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의도하지 않았는데 어떤 책을 읽으며 다음 읽을 책을 바로 발견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그 책이 기대 이상으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는 경우. 독서도 만남처럼 운명이라는 생각이 들게 된다.
저자와 비슷한 연배로 대학교 시절 들은 강의를 기반으로 한 공부의 의미와 위로에 천착한 책은 수많은 그 시절들의 추억을 소환했다. 쓰는 일에 대해 고민하게 만든 <교양국어>, 이제는 이 세상에 없는 친구를 꼬셔 함께 들은 <여성 심리학>, 새로운 언어는 세계의 확장이라는 깨달음을 준 <교양 스페인어>...그러나 그 무엇보다 이 책은 주인공이 고고학자인 강석경의 <내 안의 깊은 계단>으로 나를 이끈 책이라는 데 큰 의미가 있다.
저자 곽아람은 여러 번 이 소설을 인용한다. 그 인용 대목이 인상적이고 주인공의 직업에 관심이 가서 구입하게 된 책은 마치 과거에서 온 책 그대로인 것처럼 99년의 색깔, 판형, 활자, 가격을 지니고 있다. 어떻게 이 책이 아직도 남아 이렇게 오롯이 독자의 품에 안긴 걸까.
층층이 쌓인 삶의 각질과 죽음, 시간이라는 보이지 않는 강물 속에 인류가 그렇게 흘러가고 있다. 오늘도 주검을 거두며 시간의 강은 살쪄가는 것이다.
-pp.10
고고학자인 강주는 학생들을 이끌고 경주의 유적 발굴을 담당하고 있다. 그의 연인 바이올리니스트 이진, 사촌으로 연극을 하는 강희, 사서 소정이 서로 교차하며 만들어나가는 이야기는 작가의 치밀한 자료 조사와 탐사, 인간과 삶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깨달음이 한데 어우러져 깊이가 있고 탄탄하여 감동과 여운이 길다. 특히 고고학에 대한 이야기는 현장에서 직접 함께 오랜 시간을 가로질러 유물을 발굴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줄 정도로 생생하고 디테일이 살아 있다.
시대적 배경의 한계로 인한 남성, 여성의 묘사는 때로 거칠고 아쉬운 대목들이 있다. 그러나 소정이 자신을 억압하는 가정을 박차고 나가 자신의 사랑과 행복을 찾는 구도는 작가가 그 시대 안에서 고민한 여성주의의 흔적을 만날 수 있어 반갑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강주, 강희, 이진이 아닌 소정이 아닌가 싶다.
업의 비늘이 떨어져나가 우주의 바람에 묻어가는 듯했고 소정은 깃털처럼 가벼워진 몸을 눈앞에 펼쳐 있는 구름 이불 위에 던지고 싶었다.
-pp.308
천년의 고도 경주를 배경으로 한 네 남녀의 얽히고 설킨 사랑, 이별의 교차로에서 삶의 비의를 건져올린 작가의 저력과 아름다운 문장들을 두고두고 기억하고 싶다. 이 삶의 "고통의 낭비"과 되지 않도록 "내 안의 깊은 계단"을 딛고 내려가 본질을 찾아봐야 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