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해고도에 갇혀 아무도 나를 이해해 주지 않는다고 원망하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런데, 순간 '이해'라는 것은 나의 못난 모습을 적나라하게 알아 주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내가 꽤 괜찮은 인간임을 긍정받고 싶은 욕망과 다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신형철의 <느낌의 공동체>를 읽다 깨달았다.
 |
|
|
|
김소연은 마음에 대해서 말한다. "'이해'란 가장 잘한 오해이고, '오해'란 가장 적나라한 이해다. '너는 나를 이해하는구나'라는 말은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나를 잘 오해해준다는 뜻이며, '너는 나를 오해하는구나'라는 말은 내가 보여주지 않고자 했던 내 속을 어떻게 그렇게 꿰뚫어보았느냐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
|
|
|
 |

요즘 자존감에 대하여 많이 생각해 본다. 내가 비교적 자존감이 높지 않은 사람이라 더 민감하게 주변 사람들을 지켜보게 된다. 자존감은 유아기 때 주양육자와의 관계 속에서 싹트기 때문에 성인이 되어 틀 자체를 바꾸기란 여간해서는 쉽지 않은 것 같다. 그렇다고 절대적으로 유아기가 전생애를 지배한다,는 식으로 완강하고 체념적으로 결론 내리는 요즘의 분위기도 쉽게 수긍하고 싶지 않다. 이는 주양육자의 죄책감을 자극하고 성인교육을 방해할 위험이 다분하다.
누구나 결국 내가 가치 있는 존재라는 느낌을 가지고 살고 싶어한다. 자존감이 높으면 타인의 판단에 기대지 않아도 된다고는 하지만 타인의 평가에 덤덤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런지.
그러니까 나도 나를 제대로 오해해 주기를 바라나 보다. 신형철이 소개한 김소연 시인에게 들켜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