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의 죽음은 남는 자에게 미완의 과제를 남긴다. 누구나 더이상 존재하지 않기 위하여 스러져 가는 그 과정이 아름다울 수만은 없다. 그들이 가고 난 빈 자리, 기다렸다는 듯 밀려들어오는 함께 한 추억들의 뿌리는 남는 자들의 가슴에 어떻게든 생채기를 내고 자리잡는다. 가고 난 당사자 대신 그들의 삶을 복습하며 우리는 의도하지 않은 자학을 하게 된다. 그리고 조금 더 현명해진다면 우리는 삶의 유한성을 의식하며 산다는 것, 그리고 마침내 죽는다는 것, 그것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된다. 

 

상류층이며 지식인기도 했던 헬렌 니어링과 스콧 니어링의 삶에 대한 얘기는 자주 회자된다. 가진 것을 포기하고 버몬트 숲으로 들어가 의식주를 몸소 해결하며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았던(그들도 그렇게 주장하고 주변 사람들도 그렇게 증언하는) 그들의 삶은 많은 도시인들의 귀농 행렬의 기폭제가 되지 않았나 싶다. 헬렌과 스콧의 삶 그 전체를 긍정할 수는 없지만 분명 스콧 니어링의 자발적 죽음은 어떻게 죽는 것을 배우고 죽어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귀감으로 보인다. 죽음을 의식하고 그것에 집중한다는 것은 분명 삶에 기대어 숨쉬는 사람들에게 약간의 거부감을 동반할 수밖에 없다. 사람들은 죽음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고 그것을 중심 화제로 올리는 것을 두려워한다. 모든 문장의 주어였던 '내'가 사라진다는 것은 근원적인 울렁증을 동반한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눈을 질끈 감고 세속적인 것들로 돌아와 버린다.  

 

 그이는 마치 모든 것이 제대로 되어 있는지 시험하는 듯이 " 좋-아'"하며 숨을 쉬고 나서 갔다.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 중 

스콧 니어링은 백수를 누렸다. 정확히 백 살의 생일을 맞고 스스로 곡기를 서서히 줄여 나가며 죽음을 맞았다. 병이 걸려서도 사고가 나서도 아닌 스스로의 선택으로 그 옮겨감의 길목에 섰다. 헬렌은 그들이 죽음을 단순한 종말이 아닌 옮겨감에 대한 열린 체험으로 받아들였다고 얘기하고 있다. 존재의 소멸이 아니라 존재의 변환이라고 해야 할까. '나'의 부재라고 받아들였으면 그렇게나 평화로이 감당해 낼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한 그가  병환이나 사고를 피해가는 행운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대중문화의 퍼스트 레이디'라는 오명 대신 그녀를 나는 행동하는 여전사였다고 부르고 싶다. 수전 손택의 그 맑고 섬세한 감수성의 체에 걸러진 해석의 마력에 중독되면 그녀를 사랑하고 존경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녀가 스콧 니어링처럼 숲 속으로 들어가 물신 숭배에 온 몸으로 저항하지는 않았지만 미국의 음험한 제국주의를 용기있게 비난하고 사람들의 타인에 대한 의식있는 연대를 촉구했다는 점에서 그녀도 개별적 자아를 뛰어넘어 전체에 연대하는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있었다는 점에서 스콧 니어링과 공감대가 있다. 그러나 그녀의 최후는 그의 것처럼 평화롭지 못했다. 아들 데이비드 리프의 담담한 회고록을 읽어가다 보면 그녀가 삶을 너무 사랑해서 함정에 빠진 것이 아닌가, 하는 안타까움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녀가 백혈병으로 죽어가며 수많은 약물들로 그녀 자신이 얘기했듯 자신의 몸이 베트남 전쟁처럼 폐허가 되어가며 그 예리했던 감수성을 잃어가는 모습은 아들 리프를 수많은 갈등과 죄책감의 순간으로 인도한다. 스콧 니어링 부자가 그랬던 것처럼 이 모자도 완전히 화해한 다정다감한 모자는 아니었다. 특히나 어느 누구도 죽어가는 그 순간에 죽음이라는 단어를 내밀 수 없었다는 것이다. 외면하고 거부하고 때로는 투쟁하면서 고통스럽게 그러나 결국은 수긍하며 맞이하는 죽음은 황량했다. 아들은 어머니의 사후에도 끊임없이 자문한다. 무엇이 최선이었는지를. 그리고 고백한다. 지금 자신을 지배하는 감정은 죄책감이라고. 

삶 그 자체에 대한 취향을 감히 내세운다면 수전 손택 그녀의 쪽으로 가고 싶다. 예리한 촉수로 수많은 현상들을 적시에 잡아채어 나의 이름으로 요리하여 내어 놓아 박수받는 그 역동적이고 쾌할한 삶의 생동감. 하지만 죽어가는 그 과정에서의 그 마침표와 진정으로 화해하고 함께 천천히 걸어갔던 스콧 니어링의 모습은 나에게 어쩌면 죽음도 아름다울 수 있다는 가능성의 제시 같아 이끌리게 된다.  그러니 영원히 삶과 죽음은 화해할 수 없는 것일까. 스콧 니어링이 과연 현실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세속적 욕망을 충족시키는 삶을 살았더라도 그 같은 최후를 맞이할 수 있었을까.

<아름다운 삶, 사랑, 마무리>에 인용되었던 라즈니쉬의 연설처럼 탄생의 순간부터 죽음은 우리를 향한 출발을 시작한다. 우리는 살아가고 있지만 동시에 죽어가고 있다. 살아야 될 이유들을 수집하고 그 목록에 경도되는 것도 의미가 있지만 죽음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하나씩 가진 것을 나누어 주고 포기하며 몸을 비워가는 삶의 종착점에 편안하게 당도하는 것은 인간이 끝까지 아름다울 수 있다는 방증 같아 더없이 매혹적이다. 그러자면 무엇보다 건강과 주변을 관리하는 생활부터 출발해야 할 것 같다.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잃는다,는 사실과의 화해부터 시작해야 할 지도 모른다. 우리는 항상 모든 것을 가지려 한다. 포기는 미덕이 아니라 하나의 결과로서만 자리한다.

남는 자에게 간 자의 최후를 아름답게 기억하고 회한과 죄책감을 던져주지 않고 가는 것은 이러한 죽음에 대한 하나의 부록같다. 아름답게 죽고 싶다. 죽고 싶지 않지만. 아니 죽고 싶지 않다고 얘기하는 대신 정말 단 하나의 거짓도 없이 나는 아름다운 죽음을 준비하고 있다,라는 말을 언젠가는 꼭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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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10-02-25 0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잔 손택의 이야기를 언젠가 한 번 꼭 읽어보고 싶은데 말입니다.
스콧 니어링에 대한 생각은 나이가 들 수록 변해요. 뭐라고 정리하지는 못하겠지만, 어릴적에는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 지금은 절실하다고나 할까요.

blanca 2010-02-25 13:17   좋아요 0 | URL
저도 그래요. 너무 동감해요. 예전에 이 책 도전했다 실패했는데 지금은 잘 넘어가더라구요. 나이가 들어가니 달라지는 게 참 많은 것 같아요.

나무처럼 2010-02-25 0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콧의 화두가 화해였다면 수전은 싸움 아니었을까요? 그런 면에서 죽음에 임하는 태도가 수전답다는 생각도 해보게 되네요.

blanca 2010-02-25 13:18   좋아요 0 | URL
삶의 방식이 결국 죽음의 방식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 같습니다. 수전이 죽음까지 싸워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는 것 보면 나무처럼님 말씀이 맞는 것 같아요.

마녀고양이 2010-02-25 1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헬렌 니어링의 책 종이는 재생지를 써서 약간 두껍고 거칠했다는 기억을 우선합니다. 그들의 삶과 꼭 어울리는 갈색 표지와 종이였죠. <월든>이나 <아름다운 삶, 사랑, 마무리>, <타샤>할머니 책들을 읽으면서 내 손으로 하나하나 생필품을 만들어 쓰는 과정이 너무 멋지게 느껴졌습니다.

blanca 2010-02-25 13:19   좋아요 0 | URL
마녀고양이님 그래서 저 같은 사람은 그렇게 살고 싶어도 살 수가 없는 거랍니다.-..- 이런 책 읽으면서 생각하는 것은 우리 부부 같은 손으로 하는 것은 뭐든지 다 망쳐 버리는 사람은 삶의 방식도 바꿀 수 없겠다는 슬픈 생각이 들어요. 쿨럭-..-

마녀고양이 2010-02-25 13:47   좋아요 0 | URL
저두 시도하면 항상 2% 모자라요. 울 신랑은 더 심해서, 전기 공사, 못박기 그렇게 못 하는 남자는 처음 봤어요!! ㅠㅠㅠㅠ, 손재주 좋은 사람이 부러워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