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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87
나쓰메 소세키 지음, 윤상인 옮김 / 민음사 / 2003년 9월
평점 :
한 남자가 친구의 아내를 사랑하는 얘기이다.
진부한 플롯이고 사건전개가 다이나믹한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그 서사의 빈곤함을 채우는 그것이 아주 기가 막히다.
대체 그것은 무엇일까. 아직도 솔직히 그것을 내 손안에 움켜쥘 수가 없다.
마지막 장을 덮고 나면 소설적 성취의 지향점에
이 작품이 돌올하게 서 있다. 미학의 완결이라고나 할까? 그런 완성도를 보이면 지루하기라도 해야 공평할텐데
또 기가 막히게 재미있다. 하늘의 별을 다 따다 주어도 이 소설의 평점으로 완벽하지 않다. 나에게는.
나쓰메 소세키의 작품은 두번째이다. 가장 유명하고 많이 읽힌 '나는 고양이로소이다'가 아닌, '도련님'으로
그와 첫대면을 했다. 워낙 삽화도 내용도 아기자기하고 귀염성 있어서 기대가 컸던 첫만남은 처음 나간 소개팅에서
폭탄을 맞은 기분이 들 정도로 실망스러웠다. 무엇보다 그 재미있기 쉬운 신참교사의 스토리가 더없이 지루했다.
그래서 수많은 책에서 인용되고 있는 이 작품도 그저 한 번 읽어 두어야 할 것 같은 부책감에서 시작하게 되었다.
표지가 작품의 분위기를 잘 응축했다. 우산을 들고 서 있는 여인의 뒷모습은 마치 주인공 다이스케가 사랑하는 미치요가
하염없이 그를 기다리는 그 정경이 연상된다. 절제된 우수가 차갑게 흐르는 일본소설의 그 본래적 분위기는 이 작품에서도
지배적이다. '설국'만 해도 소설 전체를 관류하는 그 차가움이 서걱거리지 않는가. 그런 차가운 관조성이 일본소설의 한계라고
지적하는 이들도 있지만 그것이 또 일본소설 특유의 분위기로서 매력의 한 요인인 것도 같다. 또한 그 단문들의 명료함이라니.
우리나라의 작가들이라면 한 문장으로 표현했을 그 서사나 묘사가 그들에게서는 적어도 두 세 문장으로 뚝뚝 끊겨져 나온다.
그 막간 호흡이 불친절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배려처럼 느껴져 읽기가 쉽다. 하이쿠의 영향인가.
심리적 부분, 특히 후각을 자극하는 그 묘사는 탁월하다. 다이스케가 은방울꽃을 수반에 담아 머리맡에 두고 그 향기로
선잠에 들어가는 몽환적인 대목과 그 수반의 물을 마셔버리는 미치요가 향기가 난다고 얘기하는 부분, 다이스케가 미치요에게
사랑을 고백하며 백합향기 속에 세상에서 격리되어 갇혀 버리는 대목은 환상적이다. 작가도 독자가 이 장면 둘을 기억해
주기를 바랐을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그 어떤 지리멸렬한 묘사나 서술보다 그 두 등장인물들의 감정교류의 본질에
이 향기들이 가장 근접했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세속에 뛰어들어 생계를 주도적으로 끌어나가지 못하는 고등유민인
다이스케가 그저 물이 흐르는 것처럼 생활과 남자들에 순응하다 사랑을 자각하고 깨어난 미치요와 손을 맞잡는 것은
지극히 비현실적이면서도 그렇기 때문에 아름다우니. 그 깨어질 것 같은, 부서질 것 같은 투명한 아름다움은
은방울꽃과 백합꽃 향기와 닮아 있다.
한 편의 시를 읽은 것도 같고, 그림을 본 것도 같고, 아무튼 활자의 집합체 속에서 들어갔다 나온 것 같지 않은 느낌이다.
아주 묘한 환상미가 있는 작품이다. 둔감한 코끝에 백합향기가 매달리는 듯한 착각에 잠시 소름이 끼치기까지 했다.
열린 결말의 허무함이 제목과 연결되어 있으며, 작품의 전반적인 분위기 그 자체이다.
너무 많은 이야기들을 기대한다면 실망할 수도 있지만 마음을 비우고 싶다면
저어하지 않고 바로 뚜벅뚜벅 걸어들어갈 만한 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