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욱 소설가의 작품을 읽어본 적이 없어서 사실 별 기대가 없었는데 인터뷰가 너무 좋아 두고두고 기억에 남았다. 그가 신세대 소설가로 언론의 관심을 받았던 시기를 기억하고 있던 터라 벌써 지천명의 나이에 접어들었다는 데 놀라고 그러한 흐름에 뭔가 아주 예민하지만 더불어 담담하게 젖어들어가는 자세에 대한 이야기가 그러한 나이들을 앞에 두고 있는 나로서도 참 와닿았다. 나이 드는 일을 예습하는 것이야 어불성설이겠지만 작가의 정제된 언어로 하는 이야기가 어떤 고갱이를 잘 포착해서 표현한 것 같아 두고두고 기억해 두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이야기.


우리가 자연을 비정하다고 생각하는데 자연이 하는 일에는 선악이 없잖아요. 인간적인 관점이지요. 압도적인 힘으로 문명을 위협할 때, 우리 자신이 조그마한 존재에 불과하다는 진실을 일깨울 때 우리는 자연을 악으로 묘사하게 돼요. 그런데 자연에게는 그런 의도 자체가 없죠. 영원불멸한 순환, 그 거대하고 무정한 사이클 위의 한 점으로 자기 자신을 느끼는 건 굉장히 슬프고 고통스러운 일이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사회적 존재로서 효능이 다하고 밀려나는 신세가 되더라도 자신의 존엄을 끝까지 지킬 수 있다고. 그렇기에 더더욱 존엄을 지켜야 한다고 말해주는 것일 거에요. 그리고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게 문학이 아닌가 생각해요.

-Axt 036 김경욱 인터뷰 중















시간의 무정함은 내가 절대적이라고 생각했던 모든 것들을 해체시킨다. 나는 설사 주변부에 있었을지라도 거기에서 더 주변부로 밀려난다. 이 흐름을 거스를 수 없다. 그럼에도 자신의 존엄을 포기하지 않게 하는 힘으로써 문학을 이야기하는 그의 이야기가 감동적이었다. 스스로가 이미 주류가 아니게 되었다는 것을 자신의 입으로 말하면서도 자신의 일이 가지는 의미, 자신이 추구하는 것의 가치를 믿는 사람의 모습이 거인 같았다. 대단한 그 무엇이 되지 않아도 그 어떤 숙명적 흐름 속에 자신을 내맡기면서도 내가 지향하는 그 무엇을 바라보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 것. 살면 살수록 그것이야말로 진짜임을 실감한다. 














이 책의 저자 함성호는 건축가이자 시인이다. 그의 내면을 통과한 풍경들에 대한 이야기는 그가 사랑하는 시들, 그의 추억들과 교차하여 잔잔하고 은은한 풍경화를 이룬다. 마포, 왕십리, 종각, 압구정, 대학로, 삼청동, 신촌, 홍대, 필동 등 무심코 지나쳤던 지명들의 연원과 역사가 다채롭다. 특히 개발이라는 미명하에 우리의 땅에 가해진 횡포의 뒤안길로 사라진 숱한 서사들에 대한 복원이 인상적이었다. 청계천이 옥계라 불리던 시절을 뒤로 하고 뚜껑을 덮어 인공으로 수돗물을 흐르게 하고 있다는 사실도 몰랐던 이야기다. 종로에서 저자의 매형을 기다리다 꼬박 열두 시간을 오가는 사람들을 바라봤던 이야기도 일제시대의 적산가옥을 허물고 새집을 지어달라고 의뢰했던 노인에 대한 기억도 그 자체로 아름다운 단편 같다. 영추문 옆 사무실에서의 꿈들을 포기하고 나와야 했던 아픈 사연의 마감은 마음을 서늘하게 한다. "그래, 여기서 살았던 적이 있었지."라는 그의 이야기는 김경욱의 "자기 인생의 벨 에포크에 머물고 싶은 욕망"과도 만난다. 누구나에게 그런 곳이 있다. 내 인생의 벨 에포크는 언제였을까. 


언제나 열네 살일 것 같다. 읽었던 모든 활자가 실시간 영상처럼 떠오르던 시간들. 듣는 모든 음악이 콘서트장 현장에서처럼 생생하게 울리던 날들. 너와 나누는 모든 대화가 웃기고 슬프고 재미있고 무서웠던 시간들. 내가 어쩔 수 없는 것은 많지 않았지만 언제든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믿어졌던 시간대를 통과해 온 것은 축복이다. 그 시간은 통과하며 사라졌다. 그것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래, 그랬던 적이 있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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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1-05-20 20: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김경욱은 장강명이나 김영하에 가려 잘 안 알려진 작가는 아닌가 싶어요.
우리나라 유수한 문학상도 받았는데.
저도 몇년 전 우연한 기회 읽고 글 정말 잘 쓰는구나 해서 저의 졸저에도 실었는데.ㅋㅋ
그래서 저도 조만간 악스트 사 볼까 생각중입니다.
덕분에 빛을 좀 받지 않을까 기대하게도 됩니다.

blanca 2021-05-21 13:05   좋아요 1 | URL
아, 그랬군요. 저는 아마 단편은 읽은 적도 있는 것 같은데 기억에 없더라고요. 시대의 각광을 받으며 등장했다 서서히 퇴장한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잠시 상상할 수 있는 시간이었어요. 학생을 통해 배운다는 게 참 인상적이었어요.

syo 2021-05-20 20: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김영하 김연수 선생님들보다 김경욱 선생님 작품을 먼저 접했었는데요, 당시 단편집 표지 사진 속에 어마어마한 꽃미남으로 한껏 당당했던 선생님이 떠오릅니다

blanca 2021-05-21 13:06   좋아요 0 | URL
아, 소요님은 아시는군요. 저는 이미지로만 기억하고 있었고 작품은 사실 기억이 잘 안 나서... 주목을 받았던 것만 기억이 나요. 인터뷰 얘기 하나하나가 명문장 같더라고요. 글을 쓰는 사람은 모든 언어들이 내면에서 정제되어 나오는 건지...놀라웠어요.

transient-guest 2021-05-27 00: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20대까지 읽은 책들은 지금도 머릿속에 장면이 선명하게 남아 있는데 30대부터는 읽고 돌아서면 다 잊는 경우가 많네요.ㅎ
제가 아는 제 고향의 한국모습은 이제 거의 없어졌습니다. 도시에 가보면 산이 안 보일 정도로 빽빽하게 높은 빌딩으로 가득하고 그나마 워낙 개발이 빗겨간 몇 군데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나이를 먹으면서 추억속에 젖는 시간이 점점 늘어나는 것 같습니다.

blanca 2021-05-27 13:57   좋아요 1 | URL
그런데 사실 반 정도 산 건데 벌써 저도 자꾸 과거 얘기를 하게 돼서... 노인들 마음이 조금이나마 이해가 가요. 현실과 미래에도 시선을 좀 던져야 하는데...자꾸 학창 시절도 떠오르고요. 잘 나이들고 늙어간다는 게 정말 어려운 일이라는 걸 실감합니다. 변화의 속도가 최근들어 더 빨라지고 있죠. 아직은 그래도 발 맞추려는 노력은 포기하지 않는 걸로 하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