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의 항상 습진을 달고 살았던 왼손 중지에 생긴 염증으로 왼손을 이 주 동안 쓰지 못했다. 고작 손가락 하나인데 살짝 뭔가 닿기만 해도 소스라치게 놀랄 정도의 통증이다보니 아예 왼팔은 옆구리에 붙이고 다니는 지경까지 갔다. 생각보다 한 손만 사용해서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세수도 양치도 머리를 묶는 일도 그랬다. 아이의 패딩 점퍼 지퍼를 채워주며 부들부들 떠는 엄마를 내려다 보며 아이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항생제를 먹고 소독을 하고 연고를 발라도 여전히 차도가 없어 손가락에 주사까지 맞았다. 손가락 주사는 마취 주사를 먼저 맞고 맞는다는 사실까지 알게 됐다. 설명하기 힘든 고통이었다. 그렇게라도 나으면 싶었다. 그러나 통증은 끈덕지게 돌아왔다. 누구한테 이 고통을 호소해야 할지 대체 어느 병원 어느과로 가야할지도 오리무중이었다. 손가락 관절이 통증이 아니라 손가락 피주의 통증이니 사례도 많지 않았고 사람들한테 왠지 손가락이 아파서 힘들다고 얘기하기도 계면쩍었다. 이 세상에 수많은 통증으로 고생할 사람들이 떠올랐고 그 사람들의 고통의 십분지 일이나마 통감하게 되었다. 남들은 뭐 그 정도 가지고 그러냐고 말할 통증이 그 사람 삶 전체에 회색 구름을 드리울 수 있다는 것까지도. 집안일을 마무리하고 잠들기 직전 손가락 통증이라는 단어를 검색어에 넣고 온라인의 온갖 사례를 읽고 그 다음에 내가 가야 할 곳과 내가 받을 수 있는 치료는 무엇일까 생각하다 보면 걱정이 되어 잠도 안 왔다. 내가 이렇게 나약한 인간이라는 것도 싫었다. 더 심한 통증으로 고생하는 사람들도 많은데 난 손가락이 따가워 살기 싫어지다니.... 이렇게 계속 아프다면 도저히 견딜 수 없을 것 같은 생각까지 들었다. 다행히 어제 아침부터 드디어 그 손가락을 쓸 수 있게 됐다. 


중병의 발병과 회복은 내게 '정상적'인 삶이 대단히 비싼 것이라는 놀라운 진실을 가르쳐줬다. 어떻게든 정상에 가까운 삶을 재구축하려고 애쓰는 과정에서 내가 그동안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던 것들에 실제로 얼마나 큰 비용이 드는지 절감했다. -데이비드 파젠바움 <희망이 삶이 될 때 >















응당 환자를 치료하는 입장인  의사 당사자가 중병에 걸려 투병하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폴 칼라니티가  <숨결이 바람될 때>라는 호소력 있는 작품으로 대중들에게 많은 사랑과 공감을 얻은 바 있다. 그래서 솔직히 그 아류일 거라 단정하고 시작했다. 하지만 한때 풋볼팀 주전 쿼터백이었던 파젠바움이 이름도 생소한 희귀병인 캐슬만병의 자신의 삶 전체를 흔드는 데 대처하는 이야기는 폴 칼라니티의 그것과는 완전히 다른 경로의 이야기이다. 일단 칼라니티가 걸렸던 폐암 역시 난치병이지만 적어도 캐슬만병 같은 도저히 정체를 파악할 수 없는 미지의 것은 아니었다. 또 캐슬만병은 주기적으로 재발하며 그를 죽음의 문턱까지 끌고가는 양상을 보여 암의 병세와는 다른 경로를 보인다. 이 병의 정체를 파악하고 치료약을 찾는 과정을 환자이자 의사인 파젠바움 자신이 하는 이야기는 비장한 투쟁의 행로다. 그에게 희망은 막연한 낙관이 아니라 증거 수집을 통한 과학적인 예측이자 불굴의 의지가 한데 어우러진 용광로 안에 스스로를 던지는 행위 그 자체였다. 중환자실에서 죽어가면서도 그는 치료약을 찾기 위한 자신의 생체 샘플을 만들 궁리를 한다. 그것은 비단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온 세계에 흩어져 고통 받고 있는 희귀 난치병 환자들 전체를 위하여 협업 네트워크를 만들어 가장 효율적이고 지속적인 치료약을 찾기 위한 대승적 차원의 꿈과도 만났다. 감정적으로 굴복하고 절망하는 대신 그가 초인의 의지로 보여준 치료를 위한 열의와 이성적인 대처는 비단 그가 발병 전 체력을 열심히 단련했고 본인이 의사인 것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건 가족의 지지와 사랑, 앞날이 불확실한 심지어 죽을 수도 있는 연인의 곁에 끝까지 남아준 흔들리지 않는 사랑 덕분이었다. 그녀와 결혼하여 아이를 가지는 꿈을 포기하지 않는 그의 마음이 오래 투병하고 있는 가족을 떠올리게 해 그대로 전해져 와서 아팠다. 


내게 필요한 것을 스스로가 크리스마스트리 아래에 갖다 놓지 않는 한 아무도 그것을 갖고 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난 뒤에는 산타클로스를 기다리지 않아야 했다.

-<희망이 삶이 될 때> 에필로그


그가 꿈꾸던 것이 결국 이루어지는 에필로그를 읽으며 눈물이 핑 돌았다. 기도하는 그 사람도 그러하기를 바라며 마음에 위안을 얻는다. 이러한 사례는 희망의 명백한 증거가 된다. 이 책은 의사의 그렇고 그런 투병기가 아니라 한 사람이 위기 앞에서 어떻게 그것에 대처하며 삶을 계속해나가는지에 대한 장엄한 서사시다. 고통을 딛고 난 이후의 삶이 가지는 여운이 길다. 또 배우고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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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9-12-17 14: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너무 좋네요, 블랑카님.
마지막에 쓰신 ‘꿈꾸던 것이 결국 이루어지는 에필로그‘란 글귀에 이 책을 읽어야겠다고 마음 먹게 되었어요. 저는 그런 이야기가 필요합니다.

blanca 2019-12-18 13:38   좋아요 0 | URL
이 책 기대이상이랍니다. 진부하지 않고요. 생각할 거리를 많이 줘요. 일단 내가 지금 고민하는 것들을 일거에 아주 사소하고 별 것 아닌 것들로 보이게 해 주니까요. 그 어떤 해피엔딩보다 감동적이었답니다.

moonnight 2019-12-18 13: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읽어볼래요 blanca님@_@;;; 손가락 증상이 좀 좋아지셨다니 천만다행이에요. 조마조마했어요ㅜㅜ;

blanca 2019-12-18 13:58   좋아요 0 | URL
이 주 동안 항생제를 계속 먹었더니 이제는 위가 아프네요... 여튼 사례가 많지 않으니 온갖 상상하느라 힘들었답니다. 감사해요^^ 머리 감을 때 양 손으로 거품낼 수 있는 행복에 감사합니다.^^;;

프레이야 2019-12-23 11: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통증이 나아지셨다니 다행이에요. 충분히 앓고 시간이 지나야 나아지는 것들,,,
시간이 지나도 나아지지 않는 것들이 마음에 걸리지만요. 몸이 아플 때면 또 여러 생각이 들곤해요.
고통을 딛고 난 이후의 삶, 그런 삶을 영위하고 있는 주변 사람들을 보며 제 자신을 돌아봅니다.
미리 크리스마스~~^^ 이 책 담아가요.
아, 갑자기 분홍공주 생각이 ...

blanca 2019-12-24 13:59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님, 오늘 벌써 크리스마스 이브네요. 흑, 올 한 해 진짜 일도 많고 탈도 많고 특히 몸이 여러 군데 말썽을 부렸어요. 내년엔 프레이야님도 저도 건강하고 평안한 한 해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분홍공주는 ㅋㅋ 사춘기라지요. 오늘 방학해서 어떻게 좀 훈련을 시킬까 고민 중이랍니다. ㅋㅋ 프레이야님 행복한 성탄 전야 보내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