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3, 4학년쯤 되어 보이는 여학생이 물었다.
예의가 너무 바른 친구여서 기억에는 있는데, 내 머리가 나쁜지라 몇 학년인지, 그리고 이름이 뭔지 도통 기억할 수 없다.(용서해다오)


선생님은 무슨 색을 좋아하세요?

응? 노란색.

(매우 난처한 기색으로) 노란색 말고, 오렌지색이나 빨간색은 어떠세요?

(이때쯤은 다른 애들 대출해주느라 이미 시선도 거두고)응? 그럼 오렌지색.

그랬더니 10분쯤 후에, 오렌지색 색종이로 꽃을 한 송이 만들어왔다.

선생님, 선물이에요. 밖에 꽃이 많은데, 꺾어드릴 수는 없고, 제가 만들어서 드릴게요.

사소한 것에 목숨 걸며 감동하는 나는, 눈물이 왈칵 났다. 내가 나의 고마움을 표현할 새도 없이 그 친구는 뛰어가버렸다.

이 꽃을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 컴퓨터에 붙여 두었다. 사실, 구형 모니터에 다닥다닥 포스트잇이 붙어 있는 내 컴퓨터는 그 꽃의 적당한 위치가 아니었다. 6학년 도서부 아이들은 아주 난리다.

선생님, 촌스럽게 이게 뭐예요?

선생님 취미가 참 특이하시네요.

심지어는 보다 적극적으로 나선 아이들도 있다.

제가 더 예쁘게 만들어드릴게요. 제발 좀 떼세요. 저 이런 컴퓨터 앞에서는 도우미 못해요.

그래도 나는 꿋꿋이 붙여두고 있다. 언제까지? 그 친구가 볼 때까지.
그런데 그 이후로 일주일째 그 친구가 안 온다. 매일 오던 친구였는데... 어떻게 된 걸까. 내 반응이 신통치 않았을까? 조금만 더 기다리다가 TV는 사랑을 싣고 이런 데 나가야 하는 건 아닌가 모르겠다.

내가 이렇게 선물에 목숨을 거는 걸 알아버렸는지, 어제 또 선물을 받았다. 
지난 2월 졸업하고 중학생이 된 친구에게서였다. 부활절이라고 달걀을 이쁘게, 아주 이쁘게 만들어왔다.
은박지로 달걀을 포장해서 바구니 모양을 만들고, 거기에 예쁜 꽃과 리본을 붙였는데, 도대체 아기자기한 것이나 예쁜 것과는 거리가 먼 나는 또 감동하고 말았다. 잠시 교무실에 다녀와 보니 벌써 다녀가 버렸다는데, 게으른 나는 연락도 못하고 있다.

또 있다.
금방 6학년 한 여학생이 수줍게 내밀고 간 편지.
민들레와 꽃 줄기로 만든 편지인데, 글씨는 딱 일곱 자,

선 생 님 사 랑 해 요

난 지금까지 선생님들이 어떤 아이를 편애하는 것을 교사의 자질 운운하며 손가락질했었다. 그런데 이제 조금은 이해가 가려고 한다.
점수를 주는 담임교사가 아니면 도무지 말을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 아이들 속에서 날 이렇게 좋아해주고 따르는 친구들을 내가 어찌 좋아하지 않으랴. 선물이나 밝히는 속물이라고? 할 수 없다. 내 본성이 그런 걸, 나한테 어쩌란 말이냐.

교무실에서, 아침부터 참 기운 빠지는 일이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날 무시하고 깔아뭉게는 한 부장 앞에서, 확 받아버리고 싶은 걸 우아한 내가 참자고 꾹꾹 눌러 참고 올라오는 길이었다. 그런데 이 친구들로 인해 나는 또 기운을 얻는다.

그래, 내가 언제 선생님들께 잘 보이려고 시작한 일이었더냐.
오늘 하루도 신나게 놀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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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oninara 2004-04-13 19: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힘내세요!!!!!
너무 예쁜 아이들이네요..아이들에게 너무 좋은 선생님이신것 같아요..척 보면 안다니까요..

다연엉가 2004-04-13 19: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난 호랑녀님과 같은 선생님이 많이 계셨으면 좋겠네요.....

호랑녀 2004-04-14 08: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실 요즘 많이 힘들었거든요. 도서실 창밖을 내려다보다 그냥 뛰어내리면 어떻게 될까 생각하기도 하고...(그럼 비정규직 노동자가 처우개선을 요구하며 투신자살... 이러면서 신문에 날라나? ^^)
그런데 애들을 보면서 많이 위로됩니다. (왜 학교에서 보는 애들은 이렇게 이쁜데, 우리집 애들은 안 이쁜 거야... 나 엄마 맞을까?)
저같은 선생님이 많으면 안됩니다요. 부끄러워서 말을 못해서 그렇지, 해야 할 일은 하나도 안하고, 새 일 찾는 데만 열중인 저같은 사람은... 많아지면 안됩니다. 지금 도서실... 심난합니다. 책이 제대로 정리되어 있지도 않아서요...
 

학교도서관에서 학부모도우미의 역할은 사서교사보다 훨씬 더 많고 중요하다.

내가 아는 한 초등학교에서는 도서실의 학부모도우미들이 팀을 짜서 한 달에 한 번씩 인형극도 공연해주고, 매주 그림책도 읽어주고, 도서실에 구비할 책도 직접 고른다.

그 학교는 일단 목록으로 고른 책을 대형서점에 가서 직접 읽어보고 편집이나 삽화 같은 것들까지 꼼꼼하게 살핀다고 한다.

우리학교의 학부모도우미들도 정말 훌륭한 분들이 많다(아니 많았다). 어린이도서연구회나 이런저런 단체들, 대학의 평생교육원 같은 교육기관에서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손으로 꼽을 수도 없고, 어린이도서연구회에서 책을 선정하는 일을 하는 엄마도 있다.
심지어는 큰 대학도서관에서 십여 년을 근무한 엄마도 있고, 사서교사 경력이 십수 년인 엄마도 있으니, 경력 2년째인 나는 명함도 내밀지 못한다.

그런 엄마들 앞에서 지난 해, 새로 부임한 교장선생님이 말했다.

엄마들이 선생님보다 더 잘 압니까? 도서실 책 선정은 선생님이 합니다.
(그래서? 이상한 출판사의 책을 똑같은 책으로 50권씩 들여다 놓았고, 나는 그 책 캐비넷 위에 쌓아두었다.)

도서바자회의 목적은 돈을 버는 겁니다.(아이들에게 좋은 책을 직접 고르게 하는 것이 목적이어야 한다는 엄마들에게)

아니, 우리 도우미들도 출판사 로비나 받는 그런 단체 사람들이라니 큰일 아닙니까?(어린이도서연구회의 책들은 출판사 로비 받아 선정한다는 도서바자회업자의 말에)

결국 도서도우미들은 교장선생님이 하시는 일마다 딴지를 거는 몹쓸 인간들이 되어버렸고, 올해는 아예 뽑지 않았다. 교장선생님이 뽑지 않으신다니 난 그냥 깨갱~
(작년의 도서도우미들은 학교운영위원회에 진출했다. 학교도서실 활성화가 공약이었고, 최다득표로 당선되었다.)

그래도 올해 도서실은 해야 할 행사가 많다. 돈을 벌 도서바자회도 해야 하고, 수천만원의 예산으로 리모델링을 해서 이전도 해야 한다.
그래서 교장선생님이 내놓으신 비장의 카드는, 어머니회에 도서발전위원분과(딴지 하나. 도서 발전? 여기가 출판사냐? 책을 발전시키게.)를 둔 것. 70여 명의 도서도우미들이 10명으로 팍 줄었다.

사서교사인 나는 10명의 도우미를 뽑겠다는 말도, 뽑았다는 말도, 그리고 그 명단도 '공식적으로' 들은 바는 없다. 비공식 루트로 전해들었을 뿐이다.

그런데 어제, 도서발전위원분과장을 맡은 한 엄마가 전화를 하고 찾아오셨다. 자리를 주었으면 일을 시켜야지, 왜 아무런 얘기가 없느냐고. 무슨 일을 하면 되느냐고.
자신들은 리모델링을 위해 다른 학교에도 가 보고, 아이들에게 그림책도 읽어주고, '도서실' 발전을 위해 힘껏 노력할 준비가 되어 있단다. 작년에 70명이나 되는 엄마들보다 10명이니 소수정예로 더 열심히 할 수 있단다!

그리고 심지어는, 작년 같은 그런 도서바자회라면 자신들은 하지 않겠단다! - 빙고

올해도 쉽진 않겠다. 지금도 서너 시간의 운영위원회 혈전이 끝나면 바로

'도대체 운영위원들에게 무슨 얘길 한 거예욧!'

라고 인터폰하는 우리 교장선생님, 도서발전위원들까지 한몫 거들면 그 불똥은 다 나한테 튀겠지. 에이고, 내 팔자야.

그런데 왜 이렇게 웃음이 나오는지 모르겠다. 겔겔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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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우맘 2004-04-08 1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랑녀님 학교는, 아무리 봐도 좀 심합니다. -.- 그 교장 선생님, 요즘 같은 시대에 뭘 믿고 그러시는지....안스럽기까지 하네요.
여하간, 오늘도 내일도 화이팅~!!!!

호랑녀 2004-04-08 1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마나 들볶으면, 여자선생님들이 단체로 애를 가졌다는... 웃지못할 전설이...ㅋㅋ 있답니다.
(올 가을에 우리학교 여러 분의 기간제교사가 필요합니다)

다연엉가 2004-04-08 1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심하군요. 학교에 책읽어주러 가면 심지어 선생님 권한에 침범(?)한다고
세일즈맨 취급하는 학교도 있다고 하더군요...난 내 아이에게 좋다고 읽어주는 것이 딴 아이들한테도 읽어주고 싶어 환장한 여편넨데....

호랑녀 2004-04-08 1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학교는 1학년 어떤 반에서 선생님과 한 엄마가 의기투합하셔서 매주 책 읽어주기를 한다고 합니다. 그림책도 한 100권쯤 사다 놓구요.
그런가 하면 또 어떤 선생님(다행히 우리학교는 아닙니다만)은 역시 1학년 담임이신데, 그림책이 책마다 사이즈가 달라서 보기 싫다고 전집으로 사다 놓으라고! 했다더군요...
(요즘은 전집도 아이들이 싫증낸다고 다양한 사이즈로 나오는데 말예요.)

sooninara 2004-04-13 19: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학교 운영위원회에 들어갔는데..처음 회의에서 분위기 파악 못하고 이것 저것 물어보고..불만사항 이야기했다가..눈치를 엄청 받았어요..그학교는 그래도 몇시간 회의라도 하나봐요..우리학교는 손들고 거수기 노릇하길 바라는듯하네요..그래도..열심히 해봐야죠^^

호랑녀 2004-04-14 09: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희 학교도 작년에 그랬답니다. 오죽하면 운영위원들 별명이 '입안의 혀'였답니다. 교장선생님 입 안의 혀처럼 군다구요.
올해는 참교육학부모회 엄마들이 작정하고 나서서 이렇게 되었는데, 또 다른 엄마들이 있습니다. 학교쪽에서야 그냥 거수기 해주면 편하겠지요. 그런데 그러려면 뭐하러 바쁜 시간 쪼개서 가겠습니까?
 

날씨가 따뜻해지고, 봄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온다.

하, 벌써 4월이다.

학교다닐 때는 중간고사 운운하며 4월은 잔인한 달이라고 노래를 불렀지만, 4월 참 좋다. 책 읽기도 좋고, 식목일에 개교기념일, 그리고 국회의원도 뽑아야 하니 쉬는 날이 많아서 더 좋다.(물론 일용직인 나는 출혈이 크지만.)

하루종일 히터를 틀어야 했던 볕 안 드는 4층 구석의 도서실도 오늘은 아침부터 유리창을 열어 두었다. 살랑살랑 코끝을 간질이는 바람이 참 기분 좋다.

4월은 과학의 달이다. 그래서 학교마다 과학행사가 있다.

며칠 전, 과학부장님이 공문 비슷하게 생긴 걸 들고 내려오셨다. 그 중 맨 마지막장을 북~ 뜯어 주시면서, 이 책들이 도서실에 있는지 찾아달라고 하신다. 과학도서 읽고 독후감을 받으려고 하신단다. 학년별로 3권씩 선정도서가 있었다.

어? 출판사가 없는데, 괜히 냄새가 좀 수상하다. 여기저기서 좋은 책이라고 귀동냥했던 책들은 단 한 권도 없고, 전부 같은 출판사이다.

다행히 우리 도서실에 두 종류의 책이 있다. 읽어보았다.

맙소사. 이건 책이 아니다. 각종 오역에 오자에 어법에 안맞는 문투는 두 번째로 하자.

내용중에 지구를 지켜야 하는 한 비밀요원 때문에 아무 관계도 없는 맥주집 여종업원이 잡혀온다. 직접 고문해봐야 단련된 사람일 터이니, 한번 들러 술을 마셨던 맥주집 여종업원을 옆에서 고문해서 불게 하려는 의도이다.

그런데 입을 꼭 다물고 있으니 알몸으로 데려온 여종업원의 손목을 잘라서 피를 플라스틱 컵에 받고 죽인다. 그래도 우리의 주인공은 전 인류를 지켜야 하기 때문에 꾹! 참는다.

이게 아이들이 읽어야 할 동화라구? 것도 3학년이? 내 아들이?

책을 덮으려다 보니 책 맨 뒷표지에 나온 책소개는 더욱 가관이다. 조우랑 게일은 달나라에 남아서 행복하게 살았댄다. 허, 그 둘 죽었다. 지구를 지키기 위해 폭사했다. 게다가 우리편인 노부부 운운하는데, 그 책 어디에도 늙었건 젊었건 부부는 없다.

하마터면 이 책을 아이들에게 읽힐 뻔했다. 아니, 다섯 권이나 꽂아두고 있었다. 아이들에게 빌리라고.

사서교사가 맨날 알라딘을 드나들면서 서재폐인이 되어가는 동안, 우리 애들은 도서실에서 그런 책을 읽는단다. 자책한다! 반성한다!

더 속상한 건, 그런 책이 하마터면 3학년 전체가 읽고 독후감을 써야 할 뻔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무성의 무책임으로 책을 만들어두고, 교육청이나 학교에 로비만 하면 되는가. 그렇게 먹고들 사나보다. 정말 너무나 속상했다.

이런 거 어디 고발할 수 없나? 아이들의 영혼을 좀먹는 그런 책을 만드는 사람은 도둑질을 한 사람보다 더욱 심한 벌을 받아야 하는 건 아닌가? 이거, 정말 범죄행위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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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우맘 2004-04-01 13: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치/겠/네.
이 글이, 호랑녀님의 만우절 기념 픽션이라면 좋겠습니다. TT

▶◀소굼 2004-04-01 14: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선정한 사람이 누군지-_-;그 출판사와 모종의 계약이 있는 건 아닐지 의심까지 되는군요

호랑녀 2004-04-02 09: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후후, 만우절 기념 픽션이요? 그럼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만우절이 하루 지난 오늘도 그 책은 제 뒤 캐비넷에 꽁꽁 숨어 있습니다.
그리고 학교 운영위가 끝난 후 교장은 저를 닥달하고 있습니다. 운영위원들한테 쓸데없는 말 하지 말라고... 으이그, 귀신은 뭐하나 몰라. 저런 몹쓸 인간 안 잡아가고.
혹시 자기네 나라 오염될까봐 안 데려가나?

다연엉가 2004-04-08 1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학교에서 방학때만 되면 권해주는 권장도서는 제가 좀 나쁜X라서 그런지
저는 오자마자 뿍뿍 찢어버립니다.
그리고 가감히 다른 독후감을 써 갑니다.
저 잘했죠?

호랑녀 2004-04-08 14: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울타리님, 나쁜 X가 아니라 현명한 분이시죠 ^^
세상은 넓고 읽은 책도 많은데, 왜 꼭 그런 책들인지... 참...

조선인 2004-04-11 18: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헛, 세상에 그런 일도 있습니까? 아직 우리딸은 3살밖에 되지 않았지만, 조카들의 책꽂이를 다시 한번 뒤져봐야겠습니다.

호랑녀 2004-04-14 09: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 선인님, 언제 다녀가셨나요.
조카들의 책꽂이야 엄마 아빠가 사 주셨을테니 그런 책 아니겠지요. 학교가 문제랍니다. 여러 곳에서 기증받은 책들인 것 같은데, 기증하는 사람들이, 그냥 출판사 로비받고 한 게 아닌가 싶어요. 영수증은 정가대로 끊어주고, 실제로는 할인받아 착복하고...(하하, 소설입니다만.)
 
뢰제의 나라 푸른도서관 1
강숙인 지음 / 푸른책들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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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인가, 아이들에게 읽으라고 사 준 책은 내가 잘 읽지 않게 되었다. 굳이 변명을 하자면, 내 책 읽기도 바빠서였을까?

한참 역사에 관심이 있어하는 아들놈의 관심이 옆길로 새기 전에(요즘은 곳곳에 유혹하는 만화책들이 너무나 많아서), 서둘러 책 몇 권을 사주었다. 집에 온 책 읽지도 않는 엄마가 서점에 가서 책을 일일이 사줄 리는 없어서, 대강 알라딘에서 책소개를 보고 몇 권 골라주었다.

강숙인의 뢰제의 나라는 그렇게 우리집에 왔다. 그러나 아이의 관심도 엄마의 관심도 받지 못한 채 책꽂이 한구석에 작은 몸을 웅크리고 서있을 뿐이었다.

며칠 전, 학교에서 도저히 책이라고 할 수 없는 걸 읽고 분노에 차서 출판사에 편지까지 쓴 후, 집에 와서 잡은 책이 뢰제의 나라였다. 일단 표지 그림이 정말 좋았고, 오랜만에 아이보다 먼저 아이의 책을 읽는 기분도 좋았다.

그러나 책을 잡자마자 나는 그 속에 빠져들었다. 아이들을 다 내팽개친 채, 그 책이 내 손에서 끝날 때까지 꼼짝도 안 하고 책을 읽었다.

뢰제의 나라는 사후의 세계이다. 찢어진 청바지에 머리를 노랗게 물들인 저승사자가 다함이를 실수로 데려간다. 그러나 하필 다함이가 간 그곳은 탄핵정국(?)이다. 옥황상제인 뢰제를 네 명의 대제가 힘으로 죽이고, 그 혼까지 가둬버린 것이다. 잘못 갔으니 그냥 돌아오면 되는 걸, 다함이는 그 속에 휩쓸린다.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 없이 거대한 소용돌이에 휩쓸리게 되는 건 우리가 사는 세상이나 다를 바가 없다.

다함이는 뢰제의 아들인 천랑을 도와서 뢰제의 혼을 구한다. 자신이 뢰제의 아들인 줄 모른 채, 항상 앞장서고 자신을 희생하면서 의 를 지키는 천랑, 자신들의 신성을 빼앗긴 채 야수로 변해 있었던 백호, 현무, 청룡, 주작. 이들에게 신성을 되찾아주는 천랑과 다함, 그리고 운백.

세상으로 돌아온 다함이는 아마 살아가는 내내 자신의 본성을 잃어버리지는 않을 것 같다.

그럼 다함이를 따라 다함이가 보고 느낀 것을 똑같이 보고 느꼈던 나는. 나는 나의 본성을 잃어버리고 살진 않는지 생각해 본다.

'나'를 항상 중심에 놓고 살다 보니, 정작 나의 본성은 잃어버린 채, 다른 사람의 눈으로 내 행동의 잣대를 삼지는 않았나, 아이들에게 다른 사람이 만들어놓은 잣대에 맞춰 살도록 강요하지는 않았나.

작가가 우리나라 선도의 경전인 옥추보경을 공부한 후에 쓴 책이어서일까? 책을 덮고 보니 머리가 맑아지고 마음이 차분해진다.

책이란 무릇 이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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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성림 2004-12-05 04: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지요. 책이란 무릇 이래야지요. 오랫만에 우리의 제대로 된 판타지를 즐겁게 보았습니다.
 
우주의 전사
전욱수 / 한국독서지도회(관일미디어) / 199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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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상과학문고 '우주의 전사'를 읽고 한국독서지도회에 드립니다.
(쓰다 보니 길어졌는데, 그래도 꼭 끝까지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세 아이를 둔 엄마이자 경기도 일산의 한 초등학교에서 사서교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4월 과학의 달을 맞아, 과학도서독후감대회를 한다는 얘길 하시면서 과학부장님이 공문의 한 페이지를 보여주셨습니다. 제가 본 페이지는 학년별로 세 권씩 과학 추천도서가 있었는데, 우리 도서실에 그 책이 있는지 여부를 물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찾은 책이 바로 귀 출판사의 <우주의 전사>였습니다.

처음 표지를 봤을 때부터 조금 의아했는데, 전욱수 님이 엮었다는 얘기만 있지 저자가 누구인 줄은 밝히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뒤이어 나온 화보들은 (비록 조금 오래된 듯했지만) 주거지형 우주도시나 구형 우주도시 같은,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내용이 보였습니다. 저도 호기심이 일어서 처음부터 읽어 보았지요.(끝까지 읽어봐도 사진과 관계된 내용은 거의 없었습니다.)


머리말을 보니 '어린이 여러분의 미래를 향한 과학에 깊은 관심과 흥미를 싹 틔우고자 하여 미래 과학 문고를 출판하게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책을 쓰시는 데는 유명한 아동문학가, 교육자, 그리고 과학자 여러분이 참여하였'다고 하셨습니다. 과학동화에 대해서는 영 문외한인 저도 큰 기대를 갖고 읽기 시작했답니다.
그러나 책을 다 읽고 나서, 이 책을 쓰시는 데 참여하셨다는 유명한 아동문학가와 교육자와 과학자 여러분이 누구신지 무척 궁금해졌습니다.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수상한 사나이, 애브너이기도 했다가 기리어드 대위이기도 한 사나이 하나가 달나라로부터 옵니다. 그리고 호텔로 가는데, 호텔의 '인객꾼'이 그를 잡아끕니다.
인객꾼... 사전을 찾아봐도 나오지 않은 말입니다. 아마 호객(呼客)행위를 하는 사람을 얘기하는 듯한데...

좀 읽다가 또 걸리는 부분이 나옵니다.
'그런데 물 속에 들어가 열 살이나 젊어진 기분으로 있다가 한참만에 나와 보니, 겉옷도 내의도 죄다 없어지고 말았다.'
좀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나요? 아마 매끄럽지 못하게 번역한 문장이어서 그럴 거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중간에 낀 말이 너무 많다 보니 어색하게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열 살 젊어진다? 10년 젊어진다?

그 다음 페이지에는 적의 힘을 너무 얕보고 있은 것이다'라고도 나오네요. '있었던'이든지, 아니면 '있는'이 맞겠지요?

(여기까지 쓰다가 잠시 궁금해졌습니다. 어쩌면 이 책은 초판이니까 그럴지 모른다. 어쩌면 내용을 손질해서 재판을 찍었을지 모른다.
그래서 편집부에 전화를 해서 확인했습니다. 표지는 바뀌었지만, 같은 책이라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계속 편지를 씁니다.)

그는 호텔에서 자신의 '두목'에게 다이얼을 돌립니다. 어쩌면 'boss'라는 말을 이렇게 해석하지 않았을까 생각했습니다. 나중에 보니 이 사람은 FBI의 요원이더군요. 그리고 그가 전화를 하려고 했던 사람은 국장입니다. '두목'은 아무리 생각해도 좀 심한 해석이 아닐까 싶습니다. 마치 마피아나 조폭 같은 뉘앙스를 풍기지 않습니까?

'그는 두목에게 직접이 아니라 중계하는 곳의 다이얼을 돌렸다' 어색하지요? '직접 전화하지 않고, 교환원에게 전화했다' 쯤이 좀 덜 어색할 것 같습니다.
이런 구절도 있네요.
'전연 엉터리다.'
전연이라 함은 전혀, 조금도... 이런 뜻이겠지요? 조금도 엉터리다? 좀 이상하지 않나요? 차라리 그냥 엉터리이다라고만 하시지요.

이 정도는 그냥 거슬리는 정도에 불과했습니다. 신경 좀 쓰시지...하는 정도로요. 그런데 거의 경악을 금치 못할 만한 장면이 나왔습니다.

'그'에게 자백을 받기 위해 적들이 하는 행동 중 하나입니다.
그가 맥주를 마셨던 맥주집의 여종업원을 데리고 와서 그를 위협하는 장면이지요.
'아가씨는 거의 알몸이다시피 옷이 벗겨 있었다.'
옷이 벗겨 있었는지 벗겨져 있었는지는 두 번째 문제로 하지요. 그 장면의 컷에는 제복을 입은 두 남자가 한 여자를 끌고 나오는데, 그 여자의 상반신에는 옷이 하나도 없습니다. 바스트포인트까지 적나라하게 보이지요. 그리고 가슴 밑부터 허벅지까지는 다른 사람에 가려져서 보이지 않지만, 그 밑으로, 그러니까 허벅지부터 발까지는 역시 아무 것도 없습니다. 양말도 신발도 없습니다.
'그'가 사실대로 말하지 않자 적들은 그 아가씨, 아무런 상관도 없는 그 아가씨의 손목을 자르고 미리 준비해 둔 플라스틱 깔때기로 피를 받습니다. 그 아가씨는 그냥 죽어버리지요.
'그가 지키려고 하는 마이크로필름의 튜브에는 몇 억이라는 인류의 생명이 걸려 있는 것이다. 그것에 비한다면 이 아가씨 한 사람의 생명쯤은 문제가 되지 않으며, 그 때문에 함부로 행동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라고 그 다음 문장이 나와 있네요.
이게 아이들이 읽을 동화가 맞습니까? 아이들이 읽어야 할 동화에 이런 문장이 과연 되겠습니까? 인류 전체를 구하기 위해서는 자신 때문에 잔인하게 죽어가는 아가씨 한 사람의 생명쯤은 문제가 되지 않나요?
이것이 아이들이 읽는 동화란 말입니까?

헤어지면서 '또다시' 라고 인사를 한다거나(아마 see you later!의 해석인 모양이죠?), '죽음'을 당하거나(단순한 실수가 아닙니다. 반복되어 여러 번 나오는 걸 보면), 앞뒤 연결이 안 되는 이상한 문장들이 끼어 있는 책을 아이들에게 읽힐 생각을 하니 참 암담했습니다.
지금까지 무려 5권이나 되는 책이 도서실에 있었는데, 내용도 모르고 버젓이 끼워 둔 제 자신도 자책하게 됩니다.

책의 맨 뒤에 보니 로버트 하인라인 이라는 작가 소개가 나오네요. '우주의 용사들'이라는 책의 주인공에 대한 능력 설명이 나오는데, 아마 이 책 '우주의 전사'를 뜻하겠지요?
이 부분은 아예 한번 쓰고 다시 읽어보지도 않으신 모양입니다.

'작자 하인라인은 인간은 반드시 진보하며, 그러한 힘을 몸에 지닌다. 단 그 때에 초인들은 그 힘을 올바른 데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 힘에는 힘, 눈에는 눈으로 맞서고, 정의를, 우리 지구를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 그 때문에 귀중한 것은 젊은 사람은 예의를 지키고, 엄격한 규율을 지키는 일입니다. 또 나쁜 일을 한 사람에게는 벌을 가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한 문단을 그대로 옮긴 것입니다. ~다 와 ~입니다 가 혼용되어 있는 데다 내용도 도대체 뭔 소린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옮겨 둔 한 문단만 그러는 게 아니라 마지막까지 전체가 다 그렇습니다.

또 한 가지 심한 내용을 발견했네요. 책을 덮고 보니 맨 뒷장에
'조우와 게일은 달나라로 가서, 달나라 식민지에 있는 부유한 노부부의 집에서 일하게 되었어요. 그 노부부는 우리의 편입니다. 그러는 동안 노부부는 지구에 돌아오겠지만, 조우와 게일 두 사람은 달에서의 생활이 좋고 마음에 든다는 이유로 남아 있기로 했어요.'
라고 씌어 있습니다.
맙소사! 이게 무슨 소리입니까? 책 읽어보셨나요? 교정 한 번이라도 보셨나요?
조우와 게일은 달나라에서 죽습니다. 달나라에 살고 있는 노부부는 책에 등장하지도 않고, 부유한 여인이 있는데, 그 여인은 우리의 편이 아니라 '적'의 우두머리입니다. 우두머리답지 않게 게일의 손에 가볍게 죽고(대사 한 마디 없이), 조우와 게일은 장렬하게 산화합니다.

이걸 아이들에게 읽으라구요? 것도 공문에 보니 3학년 이라고 학년까지 지정해주셨더군요.
귀사의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니, 이 책은 5, 6학년용 도서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전욱수 님의 엮음이 아니라 지음으로 되어 있고, 표지는 조금 바뀌어 있더군요.

저는 도대체 모르겠습니다, 이 책을 무슨 생각으로 만드셨는지. 그리고 이런 책을 과학도서 독후감을 쓰라고 아이들에게 선정도서로 지정하셨다니. 그리고 교육청이나 학교쪽에 로비만 하면, 그래서 책만 팔면 끝입니까? 혹시 아이 있으십니까? 아이에게 자랑스럽게 이 책을 읽히십니까? 아이에게 이 책을 읽고 독후감을 쓰라고 하시나요?

제발 이 책은 다시 제대로 번역해서 재판을 찍으시거나, 안 팔린 책들은 폐기해주시기 바랍니다.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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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우스 2004-05-17 15: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호, 호랑녀란 닉네임처럼 신랄한 리뷰군요. 폐기해야 할 책이란 제목부터 박력이 넘쳐납니다. 늦게 와서 죄송하구요, 앞으로 잘 하겠습니다. 아이 셋 키우시느라 애 많이 쓰시겠네요. 저희 누나도 아들만 셋인데, 거의 죽습니다.

호랑녀 2004-05-17 16: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엇, 마태우스님, 저 양처럼 순한데요? 닉네임이 조상님 탓에 그냥 어쩌다 그리 되었을 뿐! ^^ 와 주신 것으로도 영광이옵니다.

panda78 2004-05-17 18: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이런 책이 아직도 남아있군요! 놀라워라.. 저는 아마 끝까지 못 읽고 책을 발기발기 찢어버렸을지도.. ^^;; 추천도서.. 믿을 게 못되는 건 여전하군요..

호랑녀 2004-05-18 08: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 공신력 있는 단체의 추천도서가 아니라면 정말 믿을 게 못됩니다 ^^ 요즘은 자기 출판사에서 그냥 무슨무슨 연구회 이런 단체 만들어서 추천도서 자기들걸로 골라서 학교에 뿌려요. 학교에만 뿌리면 그냥 무시하면 되는데, 때로는 교육청에서 공문으로 내려오더군요.
(도서실책, 발기발기 찢으면 아니되옵니다. 절차를 밟아서 폐기해야지요. ^^)

숨은아이 2004-06-25 1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직 그런 출판사가 있다는 것도 통탄할 일이지만, 교육청의 업무 태만이란... 그래도 지시에 무심코 따르지 않고 일일이 읽어보시는 호랑녀님 같은 사서교사가 계시니 고맙습니다. 그런데 호랑녀님, 지적하신 "죽음을 당하다"는 표현은요, 틀린 말이 아니랍니다. 아마 "죽임을 당하다"고 해야 맞다고 생각하신 것 같은데, 전 "죽임"이란 사동형을 쓰고 바로 "당하다"란 피동형을 쓰는 게 (문법엔 맞겠지만) 우리말에 어울리는 표현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죽음"은 "생명이 없어진 상태"를 뜻하고, 그런 상태를 당하게 되었다는 뜻에서 "죽음을 당하다"도 틀리지 않습니다. 표준국어대사전에 "죽음"이란 표제어 아래에도 그 표현이 용례로 나와 있구요.

호랑녀 2004-06-25 1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그렇군요... 무식~ㅠㅠ 해서 용감했습니다.
평소에 잘 나오지 않는 말이라 그냥 입에 걸려서, 찾아보지도 않고 썼네요.

제가 이런 책이더라고 담당선생님께 말씀을 드렸음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아니지만,) 다른 학년 중 어떤 반은 기어이 이 리스트 중 한 권을 읽고 오게 하기도 했습니다. 가끔 힘 빠집니다.

숨은아이 2004-06-27 14: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토닥토닥... 기운 내세요.

아프락사스 2009-04-29 1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F소설가 로버트 하인라인의 『스타십 트루퍼스』를 번안했거나 축약해서 내놓은 번역본인 모양이군요. (이 책에 앞서 1995년에 시공사에서 동명의 제목으로 출간된 바 있고, 이후 행복한책읽기에서 『스타쉽 트루퍼스』 혹은 『스타십 트루퍼스』라 하여 두 차례 개정 재간되었습니다) 멀쩡한 정역본이 한 차례도 아니고 세 차례나 나온 작품인데 이런 책이 아직도 절판되지 않고 나오는 걸 보면 신기하다면 신기하달까...

그 책에서는 하인라인을 어떻게 소개했을지 모르겠으나 그는 『스타십 트루퍼스』같은 군국주의적 소설만 쓴게 아니라 여성 해방을 주장하는 소설이나 아이들을 위한 SF소설을 쓰기도 한 사람입니다. 그의 소설에서는 아이들의 정신적 능력이 어른들의 그것과 동등한 위치에 서야 한다는 내용이 많았다고 하지요. (라고 어정쩡하게 말하는 건 그의 소설들이 『스타십 트루퍼스』를 제외하곤 정말 최근에야 소개되기 시작한 탓입니다.) 여러모로 어린 아이들에게도 권해줄만한 작가인데 출판사를 잘못 만난 탓에 이리 되었으니...

sayonara 2017-05-30 2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우... 이런 후진적인 출판문화같으니라고.... 아직도 간간이 저런 책들이 있지요... 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