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위대하기보다는 거대한 나라라고 생각한다. 어느 한 단면이 미국을 대표한다고 생각하기 곤란한 이유다. 인종, 계층, 문화의 스펙트럼도 상상이상으로 넓다. 미드에서 보는 자본주의의 최첨단의 혜택을 누리는 화려한 상류층의 모습도 교실에서 친구들을 저격하는 십대의 비극도 병원비로 파산해서 거리를 헤매는 노숙자들도 인종 차별적 발언을 서슴지 않는 대통령에게 표를 던지는 성난 백인 노동자들도 다 언뜻 보이기에 모순적으로 보이는 파편들이지만 미국의 모습이다. 나는 미국 사람도 아니고 미국에서 태어나지도 않았고 유학을 한 경험도 이민을 해서 장기간 살아보지도 않아서 그야말로 미국을 안다고도 미국을 제대로 경험했다고도 할 수 없지만 바깥에서 보는 미국과 실제 내부에서 부딪히며 느끼는 감상의 간극이 예상을 뛰어넘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어떤 현상을 관찰하거나 경험했다고 느끼는 것의 한계와 곡해와 자가당착적 오류를 알기에 딱 떨어지는 말로 옮기기 힘든 미국이라는 나라에 대한 느낌은 어쩌면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분투하지만 실패해 버린 지점에 대한 개인적 소회의 형상화에 빗대어질 수도 있을 것같다. 최선을 바랐지만 그것과 어긋나버린 현실을 우리 모두는 어떻게든 해석하고 통합해야만 하는 숙제 앞에서 종종 아연해지니 말이다. 이렇게 나는 미국에 대한 몰이해와 미국 사람들에 대한 감정적 거리에서 우연히 <힐빌리의 노래>를 만났다. 



밴스는 자본주의 외형적 성취 측면에서 얘기한다면 예일 로스쿨을 나온 성공한 백인 변호사다. 지금 그의 모습에서 그가 어린 시절 겪었던 참혹한 시간들을 상상하기란 쉽지 않다. 한때는 은성했을 공장지대가 제조업의 사장과 더불어 몰락하고 그것이 빠져나간 자리에서 미처 도망쳐 나오지 못한 사람들과 더불어 성장한 그의 이야기는 실패한 자본주의, 자본주의의 소외지점에서 어떻게 사람들이 고통을 겪는지, 그 고통을 뚫고 나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나가는지에 대한 슬픈 엘레지다. 그가 자라난 오하이오는 '러스트 밸트', 미국의 대표적인 제조업의 거점이었지만 공장 및 인력이 해외로 빠져나가며 붕괴일로로 치닫고 있는 곳이다. 아이들은 십대에 임신을 하고 약을 배우고 일자리를 찾지 못하고 또 그런 환경 속에서 자신과 닮은 절망을 낳고 키우며 사는 곳이다. 밴스 또한 약에 항상 취해 있던 어머니, 얼굴도 잊어버린 생부, 그 빈 자리를 들고 나는 의붓 아버지들, 절망 속에서 애저녁에 애어른이 되어버린 이부 누나와 어린 시절을 보내며 궁핍하고 신산한 어린 시절을 보낸다. 그럼에도 그가 그곳을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것은 역설적으로 가장 힐빌리적이었던 조부모의 따뜻한 사랑 덕분이었다. 일상이 욕설과 고성에 교양과는 거리가 멀었던 그들이었지만 이곳을 빠져나가기 위해 손자가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지, 어떤 꿈과 지향을 가져야 하는지에 대한 강력한 열망과 청사진이 있었던 그들의 사랑은 오늘날의 밴스를 가능하게 했다. 이는 대가족이 얽혀 서로의 삶을 피곤하게 간섭하고 교육의 힘을 믿고 세속적인 가치의 무게를 의식하는 동양적인 농업 사회의 가족들의 모습과 묘하게 오버랩되는 부분이 있다. 그러나 밴스는 그러한 다른 가족의 지지조차 받지 못하는 많은 힐빌리의 아이들이 어떻게 절망에 빠지는지에 대한 지적도 잊지 않는다. 


밴스의 모든 이야기가 설득력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 미국이라는 나라에 대한 지나친 자긍심, 백인의 정체성에 대한 민감한 인식, 보수정권에 대한 가치관 등은 분명 편향적인 부분이 있다. 그럼에도 그 편향성의 서사의 경로 자체는  공감을 자아낸다. 주류에 편입되고자 하는 열망, 그 주류에서도 결국은 또하나의 아웃사이더가 될 수밖에 없는 그 문화적 경계의 완고함에 대한 절망 등은 우리가 흔히 얘기하는 사회적 계층 이동의 가능성의 경로에 얼마나 많은 허점이 있는지에 대한 자성을 가능하게 한다. 


밴스는 <힐빌리의 노래> 이후 아들을 낳았다. 그 아들은 밴스가 겪었던 어린 시절의 경제적 고통이나 가족의 해체로 초래되는 불안을 대물림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하지만 이들이 또 자라나 기성의 기득권이 되어 자신들이 겪었던 소외, 상실의 기억을 잊을 때 힐빌리는 영원히 대물림되어 절망을 되씹으며 사회 안정과 통합에서 저만치 물어나 여전히 절망을 체현하게 될 것이다. 절망과 실패의 지점은 완강하다. 시선을 돌린다고 그곳이 사라지기를 기대하는 것은 오판이다. 꿈을 꾸는 것이 불가능한 지대,는 비단 미국만의 이야가 아니다. 내일 내가 어떤 사람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한 건설적인 모델이 없는 곳에서 어떻게 제대로 된 미래의 그림을 그릴 수 있을까. 점점 공고해지는 자본주의의 계층 간의 경계에서 여전히 잉태되는 절망들에 어떤 해답의 경로를 제시할 수 있을까에 대한 질문의 여운이 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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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8-05-29 1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국의 역사나 미국의 문학을 이해하려면 흑인이 미국을 바라보는 관점과 시선부터 먼저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요즘 흑인 페미니즘을 공부하기 시작하면서 그동안 제가 읽었던 서구 백인 중심의 역사와 문학의 허점들이 조금씩 보이게 되더라고요. ^^

blanca 2018-05-30 02:04   좋아요 0 | URL
맞아요. 인디언 원주민의 슬픈 역사도 그렇고요. 미국이라는 나라는 여러 인종이 섞여 평화롭게 공존하는 것 같지만 그 내부에서의 차별이나 균열은 끊임없이 고민해봐야 하는 잠복 과제인 것 같아요. 특히 역사 부분에서는 더욱 그렇지요. 흑인 페미니즘을 공부하신다니 흥미롭네요. 여자에 흑인이라는 위치가 얼마나 상대적 약자인지 저는 상상조차 잘 가지 않습니다. 응원합니다.

레삭매냐 2018-05-29 15: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힐빌리 출신으로 변호사가 되어 성공한
남자의 이야기가 책을 읽을 수록 부담
스러워졌습니다.

과연 저자가 다른 힐빌리들에게 롤모델
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여러 각도
에서 생각해볼 여지가 있는 것 같습니다.

blanca 2018-05-30 02:06   좋아요 0 | URL
그렇죠. 저도 이 책의 대목 대목마다 설명할 수 없는 불편함을 느꼈어요. 근간에 백인이라는 자의식도 그렇고요. 인종을 강렬하게 인식한다는 게 역설적으로는 그렇게 태어난 인종이 누려야 하는 어떤 근원적 특혜에 대한 기대가 있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어요. 아직 더 생각하고 경험하고 공부해야 판단할 수 있는 얘기인 건가 싶기도 했고...댓글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