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이에 한창 열을 올리다 의식적으로 안하기 시작했다. 외국에 사는 친구들과의 끈을 놓지 않기 위하여 안하다 하기를
반복하기도 했지만, 결국 열중할수록 더 외로워지고 더 불소통이 되는 것 같은 그 의외의 막막함이 너무 싫었다.
그리고 친구의 사생활을 안부를 궁금해하는 용도가 아닌 끈적끈적한 호기심으로 들여다 보게 되는 그 변질이 점점 역겨워졌다. 온라인으로 하는 소통이 그 시간적 간격을 두고 감정의 정리 및 포장이 이루어진 상태에서 뒤늦게 상대를 향한 것이 아닌,
어느새 내 자신에게 하는 것 같은 메아리가 되는 것 같은 한계에 부닥쳤을 때 나는 반문했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 열심히 칭찬의 댓글을 인사치례의 댓글을 주고 받았던 우리는, 과연 서로의 목소리와 서로의 눈동자를 의도적으로 무시한 것은 아닐까? 신기하게 싸이로 친밀감을 더해갔다고 생각하는 관계가 정작 전화선 너머에서는 심지어 얼굴을 사이에 둔 탁자 너머에서는 그렇게 데면데면할 수가 없다. 그리고 나는 자꾸 객관적인 척 중립적인 척 마치 온라인에서 우리의 관계는 재탄생한 듯 무덤덤하고 치기어린 조언을 남발해대고 있었다. 여기서 중지하지 않으면 관계가 아주 묘하게 꼬여 갈 것 같은 두려움에 담배 끊듯 힘겹게 싸이를 끊어가고 있다.
거의 10여 년을 활동하는 까페가 하나 있다. (여기서 활동은 가입후 글 열람 및 댓글 달기) 원래는 재테크 까페인데 하나의 작은 사회 같다. 익명에 기대어 물론 닉네임이 있지만 자신의 옆사람에도 털어놓지 못할 많은 얘기들을 털어놓고 서로 의논하고 조언해 주고 울어준다. 실제 글을 읽다 너무 감정이입이 되 펑펑 운 적도 있고, 정말 힘든 순간 울먹이며 올린 글들에 달린 댓글들을 읽으며 마음을 다독거리기도 했다. 나름대로 중차대한 결정을 내려야 했던 순간 익명 게시판에 올린 글들에 툭툭 달린 불친절한 댓글들이 되레 나의 결단을 만들기도 했다. 나의 취향에 맞는 글을 올리는 사람들의 일상을 마치 친구의 일상처럼 찬찬히 들여다 보며 주변 사람들한테 얘기까지 하고 있었다.
여기에서의 소통. 진정한 소통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나는 오히려 또다른 영역의 진일보한 소통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나의 치부를, 나의 고민을, 지인들에게는 때로는 자존심때문에 때로는 망설임때문에 털어놓을 수 없었던 그것들을 나를 모르기 때문에 적어도 관계 속에 투영되는 각종 끈적끈적한 선입견과 암시,조종 등을 피해 얘기할 수 있다. 물론 우리들은 눈도 마주치지지도 손도 잡을 수 없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 솔직할 수 있다. 더 대담해질 수 있다. 그 이상의 관계의 진전을 원하지 않기 때문에 기대도 실망도 없다. 때때로 악플이 달려도 그 사람은 나의 전체를 보고 판단한 것이 아니라, 내가 글의 몸체 속에 가두어 놓은 그 찰나의 상황들로 미루어 짐작한 것이기 때문에 썩 기분나쁘지 않다. 오히려 아는 친구가 내가 올린 사진에 묘한 늬앙스를 풍기를 댓글을 달아놓았을 때, 혹은 내가 아무 생각없이 달아놓은 댓글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친구의 모습을 보았을 때 서로가 아주 강도가 강한 당혹감에 휩싸인다.
그런데 이런 익명의 소통은 사람의 직접 대면에 대한 두려움과 관계맺기의 서투름때문에 더 조장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한다. 현실의 친구들을 덜 만날수록 나는 이 까페에서 더 오래도록 머물고 더 많은 댓글을 달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외로웠다. 내가 던진 말들은 한참이 지난 후에야 응답받을 수 있고 우리의 관계는 그 댓글의 주고받음으로 마침표를 찍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서로의 이성친구를 소개시키듯 자기의 글들을 만나게 하고 그리고 손털고 나와 버린다.
눈동자를 마주친 사람들을 익명의 관계로 재설정하는 것. 정이현 작가가 얘기했던 것처럼 친구가 여기에 갔었구나, 제를 만났구나를 그애의 목소리가 아닌 하나의 사진과 설명으로 알아야 할 때 느끼는 그 약간의 배신감과 서먹서먹함이 던져주는 아득함. 그건 소통이 아니다. 그렇다고 닉네임으로 나에게 표식을 지우고 둥둥 떠다니는 그 관계에서도 결국 남고마는 이 아쉬움은 또 어떻게 추스릴 것인가. 죽을 때까지 소통을 갈구하지만 결국 인간은 혼자서 중얼중얼하다 산화하고 마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