지만 신세대 감각에 절대 뒤지지 않는 소세키...
블랑카님도 휴일 잘 보내시어요.^^*

blanca 2014-01-18 12:32   좋아요 0 | URL
팜므느와르님, 이 사람은 정말 작가로 태어난 사람인 것 같아요. 태생부터가 남다른. 물론 노력도 했겠지만 사물을 보고 표현하는 능력이 남달라요. 저는 모처럼 아이가 영화관 나들이를 가서 ㅋㅋ 좀 쉬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