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들며 과거의 삶과 추억이 이따금 객관화되는 지점을 발견한다. 어린 시절의 내 모습을 마치 타인이 지켜보듯 연상해 내게 되는 경험은 뜻밖으로 나쁘지 않다. 그때는 그렇게나 이해할 수 없었던 주변의 어른들의 시간을 통과하며 내 속의 어린 나는 다시 나에게 일어났던 일들을 재해석하게 된다. 그 해석은 특별하거나 나 중심적인 것이 아니고 오히려 보편에 가깝게 다른 사람들과 닮아간다. 나는 특별하지 않았고 특별하지 않아도 괜찮고 특별하지 않은 종결을 맺게 되기를 바란다. 지구는 절대로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한 사실과 화해해야 한다. 그래야 내가 나를 잃는 그 최종적 과정에 덜 두려워하며 다가갈 수 있다. 어쩌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나'와 점진적으로 잘 헤어질 수 있는 순간이 차곡차곡 쌓이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아니 에르노의 인터뷰를 읽으며 그녀의 그 적나라했던 사적 고백들이 가지는 공적 의미를 깨닫게 됐다. 그녀의 이야기들은 과감하게 솔직했다. 소녀 시절의 불법낙태 경험, 유부남과의 밀회, 노동자 계급 부모에 대한 양가 감정. 그러나 그녀 자신도 자신의 이야기들이 사적인 영역에만 머물지 않기를 바란 데에서 자신이 점유했거나 점유한 장소에서 경험한 사실들을 있는 그대로 공적 공간에 내어 놓았다. 우리의 고백들이 의미 있는 글이 되기 위해서는 아니 에르노에게 배워야 할 것이 많다는 생각이 든다. 자신의 경험을 과장하지 않기, 과하게 미화하거나 변명하거나 각색하지 않기, 그것을 통과하고 남은 현재의 자신을 긍정하기.
이 책은 아니 에르노가 어린 시절을 보낸 장소인 이브토와 루앙 그리고 인터뷰 당시 거주지 세르지아에서 다큐멘터리 감독 미셀 포르트와 '장소'를 중심으로 그녀의 인생과 글에 대해 인터뷰한 내용이다.
저는 제가 겪었던 일을 다른 사람들 역시 겪었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어요. 독서를 통해 그런 생각을 하게 됐죠. 문학에서 저를 위한 무언가를 찾아냈으니까요. 프루스트에게서. 조르주 페렉에게서. 우리 스스로에게 무의식이 <<나도 그래>>라고 말하게 하는 것들이요. 그러면 자신 안에 빛이 생기죠. 그것이 프루스트가 말하는 <<빛을 얻은 삶>>이고요.
-아니 에르노 <진정한 장소>
"나도 그래"를 통해 빛을 얻는 삶이 바로 문학을 통한 준구원의 과정인 읽기에 관한 이야기일 것이다. 누군가의 특수한 경험에서 보편적 공감의 지대를 찾아내는 일은 채굴 같은 환희를 느끼게 한다. 그것은 그녀가 말미에 인용한 프루스트의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것을 단념할 때만 그것을 다시 만들 수 있다>>는 말을 통한 "나도 그래"의 지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