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의 어느 맑은 아침에 100퍼센트의 여자를 만나는 일에 관하여. 

하루키와는 그렇게 만났다. 그때가 스무살이었는지, 스물두살이었는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매일 붙어 하루를 고스란히 공유하고 완벽한 이상형이라며 서로의 짝사랑 상대를 신격화하는게 소일거리였던 나와 그녀. 그녀는 갑자기 하루키에게 완전히 빠졌다. 하루키는 일순간 교주가 되었다. 사실 하루키가 아니더라도 그 나이때는 무언가 완전하게 몰입하고 찬탄할 대상을 하이에나처럼 찾아 헤매는 시기이니까. 그리고 그녀는 하루키의 책을 읽을 것을 강권하기 시작했다. 절독시기였던 나는 모든 문자화된 것을 거부하는 것이 무슨 젊음의 특권인마냥 살고 있었기에 그녀의 청을 유야무야 밀어내고 있었다.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다. 정말 눈물나도록 예쁜 얘기가 있다고 마침내 그 빌려온 책을 나에게 넘겨주고 제발 읽으라고 부탁했다. 

장편도 아닌 단편을 읽을 도리밖에 없었다. 친구를 위하여 그리고 어쩌면 또 같이 방방 뛰며 흥분해댈 재료거리가 될 수도 있으므로. 제목도 참으로 그럴듯하지 않은가. 100퍼센트라니. 

화장실에서 그 짧은 단편을 심드렁하게 읽어내고 나는 하루키는 나와 맞지 않다고 결론지었다. 그러니까 단편소설이 아니라 하나의 공상 같은 거였다. 누구나 한번쯤은 떠올렸을 법한. 서로에게 완벽한 이상형이던 소년 소녀의 엇갈린 재회. 그 빛나던 시절의 기억이 얼마나 찰나적이고 몽환적인 거였었는지에 대한 조금은 씁쓸한 깨달음 같은 거. 

<상실의 숲> 여동생이 빌려와 자기것마냥 반납하지 않고 떡하니 소장하고 있던 그 책을 무척이나 불성실하게 통독하고 역시나 나는 그와 맞지 않는다고 느꼈다. 청춘소설의 대명사, 젊은 날의 하나의 이정표마냥 추앙받는 그 책을 나는 제대로 이해하고 느끼지 못했다. 

그런 하루키가 육십이 넘어 21세기를 맞고도 건재하다니. 하루키의 에세이를 읽으려고 결심하게 된 것은 박완서 덕분이었다. 여든의 노작가의 진솔한 감상평과 과장되지 않은 칭찬은 그 무엇보다 강력한 하루키 마케팅이었다. 나에게는.

 

이 책을  읽고 하루키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이 책은 거의 유일한 하루키의 개인적 고백담이라고 한다. 달리기에 대한 얘기는 사실 하나의 메타포이고 그 속에 하루키가 소설가로서 살아가는 삶에 대한 진솔하고 담백한 이야기가 스며들어가 있어 재미있고 진지하게 읽힌다. 문득문득 비어져 나오는 그의 삶을 통한 깨달음에 대한 작은 경구들은 내가 살아나가고 사람을 만나고 읽고 쓰는 일에 대해서도 하나의 엄중한 조언으로 작용한다. 

그는 82년에 달리기를 시작해서 23년간 스물세 번 풀코스를 완주했다고 한다. 결승점에 도달하면 이제 더 이상 뛰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이 지배한다는 그의 진심어린 고백은 사실 뛰는 일이 전업작가로서의 성실하고 치열한 자세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과 맞닿아 있다. 그는 더 잘 쓰기 위해 처절하게 성실하게 언제나 달리고 있다. 재즈 클럽을 운영하며 야구를 관람하던 그가 갑자기 하늘에서 춤추듯 내려왔다는 소설을 쓰고자 하는 욕구하나로 우연찮게 소설가가 되었지만 그 후로는 현실에서의 인간 관계보다 독자들과의 그 관념적인 인간관계를 더 무게중심에 두고 자신의 사적 즐거움을 뒤로 미루고 근육을 훈련하듯 글쓰는 일에 집중하는 그의 모습은 그가 보여지는 것보다 더 진중하고 성실한 작가임을 알게 한다.  

지는 일에 길들여져 있다. 세상에는 내 능력으로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산만큼 있고, 아무리 해도 이길 수 없는 상대가 산더미처럼 있다.-p.145  
 

문학성과 상업성의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은 것으로 호평받는 그가 지는 일에 길들여져 있다는 고백에 순간 뜨악해졌다. 거액의 선인세 논란의 중심에까지 있었던 그가 보는 세상은 의외로 불공평하고 불가항력적인 것들 투성이었다. 성공한 자가 보는 세상은 손안에 잡아 챌 수 있을 만큼 작고 또 그는 이기는 일에 익숙해져 있을 거라 생각했었다. 나는 아직 더 커야 하나 보다. 세상과 사람을 여전히 제대로 읽지 못하고 있다. 개개인의 한계를 오만하게 초월하라고 초월할 수 있다고 꼬드기는 대신, 그는 그 한계를 직시하기를 권한다. 다만 그 한계 속에서 효과적으로 자기를 불태우기를 권한다. 달리기와 사는것이 다르지 않은 이유다. 이 당연한 얘기가 그의 입을 통해 나오니 청량감이 있다.  

당연히 이 세상에는 100%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건 젊은 날의 향수 같은 거다. 있다고 믿으며 보내는 그 시간들도 나름대로 소중하다. 뒤돌아 보면 눈물나는 시간들이다. 그 소년과 소녀는 서른이 넘어 우연히 골목길에서 재회한다. 그런데 서로를 알아보지 못한다. 슬프지만 괜찮다. 가능하다고 여겼던 시간들이 스러지고 이제는 현실을 직시할 차례다. 우리는 그 다음으로 85%, 혹은 65% 정도의 삶을 살게 된다. 그건 체념과는 다른 것같다. 거기 안에서 100%를 추구하는 것. 그 정도의 얘기인 것 같다. 

태어나서 단 한번도 무지개를 보지 못했다. 라디오 DJ가 청취자들이 무지개를 봤다고 사연을 보내온다고 했다. 나는 무지개도 못 본 인생이라 생각하며 베란다로 걸어 나갔다. 세상에. 빨주노초파남보의 그 그림책 속 무지개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무지개라고 알만한 것이 천상의 다리로 걸려 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무지개를 본 날이다. 이런 날도 있다. 라디오에서는 스티브 바라캇의 Rainbow Bridge가 흘러 나온다. 너무 좋아했던 그 노래. 그리고 무지개. 골목길 모퉁이에서 우연찮게 마주친 나의 과거의 100% 같은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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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08-10 2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궁금증 하나 - 그럼 당시 blanca님의 그 "신격화한" 짝사랑 상대는 누구였나요?
궁금증 두울 - 오늘 무지개를 처음 보신 걸까요? .. 그렇담 읏!
궁금증 세엣 - 오늘은 "다음뷰" 를 안하셨는데. 이유라도 있을까요?

여름밤에 읽는 청량한 글이었습니다. 근데 이상한걸로 궁금증이 생기네요~ blanca님 :D

blanca 2010-08-11 14:56   좋아요 0 | URL
바람결님 ㅋㅋㅋ 스무 살의 짝사랑은 회고해 보면 참 유치하잖아요. 근데 누구라고 하면 바람결님이 아실까요?^^;;; 무지개 정말 첨 봤어요. 정말로. 일기쓸라구요. 다음뷰~ 지금이라도 하죠,^^

blanca 2010-08-11 15:35   좋아요 0 | URL
그런데 안되네요--;;

마녀고양이 2010-08-11 1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호호홋, 드디어 내가 아는 책이....... ^^
나 하루키 팬인거 알져? 특히 에세이 집에서. 성향 탓인가봐여. 난 좀 현실적이면서, 쿨하게 세상을 바라보는, 그러면서도 깊이는 잃지 않는 책들이 좋거든요.. 자기 감정에 겨운 책들이나, 너무 관계가 거미줄같은 책은 잘 못 읽겠어요.

blanca 2010-08-11 14:58   좋아요 0 | URL
아, 마녀고양이님이 하루키 팬이시군요. 1Q84 혹시 읽으셨어여? 대체 얼마나 잼나길래 그리도 1위를 상중하가 오랫동안 압도적으로 지키고 있는지 넘 궁금한데 쉽게 읽게 되진 않아서요^^;; 저도 요새는 등장인물 이름 다 잊어버리고 관계는 중간쯤 오면 다 엉망되서 사람이 지나치게 많이 나와서 이리 저리 얽힌 책은 별로더라구요.

마녀고양이 2010-08-11 18:56   좋아요 0 | URL
1Q84 얼마전에 리뷰 올렸어요..
사실 책이 의도하는 바가 파악이 안 되서, 최근 하루키 인터뷰를 찾아서 올린게 더 많지만. ^^
역시 하루키 소설 어려워여~

비로그인 2010-08-15 22:55   좋아요 0 | URL
ㅎㅎㅎ 블랑카님, 백년의 고독에 단단히 데이셨군요.

저는 작가로서의 하루끼는 안좋아하는데 [달리기를~]은 계속 마음에 남는 에세이집이었어요. [먼 북소리]도 읽을까 생각중이에요.

마태우스 2010-08-14 16: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루키가 60을 넘었다는 사실에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전 40대 후반이거나 50대 초반, 이 정도 생각했는데... 하여간 훌륭한 작가들의 에세이는 읽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혹독할 정도로 자신을 단련시키는 광경이 눈에 들어오더라구요. 하루키가 마라톤 애호가라는 것도 처음 알았네요. 100%는 없지만, 그걸 향해서 달려가야겠지요...

blanca 2010-08-14 21:41   좋아요 0 | URL
저도 나이듣고 깜놀했어요. 그렇게는 도저히 안보이던데. 역시 자기관리가 한몫 한 것 같아요. 예. 유명인들의 에세이는 남는 게 꼭 한가지가 있더라구요. 좀전에 엄청 큰 소리로 천둥이 쳐서 깜짝 놀랐습니다.--;; 마태우스님은 혹시 들으셨는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