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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지 않는다는 말
김연수 지음 / 마음의숲 / 2012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시험이 끝나면 광화문 교보문고에 갔다. 사고 싶은 책 두어 권을 고르면 아쉽고도 또 아쉬운 발걸음으로 근처 회사에서 일하던 아버지와 만나 주전부리를 하고 집으로 돌아오곤 하던 기억. 재개장을 하고 얼굴을 바꾼 교보문고에 가도 과거의 그 시간들은 켜켜이 쌓여 발부리에 채인다. 기시감이라고 해야 할까. 무언가 설명할 수 없는 애틋하고도 소중한 느낌들. 오늘 교보문고는 세상에서 가장 사람이 많았다. 정말 너무 너무 많아서 숨이 턱턱 막혔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하필 이 더운 오늘 날을 잡고 교보문고를 다 점령한 듯 했다. 재개장 속에서 건재하여 어떤 사람은 의아해도 하고 어떤 사람은 반가워하기도 한 그 식당에 들어오던 넥타이 부대 중 한 명이 "정말 처음이야. 이렇게 많은 사람!"이라는 말에 무조건 동조할 수밖에 없을 만큼 많은 사람들. 정작 책은 한 권도 보지 못하고 어마어마한 가격의 지구본들만 보다 지쳐 돌아오고 말았다.
거기는 거기 평생 갇혀서 죽는 한이 있더라도 행복할 것만 같은 곳이었다. 나는 정말 미칠 것만 같았다.
- p.180
거기가 바로 여기다. 나도 미칠 것만 같았다. 그 때는 그런 곳을 죽을 때까지 점령하지 못할 것만 같은 그 목마름과 애타는 마음 때문에. 오늘은 정말 너무 덥고 (물론 안은 시원했다, 하지만 너무 더워서 그 수많은 사람들은 교보문고로 향한 것이었을 것이기에) 갑자기 우리 나라의 독서 인구가 급증한 것도 아니었을 텐데 편안하고 조용히 책 한 권 볼 여유도 자락도 없는 그 분주함과 그 빽빽한 밀도 때문에. 그래도 나는 여전히 그곳에 끌린다. 김연수의 이 책은 이런 "나도 그랬어! 나도 그래! 맞아!"가 빗발치는 곳들이다. 그의 이 에세이를 읽고 나도 미칠 것만 같았다. 갑자기 일산 호수공원에 이사가고 싶어지고 이 지글지글 뼈와 살이 익을 것같은 무더위 속에서 러너가 되고 싶어지고 잭 케루악의 <길 위에서>를 당장 주문하고 싶어지고 등등. 수많은 충동과 변화를 종용하는 책. 그러니 무더위 속에서 이러한 책을 읽고 마음이 달뜨는 것이 좋은 것인지 의문이 들게 하는 책.
사실 이 책은 달리는 소설가로서의 자기 이야기로 하루키의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 많다. 하루키의 소설을 완독해 본 경험이 없는 나로서는 이 두 작가의 작법이나 작풍의 공통점을 정확하게 지적해낼 수는 없지만 매일 매일 꾸준히 달리며 매일 매일 조금씩이라도 꾸준히 쓰는 그 자세와 인생에 대한 기본적인 마음가짐 같은 것이 상당히 흡사하다는 것만은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 둘은 몹시 성실하다. 그리고 그 성실한 자세에 대한 기본적인 신뢰가 상당히 강력한 것이어서 읽는 이에까지 전염시킨다. 왠지 나도 몹시 성실해야 할 것 같고 그러는 것이 인생에 대한 기본적인 태도로 적절할 것 같아서. 달리는 일을 인생의 메타포로 치환하는 것은 김연수도 하루키도 동의한 일이다. 그렇다면 인생은 달콤하기만 한 것도 고통스럽기만 한 것도 아니다. 싫은 것도 아니다. 그러한 덤덤하면서도 일견 따뜻하기도 하고 쿨한 시선이 참 좋다. 위안이 된다. 조언이 된다. 지침이 된다. 겁쟁이이자 걱정 투성이인 나에게는.
고통이 아니라 경험에 집중하는 일을 반복적으로 행하는 건 삶을 살아가는 데 상당히 도움이 된다.
- p.24
나에겐 상당히 유효한 전언이다. 미래의 일들도 그렇고 과거의 추억도 그렇고 고통거리는 산적해 있다. 그것에 초점을 맞추다 보면 삶은 고해다. 그런데 그러한 것들이 하나의 경험으로 자리매김하고 그것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집중할 때 갖게 되는 의미는 우연으로 흩어져 있는 것들을 구조적으로 통합하여 안정감을 준다. 할 만한 것이었고 해 볼만한 일들이다. 조금 힘들어도 괜찮다. 이것도 경험이다. 그 때 그 터널을 통과하여 여기에 이른 것의 도정에는 성장이 있었다. 반드시 이기지 않았어도 나의 키는 이 만큼 자랐다. 괜찮다. 비교적.
나는 아침에 일어나 하늘을 볼 때마다 내가 여린 사람이라는 걸 인정한다. 여리다는 건 과거나 미래의 날씨 속에 살지 않겠다는 말이다. 나는 매 순간 변하는 날씨에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살고 싶다. 그래서 날마다 그날의 날씨를 최대한 즐기는 일관성이 없는 사람이 되고 싶다. 가장 건강한 마음이란 쉽게 상처받는 마음이다.
-p.42
이렇게 말해주는 사람이 있었으면 했다. 이제 자신있게 "나는 여리다!"라고 말할 수 없게 되었지만 그리고 되도록 마음의 생채기가 다 꾸덕꾸덕 굳어 굉장히 굳건하고 안정감 있는 사람인 체하고 싶었지만 그래도 기본적으로 내가 가진 그 나약함이 인생 앞에서 패배자임을 인정하게 하는 근거로 폄하되지 않기를 바랐다. 강한 자가 되어 흔들리지 않고 전진만 하는 이들에 대한 환상이 환상으로서만 그치기를 결국 다 살게 되면 그렇지 않아도 아니 그런 사람이 되지 않는 것이 삶을 더 많이 느끼고 더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데에 유리했던 하나의 큰 장점이었음을 김연수의 고백으로 더 빨리 깨닫는 셈이 된 것임을. 그러고 보면 이 책에는 이런 이야기들 투성이다.
교보문고로 가는 길 지하도에는 유행에 뒤떨어진, 그리고 당장 시급하게 쓰일 것 같지 않은 물건들의 좌판이 한창이었다. 삼십년만 전이었어도 나는 그 좌판 앞에 쪼그리고 앉아 할머니를 졸랐을 지 모른다. 왜 갑자기 그 좌판을 보고 '할머니와 나'의 추억이 돌아왔는 지 알 수는 없다. 문득문득 사금파리처럼 빛나는 추억들. 인생은 꼭 뒤돌아 봐야만 이해하고 알 수 있는 것들로 점철되어 있는 것인지. 그건 그 순간에 충분히 몰두하지 않았던 때문인지. 그렇다면 그 추억은 흘려 보내고 지금은 내 옆의 딸아이의 손을 잡을 일이다. 삼십 년이 지나고 나는 또 지금을 떠올릴 것이기 때문에. 왠지 모를 아련함과 서글프고 한없이 아쉬운 느낌으로.
지금 이 순간에 몰두하지 않는 자는 유죄다. 그러므로 그는 완전히 몰두할 때까지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같은 순간을 맞이해야 할 것이다.
-p.2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