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런 글이면 나도 쓰겠다.'와 대척점에 '나는 죽어도 깨어나도 이런 글은 도저히 못 쓴다.'는 마음이 드는 책이 있다. 그저 작가의 이름값에 기대어 쥐어짠 듯한 에세이나 사소설을 대할 때가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쓰는 그 자세는 칭찬할 만하지만 그럴 때 쓰고 읽는 일에 대한 회의감이 든다. 작가라는 타이틀은 때로 족쇄가 된다. 작가였다 갑자기 작가가 아닌 존재로 전락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은 함정이 되기도 한다. 이후 그냥 써도 그는 책을 출판할 수 있다. 금방 입에 회자된다. 꼭 대단한 것이 아니어도 일정 부분 판매가 담보된다. 이것은 누군가를 어떤 작품을 비판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여전히 읽는 행위의 환희와 쓰는 일에 대한 경탄을 자아내는 그에 대한 상찬을 하기 위한 도입이다.




하루키를 좋아한다. 물론 그의 작품 전부를 읽지는 않았고 그의 여성에 대한 묘사에는 반박하고 싶은 대목이 있다. 아직 성숙하지 않은 소년적 판타지의 반복에 때로 거부감이 든다. 하지만 번역의 창을 뚫고 나온 그의 그 간명하고 진솔한 문장은 누구라도 흉내는 낼 수 있어도 전적으로 복제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의 문장은 탁월하다. 복잡하지도 어렵지도 않으며 급소를 가격한다. 끊임없는 자기 검열의 늪에 빠져 주변부만 맴도는 가식이 없는 것도 좋다. 


<고양이를 버리다>를 처음에 받아보고 솔직히 놀랐다. 책값에 비해 너무 얇은 분량 때문이다. 이건 흡사 어떤 한 책의 몇 챕터 정도를 발췌한 수준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누가 들으면 웃을지도 모르지만 하루키와 돈에 대해 혼자만의 억측으로 고민했다. 하루키가 이런 걸 요구한 걸까? 대체 이 책값은 어떻게 책정된 걸까. 한국 독자가 호구인가 싶었는데 유독 우리 나라에서만 이 책이 비싸게 팔리는 것도 아니라 그건 또 아닌 것 같았다. 한 마디로 이 책을 읽기도 전에 이 책을 욕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아무리 하루키를 좋아하더라도 책값을 아껴야 하는 나에게 이 책의 분량은 실망을 줬다. 그래서 빨리 읽어버리고 중고서점에 팔려고 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줄을 너무 많이 그어버려서. 그리고 간직하고 싶은 문장들이 너무 많아서. 또 하루키가 이 작은 책을 쓰기 위해 기울인 노력이 어떤 것이었는지 절로 수긍이 가서 책값도 받아들이기로 했다. 


유년시절에 아버지와 함께 어느 여름날 오후 해변가에 암고양이를 버리러 가는 것에 대한 회상으로 시작한다. 그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는 이 에피소드에서부터 확장된다. 그러나 하루키가  처음부터 고양이를 버리는 가혹한 처사로 아버지에 대한 선입견을 만드려는 것은 아니었다. 어떤 연유에서건 집으로 돌아와 버린 그 고양이를 발견하고 안도하는 그의 모습에 하루키의 아버지에 대한 인상은 닿아 있다. 그의 아버지는 전쟁에 무려 세 번이나 징집된다. 아슬아슬하게 난징 함락전의 가해자가 되었을 수도 있었다. 하루키는 실제 그런 일이 벌어졌을까봐 우려하며 아버지의 과거의 실상을 아는 것에 부담을 느낀 모양이다. 그러한 마음을 표현한 솔직함이 과연 하루키답다. 유명 작가가 아니어도 어느 누가 일흔이 넘어 자신의 아버지가 역사적 살육전에 가담했을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공론화할 수 있을까. 자신을 변호하고 자신의 부모를 미화하고자 하는 욕구를 충분히 느낄 수 있는 연령대다. 자칫 사실로 밝혀질 경우 자신의 공적이나 명예에도 해가 될까 두려울 수 있다. 그런 두려움에 대한 솔직한 표현의 공명이 크다. 마치 소년 같다. 자신이 모르는 아버지의 실책이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유보적인 표현도 와닿는다. 함부로 단정하지 않는다. 쉽게 합리화하지 않는다. 언제나 조심스럽지만 비겁하지도 않다. 분명히 명백한 일본의 전쟁 범죄에 대한 단호한 비판도 서슴지 않는다. 이것은 사실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일본의 현정권은 강경 우익이다. 일본의 문화는 나서서 무언가를 비판하거나 고발하거나 고백하는 것을 권장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왕따를 각오해야 한다. 


게다가 자신이 소설가로 활발하게 활동하던 시절 거의 몇십 년간을 아버지와 절연 상태로 지내왔다는 고백은 사실 충격적이다. 그 둘의 화해는 육십대의 아들과 구십대의 아버지로 만나 이루어진다. 이것 또한 동양적 효문화 정서에서 쉽지 않은 발언이다. 구구절절한 자기 변호가 아니라 스스로의 한계 안에서 바라봤던 목표가 가족과의 화해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되었다는 솔직한 얘기가 전부다. 그러나 이 책의 전반에는 하루키가 아버지의 몸을 빌어 이 세상에 태어난 우연한 존재라는 그 자각이 곳곳에 나타난다. 책을 좋아하고 하이쿠를 지었던 청년이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나라의 부름을 받아 그 지옥 같은 곳으로 차출되었을 때 가졌을 감정들과 느낌들, 모든 아슬아슬한 우연으로 남녀가 만나 마침내 한 아이가 이 세상에 태어나는 그 신비로운 과정, 그 아이가 세계적인 소설가가 되어 다시 이 과정을 찬찬히 복기하는 과정을 따라가는 길이 군데군데 멈추어 설 수 밖에 없을 정도로 생각할 거리가 많다. 구태여 많은 문장들 대신 이 수많은 감정, 깨달음, 생각을 수없이 조탁하여 정렬한 밀도 높은 그의 문장들로 충분했던 것이다. 


바꿔 말하면 우리는 광활한 대지를 향해 내리는 방대한 빗방울의, 이름 없는 한 방울에 지나지 않는다. 고유하기는 하지만, 교환 가능한 한 방울이다. 그러나 그 한 방울의 빗물에는 한 방울의 빗물 나름의 생각이 있다. 빗물 한 방울의 역사가 있고, 그걸 계승해간다는 한 방울로서의 책무가 있다. 우리는 그걸 잊어서는 안 되리라. 

- 무라카미 하루키 <고양이를 버리다>


집단적 역사 의식 강요 아래 개개인의 고유성과 그 의미를 잊지 않아야 함을, 우리는 우연의 산물이지만 그것이 무의미와 동급은 아님을 하루키의 글로 읽어 통쾌했다. 그것은 '고양이를 버린' 그 여름날의 아버지로부터 잊혀진 잃어버린 아버지의 한 생애의 역사를 온전하게 복원해 내어 한 인간의 삶의 의미를 창출해 낸 하루키만의 저력에서 나온 것이다. 숱하게 죽어간 전장의 동료들뿐만 아니라 당시 자신들의 적이었던 중국의 병사들을 위해서 불단에서 독경을 했던 그의 아버지를 계승하는 하루키의 윤리 의식이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3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tella.K 2020-10-28 19:3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그래서 저는 이 책이 중고샵에 나오면 사 볼까해요.ㅎ
정말 줄 너무 많이 치면 중고샵에선 안 받아 주는 것 같더군요.
헌책방에선 받아주는지 모르겠어요. 헌책방은 이용해 본 적이 없어서...
그냥 간직했다 폐지로 나가는 수 밖에 없는 것 같아요.ㅠ

하루키는 정말 아무리 뭐라고 해도 그가 독자와 작가들에게 미친 영향은
부정할래야 할 수 없을 것 같아요.

blanca 2020-10-28 20:16   좋아요 3 | URL
줄을 긋는 순간 그 책은 소장각입니다. ^^;; 이게 또 스트레스인게 저는 초반에 결단을 내려야 한다, 이 책은 소장이다, 이러며 줄을 북북 그었는데 후반부로 갈수록 이 책은 팔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때가 있어서요. 이래저래 책장만 미어터집니다.

하루키는 정말 작가인 것 같아요. 그냥 그런 생각이 들어요.

scott 2020-10-28 20:28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이책을 편집했던 출판 관계자들이 하루키가 책으로 출간하기전에 오래전에 발행되었던 잡지 신문 기사들까지 꼼꼼하게 체크해서 아버지에 군경력상황을 조회하고 확인하는데 오랜 시간을 보냈을정도로 철저하게 역사적 사실에 뒷받침할 증거를 집요할정도로 수집했다고 하네요 마지막 퇴고전까지 여러번 확인과 수정을 해서 편집자들이 백여페이지가 안되는 에세이여서 금방 출간하게 될줄 알았는데 하루키에 철저한 원고 확인과 수정에 두손발을 들었을정도로 하루키는 자신에 글을 세상밖으로 내보내기전에 어떤 허영이나 자만 허세가 없다는 사실을 단단히 못박아두었다고 하네요.
엄청난 프로정신 (작가로서)으로 무장해서 견고하게 흔들리지 않게 여태껏 최정상에 작가로 새책 출간할때마다 일본열도 전 서점을 하루키 책으로 도배시킨다는것만으로도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blanca 2020-10-29 12:51   좋아요 1 | URL
헉, 그런 디테일한 것을 어떻게 다 아세요? 혹시 scott님 하루키 측근 아니신가요? ^^;; 이게 제가 나이가 드니 어떤 우려, 조바심, 유보를 표현한다는 게 대단한 용기를 필요로 하는 거라는 걸 알았어요. 막 주장하고 합리화하고 엄호하고 은폐하고 이런 건 쉬운 거잖아요. 자기가 어떤 잘못을 저지를 수 있다, 이게 확실하지 않을 수 있다, 나에게도 실책이 있다, 이렇게 말하는 어른이 최근에 있었던가 싶고. 그런 면에서 하루키는 정말 역시 하루키다, 싶어요. 말씀해주신 얘기 들으니 더욱 존경스럽네요. 배우고 싶어요. 일본에서 일본의 역사적 실책을 이렇게 전면에 내세우며 말할 수 있는 작가가 몇이나 될까요.

저는 하루키의 몸 관리에 대한 절제의 이야기도 너무 좋아요. 정말 너무 공감이 가서요.

단발머리 2020-10-29 13:4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버지와의 화해 이야기 정말 소설 같네요. 저도 찾아서 읽어봐야겠어요. 애정과 관심이 예전같지는 않지만, 하루키는 하루키니까요.
하루키가 이 글을 읽는 특별한 경우는 상상 속에서나 가능할테지만, 만약 하루키가 블랑카님의 이 글을 읽게 된다면, 좋아하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을 하게 되네요. 잘 읽고 갑니다, 블랑카님^^

blanca 2020-10-29 19:30   좋아요 1 | URL
단발머리님 댓글 읽고 잠시 행복했어요. 상상은 상상이니까요. 영원히 젊을 줄 알았던 하루키가 일흔이 훌쩍 넘었다니 실감이 안 나요. 그 만큼 나도 나이가 든 거겠지요. 여전히 어떤 하루키다움을 잃지 않으며 노인이 되어가는 모습이 존경스럽습니다. 그의 작품과는 별개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