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가 꽉 막혔다. 눈물, 콧물 다 줄줄 흘러내리고 흡사 물에 빠져 허우적대며 세상을 바라보는 느낌이다. 모든것들이 비현실적으로 보이고 귓가를 윙윙대는 것만 같다. 

어딜 가나 분노와 불신, 비난 등이 난무한다. 한몫 거들어 댓글을 달고 숨돌리고 또 분노하고 그러다 유아기로 퇴행중이다. 이런 어른 노릇이 힘겹고 지겨워지려고 한다. 벌써. 

힘들 때면 내가 아이였을 때를 생각한다. 완벽하게 행복하지는 않았지만 책임지지 않아도 되고 무조건 위로받고 이해받을 여지로 충만했던 시기는 죽을 때까지 꿈으로 남아 있을 것 같다. 세상에 태어나서 좋았던 건 아이로 살아봤다는 것이다. 나이가 들어갈 수록 추억의 시계는 점점 더 거꾸로 돌아가 멈춘다. 그래서 노망이 나면 옛기억을 붙잡게 되나 보다.  

내가 바라는 것은 사람이 사람 귀한 줄을 알고 그 사람들의 시간을 존중해 주는 거다. 나이든 이들이 결정하고 추진한 바를 젊은 아이들이 고스란히 감수하고 때로는 생명까지 바쳐야 되는 이 모순이 역겹다. 살아온 시간들을 빌미로 다른 이들의 남은 시간들을 분탕질칠 수 있다고 착각하고 시간에 권력을 행사하는 일이야말로 가장 잔인한 일이 아닐까. 

정말 정치를 제대로 알고 시국을 걱정하는 마음에서 화가 나는 것인지, 나 자신의 결핍과 감정마저 투사하는 것인지 나도 잘 모르겠다. 테렌스 데 프레의 <생존자>에 흠뻑 빠져 홀로코스트 문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책을 사서 읽는 것에 익숙해지다 보니 빌려서 줄을 긋지 못하고 간지를 무슨 문어발처럼 붙여 대는 일이 낯설고 좀 싫다. 도서관에 다 있는 책들인데 주문했다. 

 

 

 

 

 

 

 

<이것이 인간인가>는 제목 한 번 걸쭉하다. 누구나 극단의 상황에서 쉽게 되뇌게 되는 말이지만 사실 저자가 수용소 체험을 직접 회고한 이 책의 리얼리티에 기분이 너무 다운되서 책을 그만 읽었다는 사람까지 있으니 그 정도의 이해는 곡해이상이 아닐 수 있다. 이렇게 아우슈비츠에서 힘겹게 살아나온 저자는 끝내 자살한다. 슬픈 반전이다. 삶이란 언제나 반전이 도사리고 있다 튀어 나오는 불편하고 흥미로운 영화 같다.  스스로 삶의 종결을 집행한 이가 살아나온 이야기라니. 

<디아스포라 기행>은 실제로 보고 사려고 했는데 서점에서 미친듯이 머리를 쥐어뜯다가 디~ 다음이 생각안나서 못보고 말았다. 이럴 때 아이폰이 절실하다. 알라딘 장바구니만 보면 되는데. 여하튼 디아스포라를 생각해 내려고 온갖 단어를 다 조합하다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디아스포라'라는 말은 유대인뿐 아니라 아르메니아인, 팔레스타인인 등 다양한 '이산의 백성'을 지칭하는 용어로 쓰이고 있다고 한다. 여기에 프리모 레비의 위 책이 등장한다고 하니 두 책이 묘하게 엮여 있는 셈이다. 결국 인간이 인간을 대우하는 최악의 마지노선을 더듬거리며 살아나간다는 것에 대한 실증이 아닐까 싶다. 이런 책들은 언제나 읽고 나면 기분이 침체된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말로 쓴 청춘의 얘기를 읽고 싶었다. 신경숙의 언어는 투명하고 아름답다. 김훈의 그것이 명징하고 둔중한 맛이 있다면 그녀의 문장들은 잘 닦인 구슬 같아 손안에 품고 싶어진다. 이 언어가 삶의 결 속에 잘 미끄러져 들어갈 때의 그 성취는 놀랍다. 그녀의 책을 읽으며 이제는 나의 시계를 이십대로 돌려 조금 가까운 과거를 쓰다듬어 보고 싶다. 누군가 전화해서 '너의 스무 살을 나는 기억하고 있어.'라고 말해주는 상상을 해본다.  

내일 깨면 코가 뚫리기를. 책들이 오겠지. 그 책들에 코를 박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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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05-25 0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진 글에 '즐겨찾는 서재'로 누르지 않을 수가 없었어요.^^

blanca 2010-05-25 09:58   좋아요 0 | URL
마기님 어서 오세요^^ 즐겨찾는 서재가 되는건 언제나 기뻐요.

기억의집 2010-05-25 08: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레비의 책을 읽고나면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들에게 대하는 모순때문에 더 괴로워요.

아, 근데 왜 저는 신경숙한테는 매력을 못 느끼는지 모르겠어요. 20대 시절에는 한국소설을 많이 읽어 신경숙의 초기작품을 읽긴했는데.... 점점 멀어지네요. 그 때도 매력을 못 느꼈는데 지금도 매 한가지. 블랑카님이 신경숙의 언어가 투명하고 아름답다는 말에 끌리긴 해요.

코를 뻥뚜러에 갖다 댈 수도 없고..하핫, 책 받는 순간 시원하지 않을까요?!

blanca 2010-05-25 10:03   좋아요 0 | URL
아! 레비책을 읽으셨군요! 안그래도 유대인들의 팔레스타인들을 대하는 자세를 보면 더 비극적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유대인 핍박을 얘기할 때 슬쩍 넘어가기 쉬운 문제가 바로 이거더라구요. 본인들의 고통만 부각되고 정작 자신들이 행하는 또다른 학대는 어물쩍 넘어가는.

신경숙은^^ 저는 원래 안좋아했었는데요. 아주 늦게 <외딴방>을 읽고 다시 보게 됐답니다. 시적인 문장이 좋아서요. 신간은 어떨지 모르겠어요.

코는. 흑흑. 기억의 집님. 요새 감기 걸린 사람들은 다 저어하는 분위기라 가택 연금되어 울고 있습니다. 너무 괴롭네요.--;;

stella.K 2010-05-25 1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홀로코스트 문학 한동안 안 봤는데 나이를 먹어서일까요?
다시 관심이 가요. 아직 읽은 책은 없지만...또 조만간 다시...
아무래도 읽고나면 기분이 다운이 되긴 하겠죠? 하지만 그 뒤에 희망을 보기도 하지만...

신경숙의 <리진>은 흥미롭게 봤는데 역시 <엄마를 부탁해>를 보고는 또 갈등이 생기더군요.
도무지 이 작가를 나는 어떻게 받아들여하는 걸까? 글은 너무 잘 쓰는데 우울하고 맥아리없는 건 여전하고,
어.나.벨 책은 예쁘고...암튼 그냥 지켜만 보고 있습니다요.ㅠ

blanca 2010-05-25 10:50   좋아요 0 | URL
스텔라님! 저도 이상하게 <엄마를 부탁해>가 아쉬움이 많이 남더라구요. 맥아리 ㅋㅋㅋ 갑자기 딴 얘긴데 제가 자주 쓰는 용언데 누가 대체 그게 뭐냐고 하더라구요.^^;;

함 읽어보고 말씀드릴게요. 행복한 하루 되세요~

stella.K 2010-05-25 11:12   좋아요 0 | URL
앗, 전염됐다. 그렇지 않아도 누가 썼던 것 같은데 누구지...?
했다능. 그런데 블랑카님이셨군요.ㅎㅎㅎ
님도 좋은 하루 되세요.^^

마녀고양이 2010-05-25 1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기 나으세요. 저는 머리만 아픈데, 블랑카님은 코도 막혔군요.
제 처지가 조금더 나은가... 아하하. 지금은 아가야가 괴롭혀도 금방 커버리면, 그리울걸요~ ^^

blanca 2010-05-25 17:48   좋아요 0 | URL
저도 그리워하게 될 것 같기는 한데^^;; 그래서 후회안하려고 노력중입니다. 마녀고양이님 처지가 훨씬 나아요. 일단 코가 막히고 콧물이 나면 남사스러워 밖에 잘 못나간답니다.ㅋㅋㅋ

L.SHIN 2010-05-25 14: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책들에 코를 박고 싶어진다"

나의 스무 살은 어땠었지..? 하고 무심코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아, 그 스무 살이 끝날 무렵에 죽을 뻔 했었군요. 하지만 그 때 만큼 열심히었던 적은 없었습니다. 잠시 뿐 이어도.

blanca 2010-05-25 17:49   좋아요 0 | URL
진짜요? 또 궁금해지는걸요. 온갖 상상이 ㅋㅋㅋ 스무 살은 어렸을 때도 그리고 지금도 가장 저한테 의미 있는 나이예요. 죽을 때까지도 그럴 것 같아요.

2010-05-25 15: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5-25 17: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꿈꾸는섬 2010-05-25 17: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고 얼른 감기 나으세요.^^ 일교차가 커서 감기 잘 걸리죠.
제목보고 얼른 들어왔어요. 저도 스무살을 기억하고 싶어요.ㅎㅎ 누군가의 스무살도 기억하고 있구요.ㅎㅎ

blanca 2010-05-25 17:50   좋아요 0 | URL
꿈꾸는섬님! 누군가의 스무 살이 의미심장하게 들립니다. 아기가 감기에 걸리면 대번 또 저한테 옮네요. 빨랑 나을게요.

2010-05-25 22: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5-26 12: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따라쟁이 2010-06-03 18: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십대를 살면서도 스무살이 그립습니다. 원래. 스무살이란.. 그런건가봐요. 안녕하세요^-^

blanca 2010-06-04 10:03   좋아요 0 | URL
따라쟁이님, 퍼스나콘이라고 하나요? 파란 하늘에 종이비행기를 날리는 모습이 너무 이뻐 한참 보게 됩니다. 이십대를 사신다니...흑흑 그 말 만으로도 따라쟁이님을 부러워하게 되네요. 스무 살 때는 몰랐어요. 그렇게도 눈부신 나이인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