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로 격리를 마치고 나오니 벌써 벚꽃이 피어 있었다. 요 근래부터 봄꽃을 보면 마음이 좀 이상해진다. 싱숭생숭한 것과는 다른데 뭔가 마냥 이뻐할 수는 없고 좀 서글퍼진다.  그 기저에는 내가 저 꽃을 볼 수 있는 시간이 무한한 것이 아니라는 실감이 깔려 있는 것 같다. 사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나의 유한성을 머리로만 알았지 실감하지 못했었다. 이젠 주변의 죽음들을 목격하고 나도 이제 생의 반을 넘어가고 있다는 자각과 더불어 너무 아름답거나 예쁜 것을 보면 마음 한 곳이 허전해 온다. 

이 마음을 남편에게 얘기하고 싶은데 잘 표현이 안 됐다. 벌써 벚꽃이 폈는데 슬펐다고 할 수도 없고, 너무 예쁜데 그게 다가 아니다라고 말할 수도 없고. 그런데 역시 시인은 달랐다. 나의 이런 마음을 알아채기라도 한듯 절묘하게 표현한 시.


벚꽃


올해도 살아서

벚꽃을 보고 있습니다

사람은 한평생

몇 번이나 벚꽃을 볼까요

철들 무렵이 열 살이라고 한다면

아무리 많아도 칠십 번은 볼까

서른 번 마흔 번 보는 사람도 많겠지

너무 적네

-중략-

이바라기 노리코 <처음 가는 마을> 

















그래, 이런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던 거다. 일본의 시인 이바라기 노리코의 시집에는 내 마음을 들킨 것 같은 시들이 이외에도 많다. 그녀는 그저 아름다운 시를 쓰는 일본의 서정 시인이 아니다. 자신의 조국인 일본이 일으킨 전쟁에 진심으로 가슴 아파했고 남편과 사별 후에는 몸소 한글을 배워서 윤동주의 시를  번역하여 일본의 교과서에 싣는데 일조한다. 시인의 삶과 시가 일치하기를 바라는 것은 때로 순진한 생각으로 폄하되지만 이처럼 자신의 염결성을 삶으로 체현한 시인의 시는 더 진솔하게 다가오는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다. 


전설


청춘이 아름답다는 것은

전설이다

<중략>

-이바라기 노리코


"청춘이 아름답다는 것은 전설이다" 우리 모두는 그 전설을 계승하지만 그게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그럼에도 꾸역꾸역 또 그 환상을 덧댄다. 뒤돌아 보면 허구라는 것을 알지만 그럼에도 그 전설을 계승한다. 이 시로 시작한 시인의 시들은 어느 하나 절창이 아닌 것이 없다. 한 생애를 구술한 것 같은 느낌. 사랑했던 남편과의 사별로 끝맺는 시는 하나의 일대기 같다. 청춘으로부터 시작하여 반려자와의 이별로 끝을 맺는 시집은 그 자체로 하나의 생이다. 그러나 시인의 삶은 그 이후로 더 이어졌다. 자신의 나라가 침략했던 나라의 글을 배우고 자신과 동시대를 살았던 그러나 자신보다 한참이나 먼저 자신의 나라가 가둔 곳에서 생을 마친 "순결을 동결시킨 듯한 당신의 눈동자"의 시를 번역한다. 


윤동주의 시다.  윤동주는 자신의 시가 자신을 죽인 그 나라의 시인의 언어로 재탄생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시인의 그 삶 자체가 하나의 감동의 텍스트로 다가온다. 


나는 이제야 비로소 벚꽃을 보고 내가 왜 마냥 기뻐할 수 없었는지 표현할 수 있는 언어를 찾았다. 그것이 이 시인의 언어여서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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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2-03-23 23: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흉내낼 수 없는 blanca님의 글..이 느낌^^좋다고밖에 저는 언어가 짧아서^^;;


마음을 콕 집어 표현해낸 글을 발견하거나 기억해냈을 때, 보호받는 느낌 받을 것 같아요.

blanca 2022-03-24 09:46   좋아요 1 | URL
시집으로 참 오랜만에 감명 받았어요. 언어로 표현해낼 수 있을 때 바로, 이거다! 라는 느낌 참 좋죠.

stella.K 2022-03-24 11: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렇게 숫자를 세게 만드는 게 있죠. 저는 언제부턴가 울엄마가 하는 김장과 만두와 김밥과 호박죽을 몇번이나 더 먹을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해요. 몇년 전까지만 해도 안하냐고 묻기도 했는데 지금은 눈치만 보거나 아예 힘드니까 사 먹자고 해도 씽긋도 안 해요. 앞으로 몇번은 더 먹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blanca 2022-03-24 13:24   좋아요 1 | URL
스텔라님 댓글에 ˝울엄마˝라는 표현이 너무 좋네요. 저도 비슷한 감정을 느낍니다. 내가 지금 보고 듣고 만지는 것들도 유한하다고 생각하면 뭐라 말하기 힘든 감정이 밀려와요.

잉크냄새 2022-03-24 14: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 사람도 떠났구나‘ 하고 한순간, 단지 한순간을 기억해주시기만 하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장례.영결식을 하지 말 것을 당부하며 시인 사후 지인들에게 직접 배달된 미리 써둔 편지의 한 구절입니다. 왠지 시랑 묘하게 이어지는 느낌이라 적어봅니다.

blanca 2022-03-24 20:51   좋아요 0 | URL
아....그랬군요. 자기 최후를 그렇게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이라니 숙연해집니다.

2022-03-24 20: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3-24 20:55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