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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의 기쁨과 슬픔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이레 / 2009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별거 아닌 일도 밤에 혼자서 이것저것 주워섬기다 보면 절로 우울해진다. 어느 해. 그날 저녁 나는 또 기다리는 무언가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데에 무척 실망하고 최악의 상황도 상상해 보고 그랬더랬다. 그리고 매일 다니기 싫다,고 노래를 부르고 다녔던 회사에 정상적으로 출근해서 빈속에 믹스커피를 마시고 직원들을 기다렸다. 하나 둘, 출근하는 직원들과 똑같은 하루가 시작되었다. 열심히 일하는 척 괜히 오버해 가며 잉크토너도 갈고 서고에서 서류철도 하나씩 꺼내고 슬쩍슬쩍 인터넷 검색도 하며 전화에 대고는 최고로 아름다운 척, 친절한 척 하는 목소리 연기도 열심히 하며, 여느 날과 하나도 다를 것 없는 똑같은 하루 속에 퐁당 빠졌다. 그런데 아주 이상한 느낌을 받게 되었다. 어제의 그 고민이 태양이 풀잎 위의 이슬을 삼키듯 저절로 스러져 버리는 것이다. 시간은 멈추고 눈앞의 기한이 더 크게 느껴지고 매일매일 똑같은 농담과 한탄을 나누는 직원들은 언제까지나 내 옆에서 그대로 그 나이로 정지해 줄 것만 같았다. 내가 내 삶에서 한번씩 거창한 것들을 추구하고 기다리는 일들이 마치 전생의 꿈만 같게 느껴졌다. 일이 있어 다행이다, 라는 아주 드문 안도감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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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은 우리의 원근감을 파괴해버리는데, 우리는 오히려 바로 그 점 때문에 일에 감사한다. 우리가 이런저런 사건들과 난잡하게 뒤섞이도록 해주는 것에, 파리로 엔진오일을 팔러 가는 동안 우리 자신의 죽음과 우리의 사업의 몰락을 아름다울 정도로 가볍게 생각하게 해주는 것에, 그것을 단순한 지적 명제로 여기게 해주는 것에 감사한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근시안적으로 행동한다. 그 안에 존재의 순수한 에너지가 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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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였구나! 싶은 통찰들. 현대에서 '일'은 마치 개인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것처럼 아주 대단한 의미와 가치를 함유하고 있는 것으로 떠받들여 진다. 소개팅에서 제일 먼저 거론되는 '그'나 '그녀'를 소개하는 문구는 직업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직업에 맞추어 보지도 않은 그들의 인상, 성격, 기호를 상상한다. 그 사람이 수행하는 '일'안에서의 작업과 보수는 그 사람 자체로 환원되어 버린다. 일에 매달려서 새털같은 날들을 하나씩 하나씩 빼먹고 일에 근거해서 상대방을 판단하는 일은 안 그러는 것보다 쉽고 덜 불안하다. 저자는 이 지점에서 출발한다. 회의실에 저소득층 어머니들을 모아놓고 그들의 심리적 갈망을 새로운 제품의 조직원리로 통합하겠다고 덤비는 비스킷 공장의 디자인 책임자, 위성발사를 위해 일하는 우주센터 직원들, 5년 전 여자친구의 죽음 후 종일토록 떡갈나무를 진지하게 관찰하고 그리는 화가, 송전선을 따라 여행하는 송전엔지니어, 감사 업무에 불멸을 위한 기회는 없다는 사실을 우아하게 받아들이는 회계사들, 상업화의 가능성은 요원한데도 자신들의 아이디어에 어마어마한 환상과 꿈을 둘러친 빈곤한 창업자들을 만나면서 '일'이 그 자체로 심원한 가치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일'을 통해 존재를 유지해 나가는 동력과 삶의 기만들을 망각할 수 있다는 그 수단적 역할에 경의를 표한다.
냉소 같기도 하고 비아냥거림 같기도 한 내용이 알랭 드 보통의 목소리를 빌려오면 섬세하고 진지한 고백처럼 들린다. 그러니까 이대로도 좋다는 것. 무언가 더한 의미와 가치 추구를 위한 명분을 구태여 찾아 헤맬 필요가 있을까? 라고 진지하게 회의감을 드러내는 저자의 모습은 안도감을 준다. 코 앞의 일들에 코를 박고 있는 것은 삶에 있어 아주 유용한 일이다. 그런 것들을 다 비워내 버리고 진지하게 '나는 누구이고 어디에서 어디로 가는가'라는 질문을 쏘아 대기 시작하면 자멸이다. 존재의 동력은 그것으로 채워지는 것이 아니다. 가끔씩 빵빵하게 채워져 있을 때 터지지 않게 바람을 빼주는 역할 정도가 삶에 대해 존재에 대하여 던지는 '왜'라는 질문일까. 이 책은 그러니까 다양한 직업의 초상화라기 보다는 (작가의 의도는 이것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시선을 멀리 떨구지 않고 바로 코 앞에 던질 수 있도록 해주는 '일'의 그 편협한 구획 나누기의 미덕을 강조하면서 그 미덕의 한계를 지적하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