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를 맞고 다니던 시절이 있었다. 그래도 추리해 보이지  않을 설익음과 당당함이 있었다. 이제는 비를 맞고 있으면 조금 불쌍해 보일 만한 처지가 되었다. 비를 맞지 않고 빗소리를 들을 수 있어 다행스럽다. 빗소리는 그 어떤 배경음악보다 단조롭고 거슬리지 않는다.  

<삼성을 생각한다>를 읽었다. 소설 같았다. 김용철 변호사의 얘기가 신뢰성이 부족해 봬서가 아니라 그가 외부에 나와 토해낸 내부의 얘기들이 모이니 하나의 코미디가 따로 없었다. 대기업들의 눈가리고 아웅식의 편법 승계와 횡행하는 부조리를 몰랐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나도 삼성의 이름이 가지는 무게와 그 신화에서 완벽하게 자유롭지 못했던 것 또한 사실이다. 욕하더라도 마지막은 그래도 삼성이잖아,라고 변명거리를 만들어 주었었다. 그래서 김용철 변호사의 양심고백이 불편했을런지도 몰랐다. 언론에 의해 주입되고 각종 경제 지표에 깊게 물려 있는 거대 기업의 아우라에 물들어 우리는 그의 얘기를 경청하는 데 인색했다. 이 책을 읽고 나서 삼성이 진심으로 불편해졌다. 거대 이익 밑에 깔린 도덕을 목도하는 일은 괴롭고도 아픈 일이었다. 언제까지나 이런 모습에 익숙해져서는 안될 터다. 불편하고도 아픈 진실을 들추어 내고 타성과 관성을 벗겨 내는 일은 숙명적으로 저항과 거부감을 동반한다. 하지만 인간으로서 인간답게 존재의 방점을 찍어가며 살고자 한다면 그 소롯길을 피할 도리가 없다. 상쾌한 기분전환을 필요로 한다면 권할 수 없는 책이다.  

   

한 때 <냉정과 열정 사이>의 열풍이 대단했었다. 두 작가가 나란히 연인의 입장에서 서로 다른 이야기를 고백한다는 발상 자체가 파격적이고 신선했던 것 같다. 잘 뽑아낸 작가들의 사진도 홍보 역할을 톡톡히 했다. 츠치 히토나리와 에쿠니 가오리의 얼굴선은 그대로 남자 주인공과 여자 주인공의 환영을 만들어 냈다. 텍스트가 작가의 존재로 이미지화되는 경험은 색다른 즐거움이었다. 배경인 이탈리아의 두오모도 더불어 각광받았었다.  

그리고 에쿠니 가오리의 책들을 읽어 나가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그녀의 책은 일단 잘 읽힌다. 복잡한 심리묘사도 지루한 배경 묘사도 없다. 푹 꺼지는 낡은 소파에 드러누워 졸며졸며 읽어도 왠지 다 작가는 이해해 줄 것만 같은 안온함이 있었다. 지극히 단조롭고 그 날이 그 날 같은 정말 드라마틱하지 않은 일상의 얘기들을 줄세워 놓았는데 그것을 하나하나 만져 보는 일에 중독되는 것이다. 하지만 최근작 <빨간 장화>는 그런 단조로움이 더이상 나와 소통되지 않을 것 같다는 막연한 이별의 예감을 떠올리게 했다. 

 

그녀는 언제나 그 자리에 있지만 나는 그 자리를 떠나려고 하나 보다. 식상하다고 감히 얘기할 수 없는 것은 나는 이 작가를 좋아했고 지금도 미련을 가지고 있고 앞으로 어떻게 달라질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녀를 여전히 사랑하는 다른 사람에게 이 책은 지금 가고 있다.

김연수의 <세계의 끝 여자친구>는 말미에 실린 문학평론가 신형철의 해설이 돋을새김처럼 떠오른다. 좀 과장하자면 신부측 하객이 신부보다 더 예쁜 경우 같다. 해설이 너무 좋았다,는 어느 리뷰어의 말에 말미의 피로감을 누르고 주의깊게 읽었다. 시적인 언어로 쓰인 작품에 대한 사려깊고 진지한 해설은 기대이상이었다. 맥락의 독서는 여기에서 시작되었다. 수전 손택의 소설론이 인용되었고, 체호프의 단편의 떨림이 전해졌다. 김연수가 번역하고 오마주를 바친 레이먼드 카버의 <대성당>도 들이민다. 그러니 내 시야 반경 안에 들어올리 없었던 수전 손택의 책들이 들어왔고, 체호프의 단편에 압도되어 미친듯이 중고로 산 단편집에 줄을 좍좍 그어대고, 마침내 카버의 <대성당>까지 읽게 된 것이다. 이 정도라면 나는 신형철에게 오마주를 바쳐야 하는 건지.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지금은 <대성당>을 읽고 있는데, 아니 레이먼드 카버를 읽고 있는데(참 이상한게 왜 작가의 작품보다 작가를 읽는다고 해야 간지가 나는지, 착각인지도 모르지만) 아주 좋아 죽겠다고 과장하지는 못하겠다. 단편이 정말 끝내준다,는 생각을 줬던 경우는 거의 없었던 것 같다. 아무래도 하고 싶은 얘기들과 아퀴를 지어야 하는 얘기들이 엉키는 그 교차로에 선 작가의 혼란 때문인 것 같다. 그럼에도 대단하다고 느꼈던 단편선은 솔제니친과 오정희 정도다.  

레이먼드 카버의 얘기들은(아직 표제작도 읽지 못했지만) 그리 대단한 얘기들도 아닌데 일단 재미있다. 동료집에 방문했다 그 집의 아기를 계속 보여 달라고 졸라대는데 안주인이 지금은 자게 하고 깨면 데려오겠다고 못 박는 그런 얘기.(사실 내가 그랬었다. 하도 시달리다 보니 손님들에게 아기를 깨워 보여주고픈 마음까지 사그라들더라.) 그렇게 귀하게 용안을 대면할 기회를 얻었으나 막상 못생긴 아이를 보고 거짓으로 예쁘다,고 못해주며 여럿이 무안해지는 그런 장면들에 대한 얘기. 그러니 너무 사실적이고 너무 적나라해서 되레 웃음이 터질 수밖에 없다. 이런 얘기는 누가 소설로 써주기 전까지는 대놓고 하기 참 힘든 사연들이다. 

그리고 오고 있다. 이 책들이. 괜히 이런 책들이 읽고 싶어지는 때다. 뜨고 싶은가 보다. 

 

 

 

 

 

 

 

언제나 장바구니에 넣었다가 빠지기를 거듭하는 책들. 책 좀 읽는다는 사람들이 너무 사랑한다고 외쳐대는 바로 그 책들. 나는 언제쯤 읽게 될까. 그리고 이 망설임은 뭘까. 

 

 

 

 

 

 

 

망설임의 이유는 단 하나다. 책장이 잘 안 넘어갈까 걱정되서다. 좋은 책이 언제나 기똥차게 재미있는 것은 아니다. 누가 좀 재미있어 죽겠다고 당장 읽으라고 등좀 떠밀어 줬으면 좋겠다. 

그리고 요즘 드는 걱정들은 독서 편식이다. 문학과 심리학, 처세술, 자녀교육 쪽으로만 기우뚱하고 인문사회과학쪽으로는 담을 쌓은 독서가 현실감각을 마비시키고 있지 않나 심히 걱정된다. 꿈만 꾸지 그 꿈으로 가는 현실적인 이정표에는 청맹과니처럼 우둔하다. 그러니 각종 사회 현안들을 나의 열등감이나 투사시켜 극도로 흥분하고 떠들기나 했지 나름대로의 프리즘을 통해 통찰력 있게 해석하고 제대로 비판하는 일에 서툴다. 욕하기 위한 욕을 주워섬기는 일에 매달리다 보면 사람이 추해진다. 그러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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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0-04-13 0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볼때마다 느끼지만 글을 참 잘 써요.
나는 대체 묘사가 안돼서 있는 그대로만 옮기니 재미가 없어요.ㅜㅜ
나도 이런 거 써야 하는데...읽었던 책, 읽다만 책, 읽어야 할 책~ ^^

blanca 2010-04-13 17:06   좋아요 0 | URL
순오기님 칭찬은 언제나 기분이 좋아요. 감사합니다. 그리고 유명 블로거인 순오기님 글이 재미가 없다니요. 순오기님 글 읽다 가슴 찡한 감동을 많이 받았답니다.

다락방 2010-04-13 08: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맨 마지막의 세권 [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과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 [존재의 세가지 거짓말]은 마치 저를 위한 선택인것 같아요. 제가 모두 대단히 사랑하는 책들이에요. 특히 [엄청나게~]는 제 인생의 책이라고 선택할 만큼 아름답고 감동이 충분한 책이지요. 책장이 잘 안넘어 갈 것 같다는 걱정은 안하셔도 될 것 같아요. [엄청나게~]는 가끔 처음에 멈추는 사람들을 보긴 했지만, 사실 몇장만 읽어도 꽤 사랑스러운 소설이거든요. 저도 최근에 [존재의 세가지 거짓말]을 읽고 엄청 충격 받아서 중권도 사두었어요. 세 권 다 후회하지 않으실거에요. 읽기를 잘했다고 생각하실 거에요. 정말로요. 제가 지금 등 떠밀고 있는거에요, blanca 님.

blanca 2010-04-13 17:08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 오셨군요. 위 세 책을 다 읽으셨군요. 우와! 저 책들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너무나 많이 봤답니다. 알고는 있는데 항상 뒤로 미루어 두게 되요. 꼭 읽게 될 거니 자꾸 미루는 건지, 참, 이상하죠?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에는 쌍둥이 형제가 나와 서로 따귀를 때리는 장면이 나온다면서요? 제 기억이 맞는 건지. 세 권인 줄 몰랐는데 알고 마음을 접었었는데 다락방님의 추천이라니 꼭 읽어야 겠습니다.

마노아 2010-04-13 08: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이 너무 맛있어서 출력해서 읽었어요.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는데, 일단 눈과 코를 자극하는 글맛이 있네요. 제시하신 책들도 분명 그럴 것 같아요. 저 중에서 제가 읽은 책들은 그랬어요. 저도 다락방님처럼 등 떠밀어요. 마지막줄 책들 강추예요~

blanca 2010-04-13 17:10   좋아요 0 | URL
마노아님. 제 글을 출력해 주시다니 영광입니다.^^;; 마노아님과 다락방님 함께 등떠밀어 주시니 기꺼이 떠밀리겠습니다.

프레이야 2010-04-13 09: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문단 동감이에요.
김연수의 저 소설집, 읽다만 책이에요.
읽어야할 책들은 부지기수로 쌓여있구요.
좋은 하루 보내요, 블랑카님^^

blanca 2010-04-13 17:11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님, 이 글을 아침에 봤어야 좋은 하루를 보낼 수 있었을 텐데 거시기한 날씨 속에 아기가 길거리에서 떼도 한바탕 써주셔셔 아주 고단한 하루를 보냈답니다.--;; 저는 요즘 최대한 책을 천천히 사고 안 쌓아두려 분투중이랍니다. 잘 될지는 모르겠어요.

stillyours 2010-04-13 09: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엄청나게->와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은 내 인생의 책이라 감히 말할 수 있었던 책들!
표지만 보고도 두근거려요.
저도 다락방 님 뒤에서 같이 등 떠밀래요!

그리고 <엄청나게-> 읽고 나서 그의 아내 니콜 크라우스의 <사랑의 역사>도 읽으시기를 바란다는 !

다락방 2010-04-13 10:23   좋아요 0 | URL
[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도 좋아요! 이것도 등 떠밀어 주세요. ㅎㅎ [사랑의 역사]보다는 제게는 [오스카 와오~]가 더 좋았어요. 어쩌면 니콜 크라우스가 사프란 포어의 아내라서 질투와 시기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몰라요. ㅎㅎ

그리고요 blanca님, [군인은 축음기를 어떻게 수리하는가]도요! 많은분들이 [엄청나게~]보다 [군인은~]을 더 좋아하시더라구요. 물론 저는 그래도 여전히 꿋꿋이 [엄청나게~] 가 더 좋지만 말입니다.

stillyours 2010-04-13 11:07   좋아요 0 | URL
아, 나도 시기와 질투에 한표! <오스카 와오>도 좋았는데 결말에서 다소 손발이 오그라들었..다는..거ㅋ
그나저나 <군인은->도 읽어야지 했는데, 이 댓글에 등 떠밀렸어요ㅋ [훈훈한 등 떠밀기군요]

blanca 2010-04-13 17:13   좋아요 0 | URL
moon님 반갑습니다. 인생의 책이라니 이 이상 더 강력한 추천이 있을까요? 그런데 부부 소설가라니, 정말 질투가 솟구치네요--;; <군인은-> 책도 찾아 봐야 겠어요.^^

마녀고양이 2010-04-13 1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이네요.. 그런데 글을 보면서 실실 웃고 있는 제 자신을 발견했어요.
블랑카 님과 저랑 책 취향이 영 딴판인거 같아요,, 심리 쪽만 비슷하고.. ㅋㅋ
댓글다신 분들이 너무 좋은 책이라고 동의하시는데,, 전 평생 손이 안 갈거 같아요,, ^^
대체 소설 쪽은 고전이나 스릴러 추리 소설 빼고는 왜이리 손을 못 대겠는지,, 반성 중이랍니다. 흐흐.

blanca 2010-04-13 17:16   좋아요 0 | URL
소설을 한동안 안읽다 작년들어서인가부터 갑자기 이 쪽으로 너무 집중되서 그것도 균형을 위해서는 그렇게 좋지 않은 것 같은 생각이 들어 갈등했답니다. 취향이 다양한게 좋은 거지요. 제 여동생도 소설을 절대 읽지 않는답니다. 아무리 재미있다고 꼬셔도 그러는걸요.

JJini 2010-04-14 17:35   좋아요 0 | URL
저도 고등학교 때부터 20대초반까지는 소설을 읽지 않았었어요ㅎ그때는 소설은 너무 유치하다는 말도 안되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사람 사는 이야기라는 생각은 미쳐 못하고 말이에요~ㅋㅋ
시간이 지나니 자연히 손이가고 눈이 가더라구요.

2010-04-14 10: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4-14 12: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덕수맘 2010-04-14 1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의 글을 읽고있으니 저책들에 푸욱 빠져보고싶네요..어쩜이래도 제맘같은지...너무 급하게 독서를 해서인지 요즘은 언친듯 쉽게 책을 못잡고 있는 제게 활력소를 넣어주셨어요..헤헤 오늘부터 다시 독서님과 친해지고싶네요..울아들의 방해만 아니면..ㅋㅋ같이 읽는걸 좋아해서..전 늘 동화를 읽어야하는,,,ㅋㅋ그래서 제가 좋아하는 위주의 동화책을 산후 후회한적이 많았죠..ㅋㅋ덕수가 안읽더라구여..난 재미있는데 스타일이 좀 다른가봐여..ㅋㅋ

blanca 2010-04-14 12:39   좋아요 0 | URL
덕수맘님 반갑습니다. 저도 그렇게 산 책이 있어요. 호랑이 할머니 얘기인데 구름빵 작업한 작가가 한 거라고 해서 너무 신나게 사서 딸애 앞에 주었더니 울고불고 난리났더랍니다. 이 책 너무 예쁘고 좋은데 한 번도 제대로 읽히지도 못했답니다. 저도 딸내미랑 스타일이 다른가봐요.--;;

blanca 2010-04-14 2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leaf0309님 누구나 그런 시기가 있나 봅니다.^^;; 저는 거의 한 오년 동안 그러다가 김훈의 칼의 노래로 다시 소설을 읽기 시작했던 것 같아요.

2010-04-15 15: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4-15 21: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기억의집 2010-04-20 2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저는 이상하게 엄청나게 시끄럽고~~와 존재의 세가지 비밀 모두 별로였어요.
많은 리뷰어분들의 엄청난 호응에 저도 읽었는데 저는 그저 그랬어요. 제 감성이 별난건지 이해력이 떨어지는 것인지... 하핫!

가오리여사도 제 취향이 전혀 아니었다는.
그러고보면 취향이란 것을 무시 못 해요. 그쵸?
안 되겠다.^^ 오늘 블랑카님 글은 여기까지~~ 하늘같은 남편 와서 밥 차려야해요^^
낼 다시 올께요^^

blanca 2010-04-21 12:08   좋아요 0 | URL
저 지금 엄청나게~ 읽고 있는데 몰입이 안되네요--;; 아...요새 잡는 소설들은 제가 취향이 변한건지 대체로 자꾸 허술한 부분이 보여요. 당분간은 논픽션으로 가야 할 것 같습니다. 댓글 순서를 거꾸로 달고 있네요. 기억의집님 가장 먼저 단 댓글인데 가장 나중에 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