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겨울이 그다지 춥지도 않고 무난하게 지나가려나 했는데 막판에 폭설이 쏟아졌다. 한 번 온다 하면 십센티씩 쌓이는 뉴잉글랜드의 겨울이 나는 아직도 참 신기하다. 어렸을 적에 읽던 서양 동화책 삽화 속 겨울날은 항상 소복한 눈에 덮여 있었는데 한국에서 나고 자란 나는 그게 다 뻥이라고 생각했다. 생각해보니 그 이야기가 만들어진 동네에선 그게 진실이었던 것이다.

함박눈이 내려서 천지가 다 조용해지고 하애지고 화안해지는 게 보기 좋은 건 눈 내리는 몇 시간 동안 뿐이고 금새 길가는 소금에 모래에 흙에 눈 녹인다는 무슨 푸르스름한 화학물질이 한데 섞여 지저분한 회색의 진창이 되고 만다. 기회는 이 때다, 싶어 나는 작년 세일 때 사 둔 거대한 눈장화를 신고 해리를 데리고 동네 산책을 나가는데, 정작 신이 나야 할 개 녀석은 소금을 밟고는 발이 아프다고 쩔쩔매고, 눈장화 속의 내 엄지발가락은 십 분 밖에 안 걸었거만 벌써 축축해지기 시작한다. 이씨!

며칠 전이 발렌타인 데이였다. 내 앞에 앉아 근무하는 아줌마 책상으로 주먹만한 붉은 장미가 가득 꽂힌 꽃병이 아침 일찍 배달됐다. 불행히도 아줌마는 하루 종일 무슨 교육을 받으러 갔다가 퇴근 직전에야 사무실에 들렀다. 하루에도 대여섯번씩 전화하는 아줌마 남편의 선물임이 분명하다. 운도 참 억세게 좋으시지. 나는 남편한테 꽃다발은 고사하고 꽃송이 하나도 받아본 적이 없건만은. 하지만 내가 아줌마 나이가 되었을 때--오십?--남편이 직장으로 꽃다발을 보내고 하루에 다섯번씩 전화를 하면 난 그것도 어째 좀 징그러울 것 같다. 아무래도 난 아무개의 발렌타인이 되기엔 좀 여러 면에서 미달인가? 

발렌타인 데이에도 무사히 업무를 마치고 씩씩하게 귀가를 하니 아파트 문 앞에 내 하반신 길이만한 커다란 꽃박스가 놓여 있다. 장총 하나는 거뜬히 들어갈 길이다. 내 주변에 있으면 러브라이프가 쑥쑥 풀리게 되어 있나보군. 착한 이웃 같으면 꽃 박스를 들어서 코엔 양 문 앞에라도 놓아주겠지만 배가 너무 고픈 데다가 두 손은 우편물에 가방으로 다 차서 나는 힐끗 꽃박스만 훔쳐 보고 들어왔다.

그런데 그 꽃 박스가 발렌타인이 거의 일 주일은 지난 아직도 아파트 입구 문가에 놓여 있다. 코엔 양을 홀로 짝사랑하는 남성에게서 온 게 분명하다.  그렇다고 꽃박스가 무슨 잘못이람. 보다 못한 이웃 누군가가 꽃박스를 들어다가 이층의 코엔양 문 앞에 떡 놓았는데도 코엔양은 요 며칠 일체 바깥출입을 하지 않는지 박스는 움직이질 않는다. 코엔양 아무래도 꽃박스를 들어다 그대로 쓰레기통에 박을 심장은 안 되지만 꽃은 들여다보기도 싫을 정도로 그 남자가 맘에 안 드는 모양이다. 그러나저러나 박스 속의 그 꽃은 한 번 보여지지도 못하고 아파트 사람들의 궁금증만 더한 채 시드는 중이니 참 안되었다.

오늘 아침에도 해리를 아침 산책 시키려고 내려가면서 보니까 꽃상자엔 손이 닿은 흔적도 없다. 오랜만의 휴일인데 집청소하고 남의 꽃 걱정이나 하는 동안 금쪽같은 하루가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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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2-20 17: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인터라겐 2007-02-20 2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오랫만에 뵈어요.... 잘 지내고 계시지요??
코엔양이 꽃이 시들기 전에 볼 수 있으면 좋겠어요.. 그 꽃도 화원에서 자랄 땐 세상 사람 품에 안겨 사랑 받을 줄 알았을 텐데....

검둥개 2007-02-21 09: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님, 우와 축하합니다. 그 곳서 멋진 엽서라도 한 장 보내주실라나요? ^^ 중국 영화를 많이 봐서인지 되게 부럽습네다. 저두 한국서 가져온 장판을 정말 유용하게 쓰고 있어요. 어딜 가나 때수건과 전기장판은 필수품인가봐요. 이사 준비 잘 하시고 have a safe flight!

인터라겐님! 정말 오랜만이어요!!! 새해 복 많이 받으시구요. 오늘 보니까 꽃상자가 사라졌던데 코엔양이 어뜨케 처리를 했는지 궁금해요 ^^ 남의 꽃에 왜이리 관심이 가는지 헤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