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 그때 나의 엄마와 아빠가 해운대에서 입맞춤을 하지 않았더라면.
아니, 설사 그랬다손 치더라도 각자 다른 사람을 만나 결혼했더라면, 그래서 각기 다른 아이들을 낳았더라면.
수많은 시간을 뚫고 왜 하필 지금 여기에서 내가 이 사람을 만나 이 아이를 낳고 오늘 지금 이 순간에 자판을 두들기고 있나.
이런 생각들에 스치울 때면 존재가 무거워지는 것도 같고 한없이 가벼워지는 것도 같다. 그러나 대부분 나는 이런 것들은
잊고 치워두고 비본질적이고 치사하고 졸렬한 것들에 집착하고 매달려 하루하루를 소진하고 있다. 한 살 한 살 나이가 더 들어갈 수록 우리는 더욱더 근시가 된다. 마침내 정말 코앞의 것들밖에 보이지 않을 때 우리는 존재의 지평선 너머로 슬쩍 밀려가 버리고 만다. 영겁의 시간들 속에 그렇게 우리 존재는 역사 속 의미있는 한 줄도 되지 못한 채 그저 그렇게 흔적도 없이 스러져 간다.
모든 것의 의미를 알아차릴 수는 없다. 모든 것의 본질로 포박해 들어갈 수는 없다. 관념적이고 그럴듯한 것들로 삶전체를 채울 수도 없다. 싸고 먹고 마시고 소진하고 낳고 그러다 보면 의도하지 않은 마침표를 수용할 수밖에 없는 시간에 당도한다.
두 번은 없다.
반복되는 하루는 단 한 번도 없다.
두 번의 똑같은 밤도 없고,
두 번의 한결같은 입맞춤도 없고,
두 번의 동일한 눈빛도 없다.
<중략>
너는 존재한다.-그러므로 사라질 것이다.
저는 사라진다-그러므로 아름답다.
쉼보르스카 '두 번은 없다'중

시를 즐겨 읽지도 않고, 더군다나 시집을 사모으지도 않는다. 어느 날 정혜윤의 <런던을 속삭여 줄게>에서 이름도 어려운 쉼보르스카의 <박물관>이라는 인용된 시를 우연히 마주치게 되었다. 박물관의 사물들에 대한 그녀의 명쾌하고 예리한 서사 부여가 가슴 끝을 찌르는 듯이 박혀 왔다.
왕관이 머리보다 더 오래 살아남았어요.
손은 장갑에게 굴복하고 말았어요.
오른쪽 구두는 발과 싸워 승리했어요.
이런 시를 쓰는 시인이라니. 박물관에서 무심코 지나치는 유물들이 인간의 삶을 뛰어넘는 그곳에서 완강하게 버티고 있는 그 모습에 대한 코믹한 시구들은 시인이 범속한 우리들과는 다른 겹눈을 가진 듯한 느낌마저 가지게 한다. 우리가 말하고 싶지만 언어로 미처 형상화해내지 못하는 것들, 찰나를 스치고 지나가 금방 잊혀져 가는, 그러나 본질적인 깨달음들을 이 폴란드의 여류시인은 재빠르게 채어 놀랍도록 명징하고 알아듣기 쉬운 언어로 되돌려 준다. 그녀는 시인은 인생이 마치 고갈되지 않는 재고품이라도 되는 듯 함부로 낭비되는 것에 일종의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다고 고백한다. <쓰지 않은 시에 대한 검열 중>
EBS에서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 위에서 메릴 스트립의 수줍게 웃는 모습을 찍어 대던 그 나이든 사진작가는 <평원의 무법자>에서 황량한 모래 바람을 가르며 총질을 해대는 젊고 매력적인 이방인으로 분하고 있었다. 무릎 위에는 쉼보르스카의 껍질에서부터 뿌리 구석구석까지 양파스럽고 겉과 속이 항상 일치하는 성공적인 피조물이라는 양파의 미덕에 대한 찬사를 들으며 끊임없이 죽여대고 복수하고 폼을 잡는 서부의 총잡이의 얘기를 슬쩍슬쩍 눈안에 퍼담았다. 육체로 말하고 호소하고 사랑하던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이제 눈빛으로 호소하고 당면한 욕망을 억누르고 뒤안길로 빠지는 미덕을 목하 보여 주는 노인으로 분하게 되었다. 시간과 싸워 이길 수 있는 존재는 없다. 우리는 모두 죽음이라는 그 종결점에 결론적으로 동의하고 만 무력한 존재들이다. 모든 미소한 것들이 옴쭉달싹 할 수 없게 우리를 옭아 매는 그 순간에 이런 시를 읽고 이따금 삶이라는 것을 전체적으로 조망하고 찰나에 스며든 존재의 그 무력하지만 신비한 속성을 응시할 수 있다는 것은 분명 행운인 것 같다.
힘들 때마다 이 시집을 읽으려고 한다. 완전히 다른 누군가가 될 수도 있었던 그 가능성을 떠올리며 하필 내가 이 지점에서 나로 이렇게 살고 있는 것에 대한 신비로운 존귀함을 기억하고 나의 시간들이 얼마나 찰나적인 것인지에 대한 깨달음을 잊지 않도록. 삶의 비의를 살짝 훔쳐 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