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모든 저녁 3 (유하)

 

또 하루가 어두워지려 한다

출구를 자기 뒷모습에 두고

유리창에 팅팅 몸을 부딪는 날파리처럼

 

헤비메탈을 부르다 뽕짝으로 창법을 바꾸는

그런 삶은 살지 않으리라

 

간성 가는 길, 청간정에 앉아 저무는 동해를 본다.

저 바다를 어찌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소나무는 서 있고, 슬픈 육체여

지나온 사랑의 출렁거림 앞에서

난 아직도 망연자실하다

 

어스름 해변엔 청춘들이 모여 기타를 튕기고

제비새끼같이 노랗게 벌린 입 속의 떨리는 목젖

다들 자기를 튕겨 저녁에 안기는 법을 알고 있을까

 

목숨의 등대인 듯 안간힘으로, 노래가 불을 켜들 때

구멍난 세상의 캄캄한 울림통 속에서

내 가슴도 멍멍하게 따라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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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5-06-25 18: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하 시를 다시 읽으니 참 좋네요.
저도 아직 망연자실하답니다.^^

검둥개 2005-06-25 2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맘에 드신다니 저도 기뻐요. 유하는 자고로 사랑의 시인이 아니겠어요 ^^
 

세상의 모든 저녁 1 (유 하)

 

여의도로 밀려가는 강변도로

막막한 앞길을 버리고 문득 강물에 투항하고 싶다

한 때 만발했던 꿈들이 허기진 하이에나 울음처럼

스쳐간다 오후 5시 반

에프엠에서 흘러나오는 어니언스의 사랑과 진실

추억은 먼지 낀 유행가의 몸을 빌려서라도

기어코 그 먼 길을 달려오고야 만다

기억의 황사바람이여, 트랜지스터의 라디오 잡음같이 쏟아지던

태양빛, 미소를 뒤로 모으고 나무에 기대 선 소녀

파르르 성냥불처럼 점화되던 첫 설레임의 비릿함, 몇 번의 사랑

그리고 마음의 서툰 저녁을 불로 모아 별빛을 치유하던 날들

나는 눈물처럼 와해된다

단 하나의 무너짐을 위해 생의 날개는 그토록 퍼덕였던가

저만치, 존재의 무게를 버리고 곤두박질치는 물새떼

세상은 사는 것이 아니라 견디는 것이기에

오래 견디어낸 상처의 불빛은

그다지도 환하게 삶의 노을을 읽어버린다.

소멸과의 기나긴 싸움을 끝낸 노을처럼 붉게 물들어

쓸쓸하게 허물어진다는 것,

그렇게 이 세상 모든 저녁이 나를 알아보리라

세상의 모든 저녁을 걸으며 사랑 또한 자욱하게 늙어가리라

하지만 끝내 머물지 않는 마음이여, 이 추억 그치면

세월은 다시 흔적 없는 타오름에 몸을 싣고

이마 하나로 허공을 들어올리는 물새처럼 나 지금,

다만 견디기 위해 꿈꾸러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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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5-06-24 1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니언스의 사랑의 진실......
테이프가 너덜너덜해져 몇 해 전 버렸는데.
갑자기 그 노래가 듣고 싶네요.^^

파란여우 2005-06-24 1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님은 서재 함 확인해 주시고요,
저도 이 글읽고 있자니...
스카프 휘날리며 어딘가 달려가고 싶습니다.

잉크냄새 2005-06-24 1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억은 먼지 낀 유행가의 몸을 빌려서라도
기어코 그 먼 길을 달려오고야 만다

이 구절을 어느 분의 서재 대문에서 보고 인상에 남았었는데 이 시의 한 구절이로군요.

검둥개 2005-06-24 2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어니언스의 사랑의 진실을 그것도 테이프로 가지고 계시단 말씀이죠. 서재에 함 올려주시면 좋았을 텐데 ^^ 이 시 올리면서 저도 그 노래가 듣고 싶었답니다.

파란여우님, 스카프 휘날리며 어디로 달려가시려나요? 스카프도 파란색?

잉크냄새님, 사람들이 다 그 구절을 특히 잊지 못하는 것 같아요. 유행가가 절실하게 들릴 때가 다들 있었다는 반증이겠죠? ^^
 

풍장의 습관 (나희덕)

 

방에 마른 열매가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오늘 아침이었다.

책상 위의 석류와 탱자는 돌보다 딱딱해졌다.

향기가 사라지니 이제야 안심이 된다.

그들은 향기를 잃은 대신 영생을 얻었을지

모른다고, 단단한 껍질을 어루만지며 중얼거려본다.

지난 가을 내 머리에 후두둑 떨어져 내리던

도토리들도 종지에 가지런히 담겨 있다.

흔들어보니 희미한 종소리가 난다.

마른 찔레 열매는 아직 붉다.

싱싱한 꽃이나 열매를 보며

스스로의 습기에 부패되지 전에

그들을 장사지내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때 이른 풍장의 습관으로 나를 이끌곤 했다.

바람이 잘 드는 양지볕에

향기로운 육신을 거꾸로 매달아

피와 살을 증발시키지 않고는 안심할 수 없던,

또는 고통의 설탕에 절인 과육을

불 위에 올려놓고 나무주걱으로 휘휘 저으며

달아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던 나는

건조증에라도 걸린 걸까.

누군가 내게 꽃을 잘 말린다고 말했지만

그건 유목의 피를 잠재우는 일일 뿐이라고

오늘 아침 방에 들어서는 순간

후욱 끼치던 마른 꽃 냄새, 그 겹겹의 입술들이,

한 번도 젖은 허벅지를 더듬어본 적 없는 입술들이

일제히 나를 향해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

나비처럼 가벼워진 꽃들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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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이 시를 읽었을 때는 시인이 말리려 부라부라 애쓰는 것은 욕망이라고만 단순하게 생각했다. 과도한 욕망이 가져오는 파괴적 종말을 미리 피하려는 사람의 바지런함.

하지만 그건 너무 좁은 해석이었는지도 모른다. 사라지는 향기는 꼭 욕망의 진한 그 향이 아닐 수도 있다. 우리가 두려워 도망치는 것은 어떤 순수의 정열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피할 수 없는 시간 속에서의 그 순수의 변질에 대한 두려움. 그래서 아끼는 것에서 수액을 뽑아 안전히 말려 더이상 우리를 위협하지 않는 그것의 아름다움만 안락하게 감상하려는 유혹.

부패하는 것은 무거워지면서 스스로의 파멸과 그 추함을 남김없이 드러낸다.

그런 운명을 피한 어떤 것들은 가비얍게 날아오른다.

하지만 그 가벼움이란, 한편 우리에게 무슨 의미를 지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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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송이 2005-06-19 06: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거운 현실을 대체하는 한 조각 기억. 빈 세계 입장권

검둥개 2005-06-19 2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음 그렇단 말이죠? ^o^
 
빵가게 재습격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남희 옮김 / 창해 / 2004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어쩌다보니 나는 이 책을 <The Elephant Vanishes>라는 제목으로 나온 단편집으로 읽었다. 이 단편집에는 총 17개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었는데, 그 중 여섯편은 이 <빵가게 재습격>에 들어 있다. 나머지 열한편도 아마 많은 출판사에서 여러가지로 묶어낸 단편선들 중 어디엔가에 있으리라 생각된다.

<빵가게 재습격>에 실린 여섯편을 포함 <코끼리 소멸>에 실린 총 17편의 단편들에서는 뭔가 패기있는 젊은 작가의 실험정신 같은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런 느낌은 최근 하루키의 장편들에서는 좀처럼 드문 것이어서 이 책을 읽는 것은 즐거운 경험이었다. 그 외에도 희한하고 있을 법 하지 않은 일을 가벼운 필체로 날렵하게 다루는 단편들은 독자들로 하여금 이후 하루키의 장편 소설들의 소재가 갖는 일정한 일관성이 어디에서 연유하는지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하루키의 장편을 여럿 읽고 약간 물리려 한다는 생각이 드는 독자들은 이 (그리고 다른 여러) 단편선을 읽는 데서 색다른 즐거움을 느끼리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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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니의 일기
에마 매클로플린. 니콜라 크라우스 지음, 오현아 옮김 / 문학사상사 / 2004년 7월
평점 :
절판


소재는 얼마든지 더 흥미롭게 다루어질 수도 있었는데, 책의 전개는 상당히 느리고 극적 구성도 약하다는 느낌이다. 지은이들이 8년을 유모로 일한 경험을 모아 썼다는데 아무래도 소설이라기보다는 가명을 사용한 유사 수기 같은 느낌을 준다.

부유층 사람들의 호사스런 삶과 희한하고 (약간 역겨운) 행동거지를 보는 재미를 주지만, 정작 내니는 소설에서 행동의 주체라기보다는 객체에 불과하다. 소설의 주인공은 행동의 주체여야 한다는게 소설 작법학의 제일원칙이라는데 이 원칙이 무시되는 것을 보면 이 소설의 저자들이 적어도 이 책을 쓸 당시에는 아마추어 소설가들이었다는 게 드러난다.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내니보다 오히려 황당할 정도로 모성이 결여되고 희한할 정도로 자신의 불행을 외면하는 데 재능이 있는 Mrs X의 캐릭터가 더 인상적인데, 소설이 이 인물을 보다 깊이 탐구했더라면 책이 좀더 흥미로웠을 것이다.

시간 때우는 재미로는 그럭저럭 읽을 만 하다. 뉴욕타임즈의 베스트셀러가 된 건, 아마 부유층 사람들의 삶을 엿보려는 관음증적 흥미가 이 책의 구매욕구를 자극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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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나 2005-06-13 1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번역본이 있길래 좋아라했더니 흠흠..

검둥개 2005-06-13 2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너무 박하게 별을 줬나봐요. 재미도 꽤 있었는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