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 같던 중학교 친구가 집에서 아주 멀리, 멀리 기대하지 않았던 고등학교에 배정되어 멘붕에 빠진 나를 다독이며 선물을 줬다. 나의 적응을 도와줄 친구를 연결해 준 거였다. 아주 이쁜 친구야. 나는 역시 우리 동네에서 뜬금 없이 아주 먼 동네에 함께 던져진 다른 친구와 함께 그 백설공주를 닮은 친구에게 다가갔다. 우리는 삼총사가 됐다. 그리고 한 명을 더 만났다. 사인방이 됐다. 우리는 이십대에도 심지어 삼십 대에도 그 인연을 이어갔다. 첫애를 낳고 방금 내 몸에 벌어진 사건으로 멘붕에 빠진 나를 제일 먼저 찾아준 것도 그 친구들이었다. 
















박상영 작가의 에세이를 읽으며 그 친구들과의 시절을 떠올리게 됐다. 내가 왜 이 작가를 좋아할까 생각해 보니 여러 면에서 서로 닮은 점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등학교 시절, 대학교 시절, 그 시절에 내가 가졌던 생각들까지. 교집합이 많아서 뜨끔했다. 다른 점이라면, 박상영 작가는 자신의 꿈을 이뤘고 그 우정도 잘 지켜냈다는 점. 난 두 가지 다 하지 못했다. 슬프게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절 내가 친구들에게 받은 사랑, 지지는 여전히 지금 나의 일부를 이루고 있다. 어떤 것은 사라져도 없어지지 않는다. 오해로, 다툼으로 멀어진 친구, 지구편 반대끝으로 가버린 친구, 이제는 바빠서 어쩌다 한번씩밖에 얼굴을 볼 수 없는 친구. 모두 다 하찮은 자기변명이자 구실이 되겠지만, 그래도. 우리의 해산은 그런 식으로 설명될 수밖에.


그런 날들이 있었다.

이제는 그 맥도날드도 사라지고 없다.

-<순도 100퍼센트의 휴식> 박상영


가파도 레지던시에서 공동생활을 한 김연수 작가와의 에피소드는 마치 눈앞에 그려지는 것처럼 생생해서 서정적인 단편 한 편을 읽는 느낌이었다. 박상영 작가는 언어를 감각적으로 그려내는 데에 탁월한 재능이 있다. 언어로 사람을 불러낸다. 정말이다!이를테면 이런 묘사. 김연수 작가의 조용조용한 목소리가 귓전에서 들린다.


내가 심드렁한 목소리로 답했다.

"왠지 가짜로 만들어놓은 것 같아. 관광객들 보라고."

김연수 작가님께서는 꿈결 같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씀하셨다.

"상영이는 의심이 많구나(음량1). 사람에 대한 신뢰가 없어(음량0.5)......"

-<순도 100퍼센트의 휴식> 박상영


무려 한 세대를 넘는 나이 차가 전복된 순간이다. 세상에 대한 냉소는 어린 상영 작가가, 그럼에도 긍정은 연수님이. 다 같이 밥을 나누어 먹자고 한 솥 가득 밥을 하는 김연수 작가, 또래 친구와 더 재미있게 가벼운 몸으로 놀라고 상영 작가의 짐까지 들고 먼저 사라지는 김연수 작가. 


그 정경이 눈앞에 그려지는데 왜 이리 웃음이 나오는지 모르겠다. 그건 나의 한때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나는 젊을 때 더 냉소적이었고 그게 제법 쿨한 건줄 알았다. 그런 나를 다독이고 세상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주문한 건 의외로 나보다 훨씬 연배가 높은 선배님들이나 기성 세대였다. 내가 나이 들어보니 그런 따뜻함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지하는 건 정말 대단한 일이다. 

















회사 다닐 때 나는 숱하게 난을 죽였다. 나는 나의 소임을 다하지 못했다. 집에서 식물을 키우게 된 이후로도 상황은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그 쉽다는 고무나무, 심지어 산세베리아도 내 손에서는 묘하게 말라 비틀어지거나 잎을 축 늘어뜨렸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나는 또 새로운 나무를 들였다. 4년째 잘 크고 있는 아레카 야자도 사실 그리 잘 크고 있다고는 하지 못하겠다. 이상하게 한쪽으로 쏠리는 비대칭의 모습, 아무도 우리 집,내 눈에만 잘 크고 있는 나무에 대해 칭찬하지 않는다. 그 옆에 난이도 중이라는 바나나크로톤은 묘하다. 나는 절대 난이도 중급 이상의 식물을 키우지 못하는데, 다행스럽게도 죽을 듯 죽을 듯하며 죽지 않고 살아가고 있다. 이 역시 예쁘게 잘 크지는 않는다. 멀리서 보면 살아 있는 게 분명한데 가까이에서 들여다보면 좀 헷갈린다. 잎사귀가 적고 줄기 부분은 말라 있다. 죽어가는 중인가? 싶은게 1년이다.


김금희 작가는 이런 나와 대척점에 있다. 사실 뭘 키워도 잘 키우는 사람의 식물 이야기가 나에게 어떤 감동을 줄까 싶었지만 역시 좋은 이야기를 많이 쓰는 작가의 사물, 생물에 대한 관찰은 삶과 일상에 대한 깊은 관조적 시선과 맞닿아 공명한다. 식물에 대한 이야기는 나와 비슷한 나이가 주는 공감대에서 내가 미처 정리하지 못한 감정들에 대한 언어적 서사를 부여한다. 맞아, 이런 거였구나, 싶은 대목이 너무 많아서 뭉클했다. 내가 용서할 수 없었던 내 자신에 대한 이야기. 이제는 그만 놓아줘야 하는 내가 내 자신을 너무나 가혹하게 다뤘던 한 시절에 대한 정리. 열심히 한다고는 했는데 그 열심이 더 나의 평안을 훼방했던 고였던 시절에 대한 갈무리. 


나는 다시 한번 아무도 이쁘다 해주지 않는 나의 식물 둘을 바라본다. 주광성을 고집하며 끈질기게 휘어가는 그들의 가지의 생명력을 본다. 


그런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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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3-08-13 13: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글 읽다가 아 맞다 하면서 저의 화분들에 물주고 왔어요. ^^ 이번에 여행갔다오니까 몇녀석이 말라서 다 죽어가고 있더라는....ㅠ.ㅠ 박상영작가의 에세이는 여행에 대해서 저와 완전히 다르게 느끼는것 같아서 오히려 관심이 가네요. 한번 읽어봐야겠어요.
나 자신을 너무 가혹하게 대하던 시절이 사실 우리 대부분은 가지고 있지 않나요? 중요한건 거기서 빨리 벗어나야 한다는거같아요. 오늘도 나를 사랑하고 나의 게으름을 사랑하기 위해 부단히 또 노력중인 이 아이러니.... ^^

blanca 2023-08-13 20:14   좋아요 1 | URL
여행 갈 때 식물 물 주는 일이 문제죠. 저는 그런데 대부분 과습으로 식물들을 죽였던 것 같아요. 요새는 좀 게으르게 했더니 더 잘 자라는 것도 같아요. 저 같은 경우 어떤 시절은 나이가 들수록 더 잊혀졌던 기억들이 떠오르기도 하는 것 같아요. 잘 갈무리 해야 할 것 같아요.

자목련 2023-08-16 16: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박상영 작가의 에세이가 궁금하지 않았는데, 김연수 작가의 등장하는 그 부분은 무척 궁금합니다. ㅎㅎ
식물은 식물이 주는 기쁨만큼 사랑을 주지 못하고 있어요, 저도...

blanca 2023-08-16 16:33   좋아요 0 | URL
자목련님, 이 에세이에서 김연수 작가 분량이 꽤 많아요. 그 묘사가 너무 좋아 하나의 단편 같고요. 우리가 생각한 딱 바로 그 캐릭터 대로 움직입니다. 다정하고 재미있는 사람이요. 박상영 작가가 김연수 작가와 세대를 넘어서 정말 좋아하고 교감한다는 느낌이고요. 진담인지는 모르겠지만 김연수 작가 모델로 소설도 쓸 생각이라 하더라고요. 여튼 둘의 묘한 어우러짐이 정말 좋아서 계속 얘기해줬으면 싶겠다 싶을 정도였고요. 박상영 작가 친구들이 김연수 작가 팬이 많더라고요. 이 부분 얘기도 재미있어요. 여튼 두 작가 다 너무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