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혹하는 글쓰기 - 스티븐 킹의 창작론
스티븐 킹 지음, 김진준 옮김 / 김영사 / 2002년 2월
평점 :
품절


로베르토 베니니 감독의 '인생은 아름다워'를 잊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유태인 수용소에서 아버지가 어린 아들에게 그 고통스러운 생활을 하나의 놀이로 제안하는 장면에서
우리는 처연한 아름다움을 느낀다.
삶의 고통의 격자 속 틈바구니에 유머를 불어넣는 것은 가볍고 경망스러운 것이 아니라 삶과 인간자체를
긍정하는 일이다. 

스티븐 킹은 소위 잘 팔리는 작가다. 잘 팔린다는 말만으로는 어쩌면 그의 상업적 성공의 폭을 온전하게 담아낼 수 없을 만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저리>,<쇼생크탈출>,<스탠 바이 미> 등 영화화되어 이중의 성공을 거둔 작품만도 상당하다.
이런 잘 팔리는 작가가 글쓰기에 관련한 책을 낸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자
지극히 상업적인 계산에서였을 공산이 크다는 단정은 아무리 사람들이 재미있다고 극찬을 해대도 거부감만 더해갔다.
그러다 갑자기 정말 욱해서 시작한 독서는 이 책이 단조롭고 그저그런 창작법 강론이 아니라 그의 미니자서전이고
오늘날 소설이 나아가야 할 길에 대한 진지한 성찰의 정찬에 인생 전체를 관조하고 때로는 그것에 대한 깨달음들이
묻혀 있는 작은 철학서이도 했다는 깨달음으로 잠시 숙연해졌다. 그러나 무엇보다 '뻥' 터지는 책이라는 데에
무조건 이 책을 읽어야 한다고 마구 강요하고 싶어진다. 



자, 그저 놀겠다는 일념으로 동생의 배설욕구를 존중해 주지 않았던 형 덕택에 덩굴옻나무로 밑을 닦아 녹말물에 6주를 좌욕해야 했고, 킹왕짱 전자석을 만들겠다고 의기충천한 형을 뒷받침해주다
건물전체 전기가 나가 경찰이 출동하고 자동차전용극장에 가 있다 "스티븐 킹, 부인이 진통중입니다!"라는 방송을
들어야 했던 사내의 이야기들 앞에 진지한 척 터지려는 웃음을 꾹꾹 누르지는 마시라. 그리고 '그게 전부다'라고 섣불리
단정짓지도 말고. 가출한 아버지 덕택에 청소 일을 해서 두 아들을 키워낸 엄마 밑에서도 유머와 익살을 소중한 보석처럼
그러안고 수많은 베스트셀러를 낳을 수 있었던 그의 얘기는 그 자체로 하나의 흥미진진한 소설이다. 장담한다.
'톰 오소여의 모험' 보다 더 재미있다.

어린 아들이 표절한(^^) 만화를 보고 직접 이야기를 만들어 보라고 독려하고 실제 만들어낸 이야기들을 자매들에게
돌려 읽게 한 엄마의 사려깊은 배려가 있었기에 오늘의 그가 있지 않았을까. 이 사랑스러운 개구쟁이 형제가 장성하여 어머니의 임종을 맞는 장면은 잊을 수가 없다. 이 대목에서는 스티븐 킹의 감정표현이 전혀 없다. 그저 그날의 정경과 그날의 행동을 담담하게 얘기하고 있을 뿐. 

어머니의 눈길이 데이브(형)와 나, 데이브와 나, 데이브와 나 사이를 오락가락했다. 72㎏이던 어머니의 체중이 40㎏으로 줄어 있었다. <중략> 우리는 번갈아가며 어머니께 담배를 물려드렸다.
"내 새끼들." 

이 대목. 아무 말도 덧붙이지 않고 싶다. 남편 없이 밑바닥 육체 노동으로 키워낸 아들들. 그리고 그 옆에서 맞이하는 죽음.
"내 새끼들." 어머니의 마지막 말이었다. 

한편 그의 성공가도에서 복병처럼 도사리고 있던 알콜과 마약 중독이 유유히 걸어나온다. 그 와중에도 우리의 스티븐 아저씨는 유머를 잃지 않는다. 알콜 중독자에게 술을 참으라고 하는 것은 설사병 걸린 사람에게 똥을 참으라는 얘기라고. 그가 인생에서 쫓겨난 것 같은 기분(이 잘 나가는 사람이 이런 느낌을) 속에서 걸어나오기까지의 작품들 속에는 술과 코카인에 대한 은유가 있었다고 고백한다. 우리가 무심코 흘려보낸 암시들 속에 그의 고통에 대한 상념이 절절히 배어 있었던 것이다. 

창작론 대목도 참 유쾌하고 재미있다. 인위적인 플롯의 도식과 주제를 향한 전진배치 대신 상황에서 흘러나오는 자연스러운 얘기의 선호는 당연하게 대중들의 호응을 끌어내었다. 특히나 부사,대명사,수동태를 혐오하는 장면은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한 번 귀기울여봄직하다. 평이하고 직설적인 표현을 강조하며 좋은 글을 쓰려면 근심과 허위의식을 벗어 던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얘기가 아닐런지. 지옥으로 가는 길은 부사로 덮여 있을 거라고 방방 뛰며 흥분하는 대목에서는 절로 웃게 된다. 갑자기 김훈의 <공무도하>에서 여주인공 노목희의 출판사에서 부사와 형용사의 용례사전을 간행한 대목이 떠올랐다. 그렇다면 그 출판사는 음. 

요즘 드는 생각이 한 가지 있는데 글을 잘 쓴다는 것. 특히나 소설가의 역량의 핵심은 그럴듯한 문장 수사술에 있는 것이 아니라 독자들에게 풍요로운 상상의 지도를 그려보이는 것에 있지 않나 싶다.  문장을 현란하게 포장하는 기술이야 연마가 가능하지만 그 문장 속에 진실의 핵이 박혀 있는 이야기를 불어넣는 작업은 직관에게 인도받지 않으면 힘든 일이다. 그런 생각의 연장선상에서 만난 스티븐 킹의 창작론은 반가웠지만 그래서 씁쓸하기도 했다. 결국 뛰어난 소설가는 태어나는 것이 아닐까. 

이 책 집필중에 당한 대형 교통사고가 말미를 장식한다. 이 책이 단순한 창작론으로 매듭을 짓지 않게 된 우연이기도 하다.
쾌감때문에 글을 쓴다는 그가 수많은 사람들에게 웃음을 준 그 노고를 금전적인 것 뿐만이 아니라 건강으로도 치하받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댓글(7)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매지 2010-02-01 18: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 책 안 그래도 보고 싶었는데, 더 보고 싶어지네요 :)

blanca 2010-02-01 22:49   좋아요 0 | URL
이매지님 저도 안볼라다가 슬쩍 본 책인데 대박입니다. 꼭 보세요~

라로 2010-02-02 1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그래서 스티븐 킹의 이 책만 읽고 그의 다른 책은 안 읽었어요~.^^;;;
사실 그의 책들이 제가 좋아하는 쟝르도 아니긴 하지만 말이지요,,,,,

blanca 2010-02-02 21:46   좋아요 0 | URL
nabee님 저도 이 책만 읽고 그의 소설은^^;; 제가 좋아하는 장르가 아닙니다. 이런 책 읽으면 왠지 그 작가의 다른 책들을 읽어줘야 할 것만 같은 부책감이 막 들어요--;;

순오기 2010-02-03 11:56   좋아요 0 | URL
나도 스티븐 킹은 유혹하는 글쓰기만 읽었지만, 우리 애들이 좋아해서 사주거나 도서관에서 빌려다 줬어요. 샤이닝은 아들녀석이 친구 빌려줬더니 미국으로 이민가면서 가져 가 버렸어요.ㅠㅠ

302moon 2010-02-02 2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004년에 구입하고 읽었던 기억이 새삼 떠오르는.
스티븐 킹의 소설보다는, 그의 창작론이 더 끌리더라고요. :)
애초에 소설을 읽으려 시도도 안 했지만/
친구가 좋아한다고 해서,
미저리는 언젠가 읽으려 계획했다가 아직도=_=

blanca 2010-02-02 23:54   좋아요 0 | URL
저를 비롯 이 책만 읽으신 분들이 많군요^^ 저도 시도도 안했고 솔직히ㅋㅋㅋ 계획도 없답니다. 미저리. 진짜 그 포스가 대단하죠. 그런데 또 원작은 안읽게 되네요. 다 비슷한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