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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제11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강화길 외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중년의 내가 인정하기에는 조금 안타깝지만 젊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얘기가, 느끼는 감성이, 쓸 수 있는 얘기가 있다. 어딘가 한 구석은 열려 있고, 날것의 경험은 겉돌지 않고, 소통과 교감에 대한 기대를 속단하지 않고, 그 모든 것들을 다 표현할 수 없는 애타는 간절함이 서려 있는 이야기가 있다. 김연수가 그랬던 시간에 만든 이야기들을 신형철 평론가가 갈무리하던 시간을 기억한다. 쓰고 해석하고 느끼고 마무리하는 둘의 궁합은 정말이지 최고여서 오래 기억에 남는다. 이 이야기가 너무 좋은데 그 이야기를 다시 복기하며 내가 놓친 것들을 꼼꼼히 챙겨주는 평론가의 마무리까지가 소설가의 작품의 연장선상인듯한 느낌은 흔한 것이 아니었다.
오랜만에 그런 느낌을 상기하게 만드는 책이었다. 잊어버린 감각이 되돌아오고 이젠 다시 느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느낌들을 다시 맛보았다. <제11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의 일곱 작품과 짝꿍처럼 곁들여 있는 신진 평론가들의 평론도 다 함께 마저 읽어버렸다. 물론 내가 충분히 젊었을 때 한창 젊었던 소설가와 비슷한 평론가의 평론을 읽으며 느꼈던 그 시간의 감동의 진폭과 결와 온전히 일치하지는 않았지만 그때의 감동을 충분히 기억해 낼 만큼 좋았다.
강화길의 <음복>은 아직 제사문화가 남아 있고 곧 화자 같은 올케를 맞이하게 될 지 모를 지금 나의 상황을 곱씹어보게 했다. 비판없이 전승되는 가부장 제도의 집약인 '제사'에서 그것을 주도하는 남성들의 역할과 그들을 보조하고도 자신이 한번도 본 적조차 없는 상대 배우자의 조상에게 절조차 나가서 할 수 없는 여성들의 희생과 그 틈의 긴장, 감정의 소진이 신세대 며느리의 시선 앞에 생생하게 정경화된다. 아무것도 모르고 알려 하지도 않고 골치아픈 모든 문제들로부터 보호되는 남편을 사랑하는 '나'의 모순은 결국 이 젠더의 구조화가 미치는 여성들 간의 갈등, 암투로 교묘히 왜곡되고 있음을 간파한다. 대목마다 공감이 가는 부분이 있었고 비판 없이 그러한 가족적 전통 서사를 받아들였던 나를 돌아보게 만들었다.
은행의 계약직이었다 늦깍이 대학생이 된 화자가 여성 강사와 만나 교감하고 오해하고 어긋나며 역설적로 그녀가 걸어간 길을 답습하게 되는 최은영의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는 최은영 특유의 큰 서사 없이도 삶의 어떤 그리운 정경을 불어내는 재주와 그것에서 확장되는 사회적 소외 계층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느낌을 주는 작품이었다. 아름다운 문장과 작가의 따뜻한 마음이 만나 "사라지지 않을 수 있을까."라는 화자의 자문에 깊이 공명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똑똑하고 당차던 그녀들이 사라져간 길을 다시 꾹꾹 눌러 밟으며 "어디로 가는지 모르지만, 적어도 사라지지 않고 계속 나아갈 수 있다는 걸 알려주는 빛"의 질량감을 길어올리는 작품이었다.
김봉곤의 <그런 생활>은 허구의 소설이라기보다 작가 자신의 어머니를 향한 커밍아웃과 애인과의 동거 생활에 대한 경쾌하지만 가볍지 않은 에세이 같았다. 여전히 유쾌하고 그럼에도 진부하지 않으면서 삶의 행간의 의미를 끌어올리는 작가의 능력은 그의 성정체성을 뛰어넘는 것이다. 특히나 화자의 책을 읽고 난 어머니가 사투리로 "니 진짜로 그애랑 그런 생활을 했나?"라고 묻는 대목에서는 그 장면이 너무 생생하게 그려져 막상 심각한 장면인데도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런'에 찍힌 방점은 많은 것들을 내포한다. 어머니가 장성한 아들에게 기대하는 전형적인 기대치와는 완전히 대치되는 '그런'이 비극적인 신파로 전락하지 않는 데에는 분명 김봉곤 작가의 생에 대한 활달한 긍정과 씩씩하고 리드미컬한 문장이 만들어내는 이야기 자체의 생동감이 하는 역할이 있을 것이다. 결론은 타협, 수긍인데 이야기는 침잠하지 않고 왜 이리 유쾌하게 역동적인지 나도 그의 '그런 생활'을 어느새 인정하고 이해해버린 듯한 느낌.
김초엽의 <인지 공간>은 어느 구석인가 테드창을 떠올리게 하는 단서가 있다. 우리의 집단화된 구조화된 사고체계를 격자로 실체화하고 그 안팎을 넘나드는 화자와 이단아 같은 친구의 관계망을 담담하게 이야기하며 어느새 우리 안에 고착화된 외부에서 주어지는 어떤 고정 관념, 계승되는 각종 제도와 교육에 관련한 그 경직된 틀을 해체하려는 시도가 여지없이 상큼하고 창의적이었다. 결이 아직 촘촘하지 못하고 매끄럽지 않은 부분은 시간과 함께 충분히 숙성할 것이라는 기대가 되는 작품.
장류진의 <연수>는 내가 삼십 대 중반이 넘어 중년의 여성 강사에게 받았던 운전연수를 떠올리게 해서 반가웠다. 모든 것에서 엄친딸인 화자가 운전 앞에서 좌절하는 모습과 그 과정에서 그녀를 교묘하게 자극하고 결국 독립시키려는 강사의 모습이 유사 모녀 관계를 연상시키며 어떤 현을 건드리는 지점이 있어 인상적이었다.
마지막으로 장희원의 <우리의 환대>는 아들을 키워 독립시키는 과정에서 평범한 부모로서 느끼게 되는 어떤 상실감감에 대한 평범한 이야기가 아니라 부모가 살아오며 체득한 사회적 제도망에서 자신들이 낳고 키워낸 자식이 일탈할 때 부모로서 어떻게 반응하고 그것을 삶에 통합해야 하는지에 대한 시사점을 던져주는 참신한 작품이라 읽고나서도 여운이 쉽게 가시지 않는 이야기였다.
전반적으로 모두의 작품이 건드리는 사회적 통념과 경직화된 구조의 공고함은 어떤 유연함을 사고의 전환을, 도약을 향해 약진하는 느낌이다. 서사는 참신하고 문장은 구어적이고 결론은 열려 있다는 공통점에 기대어 오랜만에 모든 단편에 집중해서 즐거움을 느끼며 읽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