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닉
아니 에르노 지음, 조용희 옮김 / 문학동네 / 2004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그래, 만나서 이야기하자."

삐삐의 음성 사서함에서 다음 만남의 기약을 들었다. 그래, 그럼 만날 수 있는 거구나. 만나서 무슨 이야기를 들을지 걱정하기 전에 다음 만남의 기약이 주는 안도와 기쁨에 겨워 버렸다. 그런데 그 만남은 불발로 끝났다. 나는 찌질하게 채였다. 그렇게 울며불며 열광했던 스무 살의 첫사랑은 비겁하고 부끄럽게 막을 내렸다.

 

그것은 너무나 미숙했고 자기 도취적이었고 과잉이었기 때문에 지나고 나니 사랑으로도 욕망으로도 취합이 안 되었다. 차라리 중학교 때 혼자서 러브레터를 쓰며 언젠가는 만나 전해줄 거라 믿었던 뉴키즈언더블럭의 조 메킨타이어에 대한 열광의 시즌2  정도라고 해 두는 것이 나을 것 같기도 하다. 기다리고 또 기다리고 실망하고 또 넘어지고 그리고 또 끊임없이 헛꿈을 꾸고. 괴로워할 이유와 눈물 흘릴 이유는 깨알처럼 많았다. 수많은 결핍을 모아 과잉으로 만들었다. 목이 마르고 또 말랐다.

 

갑자기 사춘기 때와 똑같은 서글픔을 느낀다. 마흔여덟 살에서 쉰두 살 사이의 중년의 여자가 사춘기 때와 얼마나 비슷한 것을 느끼는지에 대해 언젠가 말해야겠다. 똑같은 기다림, 똑같은 욕망. 그러나 여름으로 가는 대신 겨울로 가고 있다. 하지만 "인생을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실은 너무 잘 모른다. 다만 사춘기 때만큼 괴로워하지 않는 몇 가지 하찮은 방법만 알고 있을 뿐이다.

-p.318,319

 

나는 또 착각하고 있었다. 인생을 알아가고 있다고. 이 책에 대한 솔직한 리뷰를 과연 쓸 수 있을까? 마흔 여덟의 여자가 서른 다섯의 유부남에 탐닉하는 얘기를? 게다가 이 책의 저자는 (작가가 아니다) 무려 스스로 "직접 체험하지 않은 허구를 쓴 적은 한 번도 없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공언하는 아니 에르노다. 지독하게 솔직한 고백 앞에서는 그 내용과는 관련없이 그냥 져 주고 싶은 무력감이 차오른다. 도덕적인 잣대, 사회적인 통념, 상식을 들이밀기 이전에 도저히 재단할 수 없는 그 간명한 호소 앞에서 나마저 고고한 심판관 역할을 자처하고 싶진 않다. 자신의 사랑을 미화하지 않는다. 사랑할 가치도 없는 별로 지적이지도 않은 미숙하고 거만하고 속물적인 젊은 남자 앞에서 그녀는 어머니가 되고 물주가 되고 욕망의 배설구가 된다. 그녀의 얘기다. 그 유치한 남자를 위해 러시아어를 배우고 전화가 오기를 기도하며 걸인에게 적선을 한다. 사춘기를 지나도 오지 않는 전화 때문에 밤새 울고 가위에 눌릴 수 있다. 어쩌면 삼류 신파 영화 같은 얘기일 수도 있다. 나의 사춘기를, 스무 살을, 그녀의 마흔 여덟 살에 대입하며 공감했다. 세상은 단 하나의 경계로 나뉜다. 그의 전화와 기다림. 후에는 가짜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진짜였을지도. 로맹가리가 얘기했던 것처럼 "노년이 '배워 알고' 있는 것은 실상 그것이 잊어버린 모든 것"일런지도. 나이가 들어가며 편안해지는 것은 어쩌면 스스로를 완전하게 기만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아니 에르노의 처절할 만큼 솔직하고 잔인한 고백 앞에서는 그런 생각이 스쳐갔다.

 

이야기의 마지막은 처음으로 다시 회귀한다. 나쁜 애송이는 작별 인사도 없이 떠나버린다. 아니 에르노의 표현을 빌리자면 "내 타입이었지만 그럴 가치는 없었던 한 남자"를 스무 살이 아닌 마흔여덟 살에 만나도 결론은 항상 눈물이다. 사춘기의 아이는 저만치 걸어가 버린 게 아니다. 항상 어딘가에 웅크리고 있다 기지개를 켤 틈을 엿본다. 돌아오면 또다시 울면서 맞을 수밖에 없을까. 인간은 성숙하는 게 아니라 성숙한다고 착각하며 죽을 때까지 미숙하고 유치한, 하지만 가장 절절한 그 시기를 재연할 기회를 엿보는 것일까. 우리는 언제나 속아주고 만다.

 

 

넉 달. 아직은 추억 때문에 운다. 아직은 내가 하는 모든 일은 그를 위한 것이다.-p.330

 

 

그녀의 고백은 위험하면서도 슬프다. 도저히 공감할 수 없을 것 같으면서도 모두가 공감할 수 있다. 사춘기를 가지지 않은 사람은 없으니까. 사랑과 욕망의 경계가 얼마나 불분명한지를 고백하는 애가는 죽을 때까지 부를 수밖에 없다.

 

p.s.  이 책을 그녀를 위하여 소설로 분류해야 했을까? 아니, 내가 제대로 이해한 것인지도 확신할 수가 없다. 그녀의 일기를 읽었다고 믿고 있는데 이것도 교묘한 장치에 불과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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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2-06-02 09: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표지부터 강렬하네요. 아니 에르노.
블랑카님의 첫사랑 고백이 좋은걸요. 결핍을 모아 만드는 과잉에 대한 이야기요.^^
모든 사랑은 첫사랑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어요. 마흔여덟이 되니까요.
완전할 수 없고 부족하고 불안하고 서툴고 불발이고 그런 점에서요.
편안한 주말 보내세요~~~~ 블랑카님.^^

blanca 2012-06-03 22:58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님, 덕택에 편안한 주말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일욜 저녁에 갑자기 배탈이 난 건지. 지금은 몸이 영 안 좋네요. 고통을 항상 망각하고 모든 고통을 처음처럼 다시 아프게 겪는다는 저자의 말에도 공감이 갔어요. 그러고 보면 사람은 죽을 때까지 익숙해지지 못하는 것들 투성이인가 봅니다.

다락방 2012-06-03 0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제는 아니 에르노를 다시 읽어보려고 해요. 이젠 그녀의 소설(이라고 부를게요)을 이제는 소화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블랑카님의 이 리뷰가 거기에 불을 당기네요. 리뷰가 무척 좋아요, 블랑카님.

blanca 2012-06-03 23:00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 이 책을 권해 드립니다. 저는 사실 이런 류의 책을 처음 읽어봐요. 정말 너무 솔직해서 책을 읽다 깜짝 깜짝 놀라기도 해요. 그런데 그 속에 어떤 진실에 대한 강력한 환기가 있는 것 같아서요. 참 묘한 책이에요. 모든 '척'을 벗어던지고 나면 그 속살이 어떤지의 유무를 떠나 그냥 어떤 공감이 가능해지는 것 같아요. 놀라웠답니다.

Jeanne_Hebuterne 2012-06-03 1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쓰러질 때 마다 읽었던 유일한 글.
좋이 죽으면 살 수도 있을 것이라는 걸 알려준 점쟁이 같은 글.

blanca 2012-06-03 23:02   좋아요 0 | URL
쥬드님, 무슨 말씀이신지 이 책을 다 읽고 나니 저는 이해할 수 있었어요. 그리고 저는 책을 통한 간접 소통이라는 것을 처음 경험했습니다.

2012-06-28 21: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6-29 10:34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