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폰을 꽂고 아메리카노를 마시려는 찰나, 중년의 아저씨가 내 건너편의 안쓰는 의자를 좀 써도 되겠냐고 미안해했다. 혼자였으니 마다할 이유가 없어 흔쾌히 응하고 테이블을 살짝 훔쳐보니 이미 커피 두 잔이 준비되어 있다. 나머지 약속한 사람들이 나타나자 세 남자의 시끄러운 커피타임이 시작된다. 이것은 흡사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의 저녁 술 자리 같은 강도. 마지막엔 커피잔으로 건배까지 하며 좋아한다. 이어폰으로 들으려던 내용은 흡사 딴 세상에서 꿈결에나 들리는 듯해 도통 내용을 알 수가 없다. 포기해버리고 책을 보기로 한다.
솔직히 언어에 대한 욕심이 있다. 한국어도 영어도 유창하게 잘 말하고 쓰고 싶고 더불어 제2외국어도 하고 싶지만 현실은 둘 다 점점 언어의 표현, 인식의 날이 무뎌지고 있다. 내가 말하면 상대가 난감해하는 경우, 나는 제대로 말하거나 쓰지 못한 것이다. 어떤 새로운 표현이나 단어를 완전한 내 것으로 소유하는 일은 사람을 그렇게 하려는 욕심보다 작지 않다. 그러니 실현 불가능한 영역은 점점 넓어져만 간다. 발은 현실을 딛어도 시선은 별을 보라지만 그것은 자칫 도를 넘다보면 지치게 된다. 이제 내가 딛고 있는 땅은 지평선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전진하는 것이니 만큼 고개를 한없이 위로만 향하다가는 자칫 넘어지게 된다. 그런데 이 책의 라틴어 경구들은 또 그런 욕심을 다시 생겨나게 한다. 아, 하나 하나 다 기록하고 싶고 외우고도 싶고 그런데 책장이 넘어가면 바로 전에 감동을 주었던 라틴어 문장은 이미 저 멀리 쫓겨나 있다. 저자가 이탈리아에 유학가서 공부할 때 수업 내용을 거의 알아들을 수 없어 절망해서 포기하고 싶었던 기억을 되살리는 대목은 그래서 반갑다. 그럼에도 버티어 이런 책을 쓸 수 있었던 그의 근성은 그래서 더 와닿는다. 라틴어를 언어학적으로 집중해서 가르쳐 주는 책은 아니고 아름답고 의미 있는 라틴어 경구들을 하나의 챕터에 각각 담아 대학 강의를 하듯 친절하게 현실에 접목시켜 풀어줘 더 좋다.
어머니의 죽음을 묘사하는 대목에서는 왈칵 눈물이 쏟아 난감했다. 이탈리아 유학 당시 쓴 손편지가 실려 있다. 어머니의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본질에 대하여 진지하게 접근하며 소개한 로마의 공동묘지 입구에 새겨진 라틴어 문장의 울림이 크다.
Hodie Mihi, cras tibi
오늘은 나에게, 내일은 너에게
죽음은 지극히 개별적이면서 또 지극히 보편적이라 우리 모두의 일이다. "오늘은 나에게, 내일은 너에게"도 분명 닥칠 일이다. 사소한 끌탕은 슬며시 자리를 감추게 된다. 몰랐는데 바깥에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난감하지만 그 속을 뚫고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