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이드의 Civilization and Its Discontents를 읽는 중인데 재미난 구절을 발견했다.

"전인류와 전세계를 보편적으로 기꺼이 사랑하겠다는 이 자세는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견지일 것이다. ... 이 견해에 대해 내가 지닌 두가지 반대의견을 내놓자면 다음과 같다. 우선 상대를 가리지 않는 사랑이란 사랑의 대상을 불공평하게 다룸으로써 사랑의 가치 자체의 일부를 잃는 듯 하다. 또한 모든 인간이 사랑받을 가치가 있는 것도 아니다."

한 개인을 사랑하는 대신 인류를 사랑하면 사랑이 가져오는 실망과 번민, 질투와 절망 등 온갖 감정의 소용돌이에서 자유로워지며 삶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고통을 초월할 수 있다는 의견에 대한 프로이드의 응수는 그러니까,

아무나 다 사랑한다고 하면 그게 무슨 사랑이며,
사랑도 가려서 해야 가치가 있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프로이드의 반론이 이랬다니 생각보다 평범하다 싶어 실망도 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 평범한 응수가 사랑과 가치의 본질이 전부 차별에 있다는 걸 꿰뚫어보는 통찰이기도 하다.

인상적인 것은 프로이드가그 사랑의 불평등함을 이렇게 확 뒤집어서 '정의'라는 말로 표현하는 방식이다. 상대를 가리지 않고 사랑한다는 것은 정작 사랑의 대상을 불공평하게 대하는 것이라고.

전인류로부터 연인 하나를 딱 떼어 특별대접을 하는 처사처럼 세상에 불공평한 것이 없겠건만, 사랑의 옹호자 프로이드의 입장에서 보면 바로 그런 특별대접이야말로 사랑에 있어서의 정의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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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2-25 17: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검둥개 2007-02-26 0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님, 그러게요.^^
사랑과 우정의 그 부정의가 목에 걸린 생선가시 같던 때가 분명 있었는데 말이죠.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나요?
님 말대로 글쎄 이 풍진 세상에 내 몫이 있다는 것만도 어딥니까요?
횡재한 거 같은 생각이 들 때가 가끔 있어요.

치니 2007-02-26 08: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많은 오역의 홍수에서 느긋하게 비켜나와 원문으로 이런 책 읽으시니, 부럽습니다, 흑.
 

우리 집은 삼돌이나 나나 먹을 것을 무척 밝히는 편이다. 밥 먹을 때에도 네 접시에 음식이 더 많네, 내 접시에 음식이 더 적네, 하고 매일 싸우는데 삼돌이는 그럴 때마다 너랑 나는 사이즈가 다른데 어떻게 똑같이 먹으려고 하냐, 하면서 분통을 터트린다.

아니, 밥 먹을 때 말고는 항상 내가 더 뚱뚱하다면서 어떻게 그렇게 식사 때만 입장이 확 바뀌나?

식사를 하고 나면 그걸로 또 끝나는 게 아니고, 이번에는?단 것을 가지고 경쟁을 해야 한다. 여기서도 또 삼돌이와 나의 스타일의 차이가 크기 때문이다. 아이스크림이나 과자 같은 것을 삼돌이는 하루에서 이틀 사이에 한꺼번에 해치우는 스타일이다. 그래서 장 보러 가서 달달한 것을 사오면 이틀이면 전부 동이 나고 만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두고두고 조금씩 먹으면서 스트레스가 쌓이거나 울적해지거나 하는 혹간의?비상시에 대비하는---비상시에는 집에 있는 단 것이란 단 것은 전부 먹어치워야 하므로 평소에 다 먹어버리면 큰 일 난다---나와 삼돌이 사이에 단 것에 관한 한 평화가 있을 수 없다. 나는 맛만 한 번 본 것이 다음 날 흔적도 없이 삼돌이의 뱃 속으로 사라져버리는 경우가 태반이기 때문이다.

허나 먹는 문제에 관한 한 먼저 먹는 사람이 무조건 이긴다는 것이 진리라, 내가 아무리 불평불만을 한들 삼돌이의 버릇이 고쳐질 리 만무하다. 삼돌이의 명대사는 무조건, 아쉬우면 없어지기 전에 먹어라.

결국 세 살 버릇 여든 가고 제 버릇 남 못 준다고, 나는 좋아하는 과자를 몰래 사서 옷장에 숨겨 놓고 삼돌이가 안 볼 때마다 하나씩 먹기 시작했다. 원래 좋아하는 과자라도 몰래 먹으면 더 꿀맛이다. 삼돌이가 모르는 데 숨겨 놓았으니 하나씩만 먹으면 한 상자도 오래 간다. 장 보고 이틀 후면 단 것이 다 떨어진 집에서 혼자 과자 먹는 그 쾌감과 만족!

다만 단점이 있다면 제 집 한 가운데서 몰래 숨어 과자를 먹는 상태가 된 스스로에 대한 한심함이라고 할 수 있겠다. 내가 커서 이런 어른이 되다니, 어린 시절의 나에게 부끄러울 지경이었다.

번민과 자책으로 시절을 보내던 어느 날 직장에서 우연히 발견한 진리.

남들도 다 자기 집에?나홀로용 과자만 몰래 숨겨 놓는 자리가 있다는 사실!!!

아줌마 사서들이 모여서 수다를 떠는데, 누구는 부엌 찬장 구석에 식구들 아무도 모르게 초콜렛을 숨겨 놓고 먹는다고 하고, 누구는 옷장 서랍 아래에다 쿠키를 은닉하며, 누구는 세탁실 선반 뒤에 단 것을 감추어둔다는 소리가 꽤 떨어진 내 책상 자리까지 쩌렁쩌렁하게 다 들리는 게 아닌가.

그러니까 식구들 몰래 집안 구석에 과자를 숨기는 것은 남들도 다 하는 일상사였던 것이다. 그러게 부끄러울 일도 하나 아니건만 그 동안 괜히 쓸 데 없이 왠 고민은 그렇게 했담!

아는 것이 힘이다.

그 날 저녁 나는 과자를 두 박스 더 사 가지고 (이보다 더 사면 가방이 불룩해져서 표난다) 삼돌이가 부엌에서 요리하는 동안 옷장 속의 배낭에다가 과자를 숨겼다. 이렇게 든든하고 게다가 떳떳하기까지 할 수가! 그런데 해리가 자꾸 옷장에 눈길을 주는 것이 아무래도 녀석은 아는 것이다, 나의 비밀을.

어쨌거나, 이렇게 해서 나는 깨달았다. 부부 사이에도 자식 간에도?양보할 수 없는 단?것에의 권리가 있다는 사실을.그런데 삼돌이도 나 몰래 숨겨 놓은 단 것이 있는지 은근히 궁금해지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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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니 2007-02-24 1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단 것을 무척 안 좋아하는 편인데도, 말씀마따나 우울하고 피곤할 때 한 쪽 먹으려고 초콜렛 등을 두고 있는데 어뜬 사람이 낼름 내 책상에서 집어가면 신경질 나던데... 매번 그러면 숨겨놓는건 너무 당연한거 같아요 ㅋㅋ 그나저나 맨날 이런 페이퍼 써주세요, 너무 재미납니당.

BRINY 2007-02-24 1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저 어릴 때 삼남매 사이에서 자라면서 이미 마스터한 기술입니다.

검둥개 2007-02-25 15: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치니님 사무실엔 그런 사람이 꼭 하나씩 있어요. 그죠? ^^

BRINY님, 앗, 핵심을 찌르시는군요. 맨날 형제들과 먹을 것 가지고 싸우면서 커서 이렇게 됐나봐요.
 

새해 들어서 첫 사건은 정든 동네 미장원 아줌마 소피아가 소리소문 없이 사라진 것이었다. 머리를 자르러 갔더니 무슨 사연인지 소피아 아줌마가 글쎄 더 이상 그 미장원에서 일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닌가. 흑흑. 요즘 같은 세상에 단돈 만원에 머리를 자를 수 있는 곳은 그 곳 뿐이었는데. 하늘이 무너져도 그렇지 이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갑자기 어린 시절 다니던 주산학원 선생님과 경리가 밤새 학원 돈을 전부 싸들고 도망갔던 그 쎈세이셔널한 기억이 뇌리를 스쳤다. 글쎄 주산학원 선생님은 엄연히 마누라와 자식도 있는 사람이었는데! 설마 소피아 아줌마도 그런 까닭으로 이 동네를 뜨신 것은 아니겠지만. 혹여라도 그랬다면 도대체 무슨 사연이길래.

아픈 마음을 안고 어쩔 수 없이 집에서 좀더 가까운 미용실에 갔다. 이 곳은 아무래도 훨씬 깨끗하고 고객 중에 여인들도 많이 보이는 것이 시설과 기술 면에서 한 단계 위인 듯, 헤어살롱 수준은 아니라도 확실히 미용실 수준은 되는 것 같았다. 삼돌이가 머리에 까치둥우리가 났다고 놀려도, 소피아 아줌마를 잃은 상심에다 원래의 미장원 무섬증이 겹쳐서 꼼짝 않고 있었는데, 슬슬 날씨도 풀리고 도저히 더 이상은 버티기 힘든 지경에 이르렀다. 쇼트컷이 어깨에 닿도록 오만가지 방향에 길이로 삐뚤빼뚤 자란 꼴이 내가 봐도 가관은 가관이었다.

이 미용실 아줌마는 86년에 미국에 와서 미용기술을 배웠다는데, 목소리는 화통을 삶아먹은 것 같이 요란하고, 성격은 명랑함이 에이 플러스, 화장한 눈매는 부리부리하다. 동포 만나 반가워, 예절을 차리고 격식을 따져 정중하게 인사부터, 뭐 이런 도입부 같은 건 생략하고, 신상소개부터 현재 가정형편, 교육정도, 살림살이까지 아줌마가 머리에 물 적시는 십분 내에 다 불어야 한다. 그리고 그 다음부터는 아줌마의 일사천리로 이어지는 이야기를 묵묵히 들어야 한다. 괜히 맞장구를 치려고 하다가는 말 끊는다고 되려 눈치 먹는다.

이 미용실에 단 한 번 온 적이 있었다. 취직 인터뷰가 코 앞에 닥쳤는데 소피아 아줌마가 긴 휴가를 갔던 작년 여름이었다. 그게 소피아 아줌마에게 받는 마지막 헤어컷이 될 줄이야. 그 때 어리벙벙하게 들어서서 무조건 짧게 짤라 달라고 하는 나의 후진성을 기억하시는지, 미용실 아줌마가 이번에는 아주 순순히 짧게 짤라 주신다. 젊어서는 보스턴 시내의 유명 헤어살롱에서 일했다는 이 아줌마는 지난 번에는 짧은 머리형이 수백가지도 더 되는데 무슨 모양을 원하느냐고 나를 달달 볶아서 내 두 손 두 발을 다 들게 만들었었다. 아줌마 보기에 좋게 짤라주세요, 가 정답이었다.

이십년 머리를 자른 노련한 프로답게 아줌마는 이번에는 헤어스탈이나 최신 화장법, 피부관리법, 이런 내 얼굴만 봐도 딱 거리가 먼 화제거리는 애초부터 피하고, 대신 지구온난화 때문에 지금 알라스카의 백곰들이 다 죽어가고 있다는 둥 그것 때문에 지금 미국이 난리라는 둥 믿거나 말거나 뉴스로 나의 관심을 확 끌어댕긴다.

그러면서 내 머리카락이 엄청 곱다는 등, 얼굴도 길어 좋다는 둥, 한없이 부풀리는 게 어디까지 가나 했더니 머리 말리는 막판엔 결국 내가 미인이라는 데까지 왔다. 여기서는 아줌마도 단골 만들려고 빈 말 붙이는 데 좀 힘이 부치는 태가 나는 것 같기는 했다. 참, 그렇다고 내가 나서서 도와줄 수도 없고!

어쨌거나 나처럼 미장원 무섬증에 들린 사람까지도 희죽희죽 웃게 만드니 머리 자르는 장사 하나에는 정말 도가 튼 아줌마. 존경하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이 아무리 봐도 도저히 학생으로는 볼 수 없는 이 얼굴을 딱 마주하고도 서슴 없이 "학생이지? 그러니까 십퍼센트 깎아서 45불이야", 이러면서 할인까지 해주신다! (학생은 맞는데 야간대학생!) 45불이라는 거금을 내면서도 감읍해서 진짜로 목이 메일 지경이다. 내가 다른 곳도 아니고 미용실에서 미인 소리를 듣다니! 이 세상에 난 보람이 이보다 더 할 수가 없다.

모처럼 스타일리쉬한 미용실에서 머리 하고 왔다고 폼을 잡으면서 집에 돌아갔더니, 삼돌이는 길이가 충분히 짧지 않아서 금방 또 가야 되겠네, 거기는 머리값도 비싼데, 이러면서 미리 걱정까지 해준다. 엉뚱한 데서 기특하기는. 그나저나 이 헤어스탈로 또 반년을 울궈 먹어야 하는데 좀 길어져도 보기 흉하지 않게 해 달라고 한 요구가 얼마나 반영이 됐는지.

소피아 아줌마도 종적을 감추고 십불로 머리 자르는 시대도 막을 내렸으니, 이제부터는 어쩔 수 없이 동포 아줌마네 미용실에 가게 생겼다. 그래도 나이가 드니 이제 "젊은 여자가 좀 이쁘게 멋도 내고 그렇게 하고 다녀야지," 이런 훈계는 더 이상 안 들린다. 그건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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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7-02-22 15: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피아 아줌마 소식 알게 되면 페이퍼 올려주세요.
얼굴 예쁘다는 자랑도 가지가지.ㅋ
갈수록 지능화되는 경향이.=3=3=3

삼돌 씨랑 검둥개 님은 정말 찰떡궁합이네요.^^*



치니 2007-02-22 16: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헤 재미있어요. 머리 자른 미인 얼굴 보여주세요.

nada 2007-02-22 18: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무비님 저랑 똑같은 생각을.. 저도 오늘 머리 잘랐는데, 완전 몽실 언니 같아욤 -,-

paviana 2007-02-22 2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머리 자르기만 하는데 45불이라고요? 정말 비싸네요.
전 파마하는데 그정도 들어서 1년에 한번 할까말까로 버티는데.....

perky 2007-02-23 15: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피아미용실 없어져서 너무 아쉽겠어요. 파마한번 하는데 350불 들어서 저 기절하는 줄 알았잖아요. 무서워서 파마도 못하고, 한국갈때마다 한국에서 파마하고 옵니다. -_-;;

검둥개 2007-02-24 05: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지능화되는 거 좋은 거죠? 으히 :-)

치니님, 아니 미인이란 말을 진짜 믿으십니까요...!!! 헤헤

꽃양배추님, 저랑 같은 헤어스탈을 고르셨군요! ㅋㅋ

파비아나님 흠 무슨 종류의 파마를 하시는지 갑자기 너무 궁금해유~~

차우차우님, 정말 아쉬워요. 흑흑. 항상 미국에서 파마하는 데 얼마나 드나 궁금했는데 정말 비싸군요, 허거걱.
 

최근에 구독하기 시작한 유머 리스트 중에서:

옛날 옛적에 한 젊은이가 있었다. 혈기에 가득차서 그는 위대한 작가가 되고야 말겠다는 그의 야망을 고백했다. "위대함"을 정의해보라고 누가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전세계가 읽을 그런 작품을 쓰고 싶어요. 사람들의 감정을 진정 뒤흔들고 그들로 하여금 고통과 분노에 가득 차 비명을 지르고, 통곡하고, 으르렁거리게 할 만한 그런 작품을 쓰고 싶어요. "

 

 

 

 

 

 

 

 

 

 

 

 

 

현재 그는 마이크로소프트사에서 일하고 있다. 에러 메세지를 쓰는 것이 그의 직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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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2-22 01: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2-22 11: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검둥개 2007-02-22 1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1님 이거 웃겼어요? ^ ^ 안 웃길까봐 걱정했다는... 속삭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시와요.

속삭2님 아이, 제가 언제 모른 척을 했다고요 =3=3=3 가끔 몰래 들어가서 글 구경도 하고 그랬구만은... ^^ 모르셨지요? 제가 원래 수줍은 사람이라구요!

로드무비 2007-02-22 15: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러 메시집니까. 에로 메시집니까?^^*
 

올해는 겨울이 그다지 춥지도 않고 무난하게 지나가려나 했는데 막판에 폭설이 쏟아졌다. 한 번 온다 하면 십센티씩 쌓이는 뉴잉글랜드의 겨울이 나는 아직도 참 신기하다. 어렸을 적에 읽던 서양 동화책 삽화 속 겨울날은 항상 소복한 눈에 덮여 있었는데 한국에서 나고 자란 나는 그게 다 뻥이라고 생각했다. 생각해보니 그 이야기가 만들어진 동네에선 그게 진실이었던 것이다.

함박눈이 내려서 천지가 다 조용해지고 하애지고 화안해지는 게 보기 좋은 건 눈 내리는 몇 시간 동안 뿐이고 금새 길가는 소금에 모래에 흙에 눈 녹인다는 무슨 푸르스름한 화학물질이 한데 섞여 지저분한 회색의 진창이 되고 만다. 기회는 이 때다, 싶어 나는 작년 세일 때 사 둔 거대한 눈장화를 신고 해리를 데리고 동네 산책을 나가는데, 정작 신이 나야 할 개 녀석은 소금을 밟고는 발이 아프다고 쩔쩔매고, 눈장화 속의 내 엄지발가락은 십 분 밖에 안 걸었거만 벌써 축축해지기 시작한다. 이씨!

며칠 전이 발렌타인 데이였다. 내 앞에 앉아 근무하는 아줌마 책상으로 주먹만한 붉은 장미가 가득 꽂힌 꽃병이 아침 일찍 배달됐다. 불행히도 아줌마는 하루 종일 무슨 교육을 받으러 갔다가 퇴근 직전에야 사무실에 들렀다. 하루에도 대여섯번씩 전화하는 아줌마 남편의 선물임이 분명하다. 운도 참 억세게 좋으시지. 나는 남편한테 꽃다발은 고사하고 꽃송이 하나도 받아본 적이 없건만은. 하지만 내가 아줌마 나이가 되었을 때--오십?--남편이 직장으로 꽃다발을 보내고 하루에 다섯번씩 전화를 하면 난 그것도 어째 좀 징그러울 것 같다. 아무래도 난 아무개의 발렌타인이 되기엔 좀 여러 면에서 미달인가? 

발렌타인 데이에도 무사히 업무를 마치고 씩씩하게 귀가를 하니 아파트 문 앞에 내 하반신 길이만한 커다란 꽃박스가 놓여 있다. 장총 하나는 거뜬히 들어갈 길이다. 내 주변에 있으면 러브라이프가 쑥쑥 풀리게 되어 있나보군. 착한 이웃 같으면 꽃 박스를 들어서 코엔 양 문 앞에라도 놓아주겠지만 배가 너무 고픈 데다가 두 손은 우편물에 가방으로 다 차서 나는 힐끗 꽃박스만 훔쳐 보고 들어왔다.

그런데 그 꽃 박스가 발렌타인이 거의 일 주일은 지난 아직도 아파트 입구 문가에 놓여 있다. 코엔 양을 홀로 짝사랑하는 남성에게서 온 게 분명하다.  그렇다고 꽃박스가 무슨 잘못이람. 보다 못한 이웃 누군가가 꽃박스를 들어다가 이층의 코엔양 문 앞에 떡 놓았는데도 코엔양은 요 며칠 일체 바깥출입을 하지 않는지 박스는 움직이질 않는다. 코엔양 아무래도 꽃박스를 들어다 그대로 쓰레기통에 박을 심장은 안 되지만 꽃은 들여다보기도 싫을 정도로 그 남자가 맘에 안 드는 모양이다. 그러나저러나 박스 속의 그 꽃은 한 번 보여지지도 못하고 아파트 사람들의 궁금증만 더한 채 시드는 중이니 참 안되었다.

오늘 아침에도 해리를 아침 산책 시키려고 내려가면서 보니까 꽃상자엔 손이 닿은 흔적도 없다. 오랜만의 휴일인데 집청소하고 남의 꽃 걱정이나 하는 동안 금쪽같은 하루가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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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2-20 17: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인터라겐 2007-02-20 2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오랫만에 뵈어요.... 잘 지내고 계시지요??
코엔양이 꽃이 시들기 전에 볼 수 있으면 좋겠어요.. 그 꽃도 화원에서 자랄 땐 세상 사람 품에 안겨 사랑 받을 줄 알았을 텐데....

검둥개 2007-02-21 09: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님, 우와 축하합니다. 그 곳서 멋진 엽서라도 한 장 보내주실라나요? ^^ 중국 영화를 많이 봐서인지 되게 부럽습네다. 저두 한국서 가져온 장판을 정말 유용하게 쓰고 있어요. 어딜 가나 때수건과 전기장판은 필수품인가봐요. 이사 준비 잘 하시고 have a safe flight!

인터라겐님! 정말 오랜만이어요!!! 새해 복 많이 받으시구요. 오늘 보니까 꽃상자가 사라졌던데 코엔양이 어뜨케 처리를 했는지 궁금해요 ^^ 남의 꽃에 왜이리 관심이 가는지 헤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