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인간의 모습으로 내려온 천사가 있었다. 죽음으로 넘어가는 고통스러운 최후의 길목, 그 천사의 도움으로 노인이 본 풍경은 열일곱 첫사랑 소녀가 강가에 배를 대고 그를 맞아주는 모습이었다. 노인은 행복하게 눈을 감는다. 

십 대에 즐겨보던 미국드라마의 그 한 장면은 시리게 내 마음 한 켠에 박혀있다. 청춘이란 그런 것이다. 작가의 말처럼 태어나서 살고 죽는 사이에 가장 찬란한 순간, 그런 순간, 눈을 비비고 있어도 빛이 나는 그런. 죽는 그 순간에도 가장 붙잡고 싶은 가장 떠나 보내기 힘든 그런. 

윤교수의 말처럼 공교롭게도 더이상 청춘이라고 일컫기 힘든, 이제는 죽어도 요절이라고 불러주기 뭣한 그런 나이 서른 셋을 통과하며 윤이, 단이, 명서, 미루가 쓰고 읽고 걷고 울고 투쟁하고 좌절하고 분노하며 떠나 보내는 스무 살을 읽었다. 

자꾸 마음에 눈물이 차올랐다. 나에게도 오래전, 이라고 쓴 뒤에야 왜 그때 그러지 못했나, 싶은 일들. 살아가면서 아, 그때!라고 나도 모르게 터져 나오던 자책들을 주워모아 뒤로 뒤로 가고야 마는 처절한 스무 살의 기억들이 걸어나오기 시작했다. 윤이, 단이, 명서, 미루가 통과했던 시대적 질곡을 밟고서야 개인의 고뇌를 들이밀 수 있었던 80년대의 청춘과는 빛깔이 달랐지만 나를 둘러싼 모든 소소한 일들을 추상적이고 철학적인 사유의 틀로 걸러 그럴듯한 것들로 만들고 싶어 더 불행했던 그 청춘의 기억들이 별처럼 하나씩 깜빡거렸다. 그때의 나는 지극히 과장적이었다. 모든 생것들이 그대로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들을 그때는 몰랐다. 소통이 실패해도 내가 쏘아올린 전파는 어디엔가 가 닿아 또다른 움틈을 만든다는 깨달음을 알지 못했다. 나는 무조건 슬프고 무조건 기뻤다. 나는 이들처럼 읽지도 쓰지도 않고 그저 걷기만 했다. 걸으면서 타인과 현상을 다시 들여다 본게 아니라 배경을 음악처럼 내 눈에 문지르며 주로 자책하고 자악했다. 아쉽게도 뭔가를 본 사람 같은 윤교수로부터 이런 말을 선물받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가 짊어진 무게만큼 그만한 무게의 세계를 우리가 발로 딛고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불행히도 지상의 인간은 가볍게 이 세상의 중력으로부터 해방되어 비상하듯 살 수는 없습니다. 인생은 매순간 우리에게 힘든 결단과 희생을 요구합니다.산다는 것은 무의 허공을 지나는 것이 아니라 무게와 부피와 질감을 지닌 실존하는 것들의 관계망을 지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살아 있으라. 마지막 한 모금의 숨이 남아 있는 그 순간까지 이 세계 속에서 사랑하고 투쟁하고 분노하고 슬퍼하며 살아 있으라.   

                                                                                                                                                      -p.291

엄마를 잃고 이 도시에 온 나 윤이, 열심히 투쟁하고 분노하지만 정작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어디에서 전화를 거는지도 모른 채 새벽마다 윤이에게 전화를 걸게 된 명서, 사라져 버린 연인과 그를 그렇게 만든 세상에 시위하듯 분신자살한 언니를 둔 미루, 에밀리 디킨슨의 시집을 사주고 너.는. 나.를. 사.랑.하.지. 않.으.니.까,라고 말했던 단이. 이 넷은 젊음이 통과하는 상실의 길목의 체현 같았다. 이렇게 쫓기고 고독하고 불안하고 이렇게 두려운 그 골목 골목 사이마다 작가는 이런 날이 다시 올까?. 똑같은 날은 없어.라고 각인시키며 영롱하고 아름다운 구슬들을 굴려 넣는다.  

아.름.답.다. 그럼에도 진.지.하.다. 고 생각했다. 소설가들이 인간 자아의 실체를 뿌리 깊은 곳에 이르기까지 분명하게 드러내 줄 수 있는 과거를 재생해 내는 일을 하고 있다는 테렌스 데 프레의 얘기는 신경숙에게 가 공명한다. 그녀는 분명 자신이 직간접으로 통과해 온 청춘을 형상화했지만 그들은 저마다 우리의 껍질을 뚫고 들어와 우리의 스무 살을 불러 낸다. 이 소설의 보너스는 그것에 그치지 않고 그 기억들을 흘러가는 꽃잎처럼 아름답게 보내는 방법을 넌지시 일깨우고 그 기억들이 박혀 있던 상흔들을 삶의 의미로 메워주는 일을 해주는 것이다. 살아있어서 그 눈부신 시절을 통과해오고 마침내 여기에 이르러서 다행하다,고 느끼게 해주는 것. 그건 분명 신비의 묘약 같은 이 소설의 마력이다. 

우리말로 쓴 우리의 청춘소설을 들고 나온 작가는 작가로서의 진중한 고민들과 소망들을 슬며시 끼워넣는다. 독자는 예기치 않게 그녀의 속내를 엿보게 되는 은근한 즐거움에 취하게 된다. 

그래도 언젠가는 그리고 어느날엔가는 눈 내리는 새벽에 이 책상에서 글을 쓰거나 책을 읽다가 가만히 엎드린 채 눈을 감고 싶다. 그게 지상에서의 나의 마지막 모습이었으면 한다. -p.26 

폭력에 이로운 문장은 단 한 문장도 써서는 안된다.-p.89 

결국 하고 싶었던 그녀의 말. 그리고 남은 말은 우.리.다. 나와 너에 관한 얘기는 내가 그쪽으로 갈게,로 연결되고 만다. 모르는 백 명을 포옹해주는 모습을 촬영하는 프로젝트의 도정에서 다시 나타난 명서의 모습은 그런 얘기들이 모인 것이다. <어디엔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는 그래서 서로를 찾고 마침내 만나고야 마는 모습을 환기한다. 이별하지 않기 위해 약속을 남용했던 청춘은 그런 얘기들로 이루어진 한 장이다. 이런 깨달음들을 가지고 다시 그 시간들을 살고 싶다. 인생의 맨 끝에 청춘이 있어야 한다는 명서의 말을 울컥 삼킨다.

잃어버린 것들에 절망할 줄 모르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정말이다. 그게 삶이다.


댓글(8)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비로그인 2010-05-30 2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 글은 참 아름다워요^^

blanca 2010-05-31 13:53   좋아요 0 | URL
마기님 고마워요~ 아름답다니...과하지만 기분이 둥둥 뜨는 칭찬입니다.

마녀고양이 2010-05-31 1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청춘이란 겪는 사람은 괴롭고, 훔쳐보는 사람은 부러운 그런거죠.
블랑카님... 진짜 20세로 돌아가고 싶으세여? 저는 절레절레... ^^
지금 하세요, 못한 것들. 문화센터의 수강생 언니들이 "저보고 내 나이 40만 되면 좋겠다" 그런답니다. 아하하.

blanca 2010-05-31 13:54   좋아요 0 | URL
ㅋㅋㅋ 안그래도 친정엄마가 야단치더라구요. 자기도 젊으면서--;; 이렇게 얘기하면서요. 저도 원래 절레절레였는데요. 갑자기 올해부터 그러고 싶어졌어요. 참 이상하지요? 이것도 과정인가봐요. 다시 절레절레가 되겠지요?

비로그인 2010-06-01 0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음에 눈물이 차오른다는 것. 그 느낌 전부는 아니겠지만, 어렴풋하게나마 알 것 같습니다..

기억, 잊지 못하는 장면들. 어쩌면 저는 그것들을 떠올리며 하루 하루를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네요..

blanca 2010-06-01 17:30   좋아요 0 | URL
바람결님, 결국 추억도 자기 삶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견디기 위해서 의지하게 되는 것 같아요. 잊지 못하는 장면들이 있죠. 정말~ 갑자기 한 장면이 생각나서^^

강래희 2010-06-04 2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 너무 예뻐요
전 초등학생 같아 부끄럽네요 ^^

blanca 2010-06-05 22:14   좋아요 0 | URL
예쁘다니, 괜히 쑥쓰러워지는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