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를 찾아서 - 중세학의 대가 자크 르 고프가 들려주는 중세의 참모습
자크 르 고프.장-모리스 드 몽트르미 지음, 최애리 옮김 / 해나무 / 2005년 9월
평점 :
절판


크게 보면 작은 것을 보지 못하고, 작게 보면 큰 것을 보지 못한다. 연속성을 제거한 흐름 속에는 정적만이 감돌고, 그것을 하나의 성격과 의미 속에 가두어 버리면 다른 또 하나의 의미는 묻혀지고 변질된다. 이렇게 제단과 변형으로 점철되어 버린 것들이 현실을 꿰차고 들어올 때 우리는 원형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역사 속에서 이러한 현상은 심심치 않게 발견된다.
정적이면서 웬지 음침하고, 이단심문관들의 갖가지의 고문과 화형, 지독한 종교적 세계관의 지배 하에서 문학과 예술은 철저하게 통제되고, 인간의 삶조차 신에게 예속 받던 시대를 우리는 암흑시대, 중세라고 불렀다. 봉건은 근대를 위해 폐기되어야 할 구시대의 산물이며, 찬란한 문화의 걸림돌로 작용하는 것으로 흔히들 여기게 되었다. 봉건에서 느껴지는 무능력, 불합리, 비이성적 이미지는 교과서적 믿음처럼 주위를 그렇게 맴돌고 있는 것이다.
이에 3세대 아날 학파, 자크 르 고프는 역사의 지속성과 변환점에 방점을 두고, 중세의 복권을 외친다.
이 친절한 대담집은 대중에게 이렇게 설명하려 한다. 르네상스의 탄생을 위해서 악역을 맡아야만 했던 '중세는 사실은 희망이다'라고…

근대의 몸부림은 르네상스가 아니라 중세에서 이미 시작되었다고 한다. 지식인의 탄생, 대학의 탄생, 도시의 탄생, 상업, 종교의 부흥, 병원 같은 복지시설, 휴머니즘… 이 모든 것의 생명력은 ‘암흑기’에 꿈틀거렸고, 그것은 희망의 싹을 틔웠다. 그리고 그것의 갈증만큼이나 강렬하게 시대의 요구로 자리를 잡아 꽃피우게 한 것이다.

역사의 큰 흐름에 시작과 끝을 규정할 수 있을까. 오직 긴 중세, 커다란 흐름으로써 보아야 하고 그것은 현재에도 늘 숨쉬고 있다는 점을 저자는 강조한다.
중세를 희망으로 부르는 이 거장의 주장에는 유럽의 근원에 대한 애정과 열정이 담겨 있다.
‘나는 중세와 내 시대를 함께 살았습니다. 중세학자로서 나는 내 현재를 한층 더 강렬하게 살았지요. 왜냐하면 모든 지나간 시대가 오늘 속에 여전히 살아 있다고 할 때, 나는 오늘날의 사회 속에서 특히 중세가 살아 있고, 근본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 책에서 잠깐 언급되는 유럽 헌법비준에 대한 저자의 발언에서는 하나의 유럽, 중세라는 정신적, 문화적, 역사적 토양에 대한 향수를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활발한 연구활동을 벌이고 있는 학자다움의 고집과 연륜은 지식 이상의 숭고함을 내비친다.

좀 까칠한 문장들과 종교 개념, 학술적인 어휘(라틴어, 그리스어 등)들이 굴곡처럼 느껴지나, 좀 더 탄탄한 배경지식을 갖추고 차근차근 다시 읽어본다면 얻을 것이 많은 책일 것 같다. 그러면서도 저자의 다른 저서인 ‘연옥의 탄생’, ‘중세의 지식인들’, ‘성왕 루이’, ‘또 다른 중세를 위하여’들의 맛보기가 얹어있으니 입문서로도 좋은 책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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