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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로우 데스 - 일상 속 내 아이를 서서히 죽이는 오리인형의 진실
릭 스미스.브루스 루리에 지음, 임지원 옮김 / 동아일보사 / 2011년 10월
평점 :
절판
샤워솜에 바디샴푸를 듬뿍 바른다. 부걱부걱 거품이 피어오른다. 젖은 머리에 오백 원짜리 동전만큼 샴푸를 발라 헹군다. 그 머리에 다시 헤어컨디셔너를 바른다. 헹구고 다시 헤어 트리트먼트를 바른다. 나온다. 다시 바디로션을 바른다. 갈라진 발뒤꿈치에는 발전용 각질크림을 바른다.
화장대 앞에 앉는다. 스킨, 로션만 얼굴에 바르면서 너무 피부에 소흘한 것이 아닌가 하는 죄책감이 들어 굴러다니는 에센스 샘플병을 찾아 바른다. 머리를 말리기 전에 끝이 다 갈라진 머리칼에 헤어에센스를 뿌린다. 음이온이 나온다고 선전하는(믿을 수는 없지만) 헤어드라이기로 머리칼 틈새 틈새 손을 넣어 머리를 말리기 시작한다.
이 일련의 과정. 많은 의미를 두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내가 내 몸을 소흘히 하지 않았다는 안도감을 주기는 한다.
그. 러.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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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하버드 공중보건 대학원의 수전 듀티 박사에게 전화를 걸어 실험계획에 대한 자문을 구했다. 듀티는 2005년,400명의 남성 소변의 프탈레이트 농도와 그들이 사용하는 목욕용품의 종류 간의 상관관계를 살펴본 흥미로운 논문을 발표했다. 그녀는 매우 명확하고 놀라운 상관관계를 밝혀냈다. 더 많은 제품을 사용하면 할수록 소변 중의 MEP 농도가 높게 나타났던 것이다. P.8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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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에틸프탈레이트(DEP)는 제품에 들어 있는 다른 성분들의 윤활유 역할을 한다고 한다. 로션이 피부에 잘 스며들게하고 향이 오래 지속되도록 해준다. 우리들의 집 안의 목욕용품, 각종 세제 들에 들어있다. 목욕이나 각종 접촉을 통해 우리 몸에 침투해 들어와 호르몬을 교란시킨다. 특히 아이들의 발달 장애 및 신경학적 문제와 성인 남성 기능의 생식 기능 저하, 고환암 등과 관련되어 있는 근거들이 나오고 있다.
나는 몸에서 오염물질을 씻어 내기 위하여 더 많은 화학 물질들에 내 몸을 축이고 더불어 우리가 마실 물을 오염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자, 이제 목욕을 했으니 먹을 차례다. 가스 레인지 위에는 코팅이 군데군데 벗겨진 난스틱 후라이팬, 일명 테팔이 올려져 있다. 코팅 후라이팬을 사용하면 웬만한 요리는 초보라도 가능하다. 들러붙지 않고 뒤집개로 뒤집는 일도 간단하다. 수명은 짧다. 그 벗겨진 코팅제가 대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하면 머리가 아파온다. 스텐 후라이팬은 워낙 고가이고 관리도 어렵다는 얘기에 애초에 고려 대상도 아니었다.(이 책 이후로 저렴한 스텐 후라이팬을 주문했다) 부엌 조리기구 찬장에는 이렇게 코팅이 벗겨졌지만 버리기 아까워 둔 후라이팬이 두 개나 더 있다. 이 후라이팬은 주로 튀김을 하거나 생선을 굽는 데에 사용해 왔다. 참치 통조림에서 참치를 꺼내어 전을 부친다. 아이는 가방에서 영수증을 꺼내어 그 뒤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그냥 일상이다. 거창한 의식이 아니다. 그런데 이토록 사소하고도 자잘한 일상들에서 나는 테플론과 수은을 먹고 먹이고 비스페놀A로 오염되고 있는 아이를 방치하는 셈이 되었다. 그리고 정작 그런 화학 물질을 방출하지도 환경을 오염시킬 의도도 없었던 무고한 남반구의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사소하다면 사소한 일들. 그리고 관성. 뭘 그 정도를 가지고. 이건 쉬운 일이다. 좀더 편하기를 바라고 좀더 무감각해지기를 원한다면 인생은 쉽지만 무의미해진다. 그리고 정말 내 몸을, 내 아이의 몸을 대우하는 일을 포기하는 일이기도 하다.
작가인 엘리자베스 스톤은 아이를 갖는다는 것은 "나의 심장이 내 몸 밖으로 나가 바깥세상을 걸어 다니게 될 것을 영원히 결정하는일"이라고 했다.(p.326) 나의 심장만이 아니다. 무고한 수많은 어린 심장들에는 수많은 독성물질들이 쌓여가고 있다. 어떤 물질이 그 이하에서는 안전하다,는 논리로 대중들을 안심시키려는 기업들, 정부 기관. 저자는 '수용 불가능한 안전성'을 평가하지 않고 '수용 가능한 유해성'을 내세우는 그들에게 분노한다. 그리고 마침내 아이들 우윳병에서 용출되는 비스페놀A에 대적하기 위하여 아이 엄마들과 주의회로 향한다. 단단하고 가벼운 플라스틱 용기를 만드는데 사용되었던 비스페놀A에 노출되었던 생쥐에게서 태어난 암컷 생쥐의 난자는 40%나 손상되어 있었다. 단 한번의 노출이었다. 주지사 앞에서 아이들은 난장판을 만들었다. 엄마들은 젖을 먹이고 아이들을 달랬다. 캐나다는 세계 최초로 비스페놀A 노출을 제한하는 국가가 되었다. 레이첼 카슨의 본능적 직관을 칭찬했던 저자는 그 직관 앞에서 용감하게 행동한다. 뭉클했다.
이 책의 미덕은 진정성에 있다. 저자들은 자신들의 몸에 실제로 수은, 프탈레이트, 비스페놀류 등을 축적시키는 단기 생체 실험을 자행한다. 단 며칠의 조금 과장된 생활용품들에의 노출로 우리 몸 속의 독성물질은 어마어마하게 치솟는다. 각종 문명의 이기들을 사용하며 우리 몸에서 좋은 향기를 내뿜을 때 우리는 스스로에게도 타인들에게도 얼마간은 유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