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모든 저녁 1 (유 하)

 

여의도로 밀려가는 강변도로

막막한 앞길을 버리고 문득 강물에 투항하고 싶다

한 때 만발했던 꿈들이 허기진 하이에나 울음처럼

스쳐간다 오후 5시 반

에프엠에서 흘러나오는 어니언스의 사랑과 진실

추억은 먼지 낀 유행가의 몸을 빌려서라도

기어코 그 먼 길을 달려오고야 만다

기억의 황사바람이여, 트랜지스터의 라디오 잡음같이 쏟아지던

태양빛, 미소를 뒤로 모으고 나무에 기대 선 소녀

파르르 성냥불처럼 점화되던 첫 설레임의 비릿함, 몇 번의 사랑

그리고 마음의 서툰 저녁을 불로 모아 별빛을 치유하던 날들

나는 눈물처럼 와해된다

단 하나의 무너짐을 위해 생의 날개는 그토록 퍼덕였던가

저만치, 존재의 무게를 버리고 곤두박질치는 물새떼

세상은 사는 것이 아니라 견디는 것이기에

오래 견디어낸 상처의 불빛은

그다지도 환하게 삶의 노을을 읽어버린다.

소멸과의 기나긴 싸움을 끝낸 노을처럼 붉게 물들어

쓸쓸하게 허물어진다는 것,

그렇게 이 세상 모든 저녁이 나를 알아보리라

세상의 모든 저녁을 걸으며 사랑 또한 자욱하게 늙어가리라

하지만 끝내 머물지 않는 마음이여, 이 추억 그치면

세월은 다시 흔적 없는 타오름에 몸을 싣고

이마 하나로 허공을 들어올리는 물새처럼 나 지금,

다만 견디기 위해 꿈꾸러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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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5-06-24 1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니언스의 사랑의 진실......
테이프가 너덜너덜해져 몇 해 전 버렸는데.
갑자기 그 노래가 듣고 싶네요.^^

파란여우 2005-06-24 1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님은 서재 함 확인해 주시고요,
저도 이 글읽고 있자니...
스카프 휘날리며 어딘가 달려가고 싶습니다.

잉크냄새 2005-06-24 1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억은 먼지 낀 유행가의 몸을 빌려서라도
기어코 그 먼 길을 달려오고야 만다

이 구절을 어느 분의 서재 대문에서 보고 인상에 남았었는데 이 시의 한 구절이로군요.

검둥개 2005-06-24 2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어니언스의 사랑의 진실을 그것도 테이프로 가지고 계시단 말씀이죠. 서재에 함 올려주시면 좋았을 텐데 ^^ 이 시 올리면서 저도 그 노래가 듣고 싶었답니다.

파란여우님, 스카프 휘날리며 어디로 달려가시려나요? 스카프도 파란색?

잉크냄새님, 사람들이 다 그 구절을 특히 잊지 못하는 것 같아요. 유행가가 절실하게 들릴 때가 다들 있었다는 반증이겠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